기자 초년병 시절, 매 순간이 어리숙하고 하는 일마다 실수 연발이었다. 온몸이 땀에 젖도록 아스팔트 위를 뛰어다녀도 사무실에 돌아오면 부장에게 귀 따갑게 욕먹기 일쑤. 밥이 코로 넘어가는지 입으로 넘어가는지 모르게 24시간을 보냈다. 하루는 어김없이 부장 호출을 받고 갔다가 눈물 콧물 다 빼고 돌아왔더니, 옆자리 선배가 “밥은 먹었냐, 밥이나 먹자”며 회사 근처 생선구이집으로 데리고 갔다.
당시 회사 주변에 생선구이를 파는 곳이 흔했다. 지방에서 올라와 서울살이 하며 가장 인상적인 장면 하나가, 고등어를 수북이 쌓아놓고 손님이 올 때마다 숯불로 구워 내는 피맛골 풍경이었다. ‘삐까번쩍’한 건물들 사이로 난 좁다란 골목길. 얼기설기 얽힌 전선이 하늘을 덮어 골목길도 어둑한데 촘촘하게 자리한 생선구이집마다 뿌연 연기를 뿜어내며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피맛골은 점심시간이면 정장 차림의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때마다 ‘서울 사람들은 왜 고급 정장을 입고 레스토랑이 아닌 이런 허름한 가게에서 줄 서서 밥을 먹지?’라는 의문이 들었다. 시골에서 갓 상경한 어린 마음에 서울 사람은 똥도 컬러 똥을 쌀 거란 환상이 있었나 보다.
그곳에서 맛본, 노릇하게 구워진 고등어와 쓰디쓴 소주 한잔은 그날 흘린 눈물만큼이나 짭짤하면서도 달콤했다. 골목을 나서는 길에 선배가 등짝 스매싱을 날리며 던진 말, “잘해 짜샤” 한마디에 속없이 ‘헤헤’ 웃음이 새어 나왔다.
피맛골 이름은 조선시대 평민들이 높은 벼슬 관리들의 말을 피해(避馬·피마) 다니던 뒷골목에서 유래한다. 얼마나 많은 직장인들이 상사의 눈을 피해 이 골목으로 꾸역꾸역 기어들었을지, 지금에 와서 되돌아보니 애잔하다. 좁다란 골목, 뿌연 연기, 왁자지껄한 가게 안. 고등어구이를 앞에 두고 울고 웃으며 회포를 푸는 정장맨들 사이에서 그날 왜인지 ‘나도 이제 서울 사람’ ‘서울에서 직장 생활 좀 해본 사람’이라는 알 수 없는 유대를 느꼈다. 그날의 고등어구이 한 점이 나를 지금까지 버티게 해준 힘이 됐다.
시간이 제법 흘러 사회생활에 굳은살 박인 지금 나는 후배들에게 곧잘 “라떼는 말이지~”라며 썰을 푼다. 후배들이 회사 일이 힘들다며 앓는 소리를 하면 생선구이가 나오는 잘 차려진 밥상을 앞에 두고 위로할 수 있을 정도의 짬도 됐다. 물론 나의 말이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안다. 보드라운 생선살 한 점, 구수한 된장국에 흰쌀밥이면 충분하다는 것도.
잘 알려지지 않은 동네 맛집만 찾아다니는 나에게 후배가 항상 하는 말이 있다.
“누구나 다 아는 맛인데, 그 아는 맛을 제대로 내는 집이 진짜 맛집 아닐까요?”
전적으로 동의한다. 다 아는 맛을 제대로 내는, 기본에 충실한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오랜 맛집이 고수해온, 기본에 충실한 한결같음이 지금의 우리를 버티게 하고 또다시 굴러가게 한다는 것을.
동네 인심을 담은 백반집
합정동 엄마손생선구이
서울 마포구 동교로24
블로그 bonnie_zum
상호에 ‘엄마’가 들어간 가게치고 맛없는 곳을 거의 못 봤다. 서울살이 20년 동안 이 동네 저 동네 메뚜기처럼 전전했던 나를 망원동에 정착하도록 이끈 집이 ‘엄마손생선구이’다. 행정구역상 합정동에 속하지만, 망원시장에서 가까워 망원동 맛집으로 불린다. 상호처럼 ‘엄마 손맛’을 제대로 내는 생선구이 전문 백반집이다. 갖가지 나물 반찬에 콩나물국, 바싹 구운 김, 흰쌀밥에 구운 생선. 특별할 것 없는 밥상인데 밥 한술 뜨는 순간 게 눈 감추듯 싹 비우게 된다. 주메뉴는 모듬생선구이와 갈치구이, 고등어김치찜, 동태탕. 모듬생선구이는 2인분 기준으로 고등어와 삼치, 가자미, 갈치 한쪽이 나온다. 다 아는 생선구이 맛을 제대로 내는 집.
옛 맛 그대로, 정석으로 구운 생선구이
충무로 잊지마식당
블로그 romanticodog
출판업종에 몸담은 이라면 충무로에서 ‘고갈비’ 한번 안 먹어본 사람 없을 것이다. 지금이야 많은 가게가 문을 닫았지만 30년 넘게 골목을 지킨 곳이 있으니 이름하여 ‘잊지마식당’이다. 생선을 쌀 뜬 물에 담가 비린내를 제거하고 정석으로 구워 내는 생선구이 맛집이다. 무엇보다 아버지는 생선을 굽고, 어머니는 반찬을 만들며, 딸이 서빙을 하는 가족 운영 식당이라 더 믿음이 간다. 생선은 주문 즉시 야외 오븐에서 굽기 시작한다. 8000원이라는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큼지막한 고등어와 이면수, 삼치 등을 맛볼 수 있다. 구수한 된장국으로 빈속을 달래고 촉촉하고 부드러운 생선살을 발라 쌈채소에 싸 먹으면 꿀맛이다. 그 옛날 충무로 노포를 떠올린다면 한 번쯤 가볼 만하다.
잘 차려진 한 상
신수동 도꼭지
서울 마포구 백범로10길 30
“따뜻한 밥 한 끼 먹자”는 친구 말에 제일 먼저 떠오른 가게가 도꼭지다. 대흥역 맛집을 검색하면 제일 상단에 뜨는 곳으로, 〈수요미식회〉 등 각종 매스컴에 소개될 만큼 맛 보증이 확실하다. 고등어구이와 삼치구이, 제주산 갈치구이 등을 파는데, 생선 비린내 없이 고소한 생선살 본연의 맛을 느낄 수 있다. 이 집의 메인 메뉴라면 단연 솥밥이다. 그중에서도 ‘도미솥밥’은 갓 도정한 쌀에 구운 도미뼈 육수와 도미살을 올려 달큰짭짤하다. 식전에 나오는 보드라운 달걀찜은 빈속을 부드럽게 달래주고 입맛을 돋우며, 기본 찬으로 정갈하게 올라오는 오징어젓갈과 장아찌, 열무김치, 조미김 등도 맛깔나 한 상 제대로 대접받은 기분이 든다.
허름한 노포, 세월이 보증하는 맛
종로 한일식당
서울 종로구 수표로20길 16-17
한때 ‘생선구이’ 하면 ‘종로’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종로 뒷골목만 들어가도 생선 굽는 냄새가 진동했다. 지금은 골목 상권이 예전 명성만 못하지만, 여전히 연탄불에 구운 생선 맛을 그리워하는 이라면 먼 길 마다 않고 찾는 곳이 ‘한일식당’이다. 초벌구이 해둔 고등어와 조기, 꽁치, 삼치 등을 쌓아놓고 주문 즉시 연탄불에 구워 파는데, 직화 특유의 탄내가 집에서 어머니가 구워주던 생선구이 맛을 떠올리게 한다. 손맛 좋은 이모님들이 내주는 밑반찬과 뚝배기 된장찌개도 일품이다. 밥은 솥에 담아주는데, 밥을 푸고 나서 물을 부어 먹는 누룽지도 별미다. 코로나로 인해 종로 생선구이 골목은 한 집 걸러 번갈아가며 영업한다. 확인해보고 방문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