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고마다 ‘나락 산성’… 쌀값만 20% 떨어졌다
45년만에 최대폭 하락
입력 2022.07.07 03:00
6일 오후 경기 화성시 팔탄농협 미곡종합처리장(RPC·rice processing complex). 100평 규모 저온 창고에 벼를 담은 1톤짜리 자루들이 3단으로 겹겹이 쌓여 있었다. 벼 500톤을 보관할 수 있는 이곳엔 빈 공간 없이 작년 수확한 벼로 가득 차 있었다. 또 다른 저온 창고 세 곳과 곡물 저장 사일로(silo) 상황도 마찬가지다. 이 RPC의 쌀 재고는 3500톤으로 작년 이맘때보다 1000톤 이상 많다고 한다. 이영보 팔탄농협 RPC 장장은 “보통 7월쯤이면 작년 쌀을 다 팔아 창고 절반 이상이 비어 있어야 하는데 지금도 창고마다 도정도 안 된 벼가 가득 쌓여 있다”며 “8월 말부터 햅쌀이 들어올 텐데 재고가 넘쳐 창고에 넣지 못하고 야적하는 곳도 많을 것”이라고 했다.
◇쌀 생산·소비량 미스매치로 재고 쌓여
전국 쌀 산지에 재고가 넘쳐 창고마다 ‘나락(벼) 산성’을 이루고 있다. 우리 주식(主食)이던 쌀 소비가 매년 감소하는 게 주된 이유다. 이런 와중에 작년 쌀 농사 풍년으로 생산량까지 11% 증가해 재고 적체가 더 심해졌다. 충남 만세보령농협은 지난달 말 기준 쌀 재고가 1만2600톤으로 평년보다 5000톤 이상 많다고 한다. 경북의 한 RPC도 쌀 재고가 1만800톤에 달한다. 경기 송탄농협 RPC 관계자는 “경기도에서만 쌀 재고가 작년보다 30% 늘어 최근 10년간 가장 많다”며 “인근 RPC 상황도 비슷해 재고가 적은 RPC에 ‘쌀 좀 받아가서 팔아달라’고 읍소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지난 4월 말 기준 전국 산지 쌀 유통업체의 재고량은 작년보다 57% 증가했다.
한국인의 쌀 소비는 매년 감소하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1991년 116.3kg이던 1인당 연간 쌀 소비는 작년 56.9kg으로 절반으로 줄었다. 1인당 하루 쌀 156g을 먹는 셈인데, 즉석밥(210g) 1개도 안 되는 양이다. 10년 전과 비교하면 20% 줄었다. 반면 같은 기간 쌀 생산은 8.1% 감소하는 데 그쳤다. 업계 관계자는 “코로나로 학교 같은 단체 급식까지 중단돼 쌀 소비는 더 크게 줄었다”고 했다.
◇햅쌀 나오면 묵은쌀 헐값 밀어내기 할 판
글로벌 인플레이션으로 곡물 가격이 폭등하지만 쌀값은 ‘나 홀로 폭락’하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작년 6월 5만5871원(20kg)이던 쌀 산지 가격은 지난달 4만5215원으로 20%가까이 떨어졌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관계자는 “올해 쌀값 하락 폭은 데이터를 축적해온 45년 중 최대 폭”이라고 밝혔다.
올해 벼 출하가 두 달 앞으로 다가오면서 산지의 걱정은 더 커지고 있다. 창고마다 자리가 없어 쌀을 창고 밖에 야적해야 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또 올해 햅쌀이 나오면 작년 생산된 쌀을 헐값으로 밀어내기 해야 하는 상황이어서 쌀값이 더 떨어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경기도 오산에서 5만평 규모 쌀농사 짓는 안모(62)씨는 “비료 값, 기름 값 다 올랐는데 쌀값만 계속 떨어지니 올해 수확할 쌀을 본전이라도 건질 수 있을지 벌써 걱정”이라고 했다.
정부는 쌀값이 하락하자 가격 안정을 위해 올해 두 차례 쌀 27만톤을 사들여 비축에 나섰고, 지난 1일 추가로 10만톤을 매입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업계에선 “전국에 쌓은 쌀 재고를 해결하기엔 역부족”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코로나 끝나도 쌀 소비량 안 돌아와”
쌀값이 크게 하락하지만 정작 쌀 가공 식품업계도 웃지 못하는 실정이다. 쌀값만 떨어졌지 다른 부재료 값이 크게 오른 상황에서 빵·면 같은 밀 가공식품에 밀려 쌀 소비 자체가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국산 쌀로 떡, 영양밥 등을 제조하는 우리식품회사의 이상준 대표는 “주 원재료인 쌀값 하락으로 원재료 값이 6% 절감됐지만 콩, 보리, 대추, 기름 같은 다른 부재료가 10% 이상 올라 결국 제조에 드는 돈은 비슷하다”며 “한국인들이 커피랑 빵을 먹고 쌀은 먹지 않는 상황에서 물가 상승으로 소비가 더 위축돼 어려움이 있다”고 했다. 한국떡류제조업협동조합 최정탁 전무는 “코로나로 경조사가 다 사라지며 떡을 납품할 곳이 없어 힘들었는데, 코로나가 끝나도 쌀 소비가 좀처럼 회복되지 않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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