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집

[아무튼, 주말] 따끈한 국물에 몸을 푼 밥알… 입안에서 빙글빙글 춤추네

산야초 2022. 1. 30. 12:08

[아무튼, 주말] 따끈한 국물에 몸을 푼 밥알… 입안에서 빙글빙글 춤추네

[정동현의 Pick] 곰탕

정동현 음식칼럼니스트
입력 2022.01.29 03:00
 
 
 
 
 
서울 신사동 '미남옥'의 곰탕(앞)과 내포무침./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오늘은 육수 끓이는 날이야.” 알리가 이 말을 하면 아무도 큰 솥을 쓸 수 없었다. 알리 같은 고참이 담당할 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는 나 같은 초짜에게 그런 일을 맡기지 않았다. 고기 육수는 주방의 근본이자 모든 것이었기 때문이다. 진액이 뽑힌 고기 육수는 그저 맛과 향, 영양 분자의 총합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칼로리를 넘어선 어떤 힘과 소원이 담겨 있는 듯했다. 곰탕 한 그릇을 앞에 두고도 비슷한 느낌이 든다. 긴 시간을 들여 고기 국물을 우린다는 것은 요리라는 기술적 차원을 넘어선다. 인류가 그릇을 빚고 그 그릇에 물을 담아 국물을 낸다는 것은 더 많은 사람이 음식을 나눠 먹는 계기가 되었다. 모두가 함께 나누는 그 국물 한 그릇이란 오랫동안 그토록 큰 의미였다.

 

서울 합정역 뒷골목 ‘합정옥’은 긴 역사를 자랑하는 곳은 아니다. 사대문 안 양반집처럼 거드름 피우며 그릇을 내놓는 곳도 아니다. 수더분하게 “국밥 한 그릇 하실래요?” 하고 친근하게 말 거는 사랑방 같은 곳이다. 시어머니도 아닌 시아버지가 끓여 먹던 조리법을 며느리가 이어받아 차렸다는 말을 들으면 어렴풋이 느껴지는 다정함과 친절함이 그 내리사랑을 닮은 것 같기도 하다.

 

암소를 써서 낸 국물은 절묘하여 거창한 수식어가 필요한 종류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어떤 재료를 써서 어떻게 조리했겠다는 것이 그대로 느껴지는 솔직 담백한 맛이었다. 기름의 고소한 맛은 덜하지만 고기와 뼈에서 우러난 감칠맛은 과한 기색 없이 혀에 사뿐사뿐 올라섰다. 시원하게 익은 김치는 식당이 아니라 집에서 담근 것처럼 맛이 차분했다.

 

방화동에 가면 ‘원조나주곰탕’이라는 집이 있다. 나주곰탕은 일반 곰탕에 비해 고기 건더기가 더해지고 달걀 지단이 올라가 푸짐해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어둑어둑한 비탈길 한편에 있는 이곳은 식사 시간 아닐 때 보면 어디에나 있는 식당이다. 그러나 영업을 시작하면 갑자기 사람들이 몰려와 자리를 채운다. 점심과 저녁 각각 딱 한 솥 걸어놓고 다 팔리면 문을 닫는다. 어렵게 엉덩이 놓을 곳을 찾으니 금세 반찬이 깔렸다. 그중 눈에 띄는 것은 양념 수육이었다. 빨간 양념을 촉촉히 묻힌 이 수육 한 접시가 반찬으로 나오니 사람들이 오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달걀 지단과 깨, 파를 잔뜩 올린 곰탕은 숟가락이 외롭게 휘저어질 염려가 없었다. 슬쩍 숟가락을 담그기만 해도 고기가 툭 건드려지는 것이 국물 반 고기 반이었다. 무한정 제공하는 공깃밥을 국물에 통째로 말았다. 간기가 느껴지는 국물은 얌전하기보다 야성적이었다. 양념장까지 풀자 이마에 땀이 났다. 점잔 떨며 내숭 부리기보다 여기 와서 한 그릇 먹으라고 바쁘게 손짓하는 억척스러움이 느껴졌다. 마지막 국물 한 방울을 위해 끝내 뚝배기를 두 손으로 들고 말았다.

 

강남으로 자리를 옮기면 도산공원 근처에 ‘미남옥’이 있다. 새롭게 문 연 이곳은 국물이 맑은 곰탕을 내놓는다. 기름이 많이 낄 것 같은 곰탕 집이지만 종갓집 세간 살림처럼 테이블부터 놋그릇까지 윤이 나지 않는 게 없었다. 간간하게 고춧가루 양념을 한 내포 무침은 내장에서 흔히 날 수 있는 잡내 없이 멀끔한 맛을 냈다. 고소하면서도 시큼하고 고기의 씹는 맛이 살아 있어 저절로 반주를 찾게 하는 맛이었다.

 

투명한 기름이 뜬 곰탕은 후후 불며 식혀 먹어야 좋은 온도였다. 국물에 몸을 푼 밥알이 입안에서 춤을 추듯 돌았다. 국물은 그 자체로 팽팽한 긴장감을 자아내며 밥알 한 알 한 알을 감쌌다. 얇게 썬 고기는 지방과 살코기가 3대7 정도로 섞여 씹을수록 그 질이 느껴졌다. 파를 듬뿍 넣고 국물을 슬슬 저었다. 김치를 쭉 찢어 밥에 올렸다. 놋그릇은 쉽게 그 바닥을 드러냈다. 국물과 고기, 밥. 언뜻 보면 단출하지만 채워진 것은 그릇의 부피 이상이었다.

 

큰 솥을 걸고 시간을 들여 국물을 우리는 사람들. 따뜻한 국물 한 그릇에 또 한나절을 나는 사람들. 그 사람들과 그릇이 켜켜이 쌓여 이룩한 길고 긴 세월의 한 고리가 그렇게 채워져 갔다.

 

#합정옥: 곰탕 1만1000원, 수육 3만5000원(소). (02)322-4822

#원조나주곰탕: 나주곰탕 1만2000원, 수육 2만5000원(소). (02)2666-8292

#미남옥: 곰탕 1만3000원(보통), 내포 무침 2만원. (02)549-55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