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스 오트루트 스키 투어링 (上)
‘100여 m를 추락했다고? 그 사람 살았을까? 어떻게 구조됐을까?’ 뒤 팀의 사고 소식을 들었을 때 우리는 3일차 구간을 거의 끝마친 참이었다. 발소레이산장Cabane de Valsorey(3,030m)에서 출발, 그랑 콩뱅Grand Combin의 어깨를 지나 샹리옹산장Cabane de Chanrion(2,462m)까지 가는 이날 루트에서 초반에 올라가야 할 가파른 설사면이 가장 위험한 구간이었다. 일반적으로는 부츠 크램폰을 착용하고 오르지만 우리는 전날 내린 신설 덕분에 스키닝(스키 베이스에 스킨을 붙여서 오르는 스키등반 방법)으로 오를 수 있었다. 우리보다 일찍 출발한 앞 팀의 선두가 이 구간에서 많이 지체하고 있었다. 그들 중 한 명은 킥턴을 효율적으로 하지 못했고, 급기야 스킨이 벗겨지면서 다른 팀원의 도움을 받아 수습했다. 갈 길이 먼 상황에서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우리는 그들을 앞지르기로 결정하고 지나쳤다. 후에 아무리 뒤를 돌아보아도 우리와 비슷하게 출발한 다른 팀들이 보이지 않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코스를 다 끝낸 시점에서야 만난 다른 팀에게 전해들은 얘기로는 우리가 추월했던 그 헤매던 스키어가 결국 마지막 구간에서 미끄러져 추락했다고 했다. 고개까지 단 2~3m를 남겨둔 지점이 조금 미끄럽고 얼음이 노출되어 있어 위험하게 느꼈던 기억이 스쳤다. 다행히 사고자는 절벽 방향으로 떨어지지 않았고, 설사면 상에서 추락을 멈췄다. 큰 부상은 없었다고 했다. 그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도움의 손길을 건넸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에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우리는 이때 찰나의 순간에 생과 사가 갈리는 길을 걷고 있음을 절감했다.
오트루트 온전히 즐기기
오트루트Haute route는 ‘높은 길’을 뜻한다. 알프스의 높은 지대를 가로질러 프랑스 샤모니에서 스위스 체르마트를 스키 투어링 또는 하이킹으로 연결하는 루트다. 알프스 속살 깊이 절경을 마주할 수 있기에 많은 스키어들이 갈망하지만 고산지대를 지나는 만큼 날씨와 눈 상태와 같은 외적인 요소들이 중요하게 작용해 일정을 계획대로 끝마치는 것이 어려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반적으로 매식과 숙박을 할 수 있는 고지대 산장들을 활용하면서 6~7일 정도의 일정을 갖는다.
이번 투어의 동반자 구교정과 함께 이 루트를 계획할 때 우리는 둘 다 체력적으로 도전적인 것을 갈구하고 있었다. 각자 산악스키 대회 등의 준비로 한 시즌 충분히 훈련했고, 그 끝을 마무리할 여정으로 오트루트가 제격이었다. 우리는 오트루트를 사흘에 마쳐 보기로 했다. 가이드를 고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직접 루트 계획부터 순간의 의사결정까지 모든 것을 헤쳐 나가야 했다. 구교정은 알프스에서 스키 투어링 경험이 없었고, 나는 스위스에 살면서 3년의 경험이 있었지만 오트루트는 처음이었다.
새해 첫 날 목표를 정하고 4월까지 준비할 것이 많았다. 작년에는 다른 동료들과 나흘 일정으로 계획해서 산장 예약까지 모든 준비를 마쳤지만 시즌 중 부상을 입어 진행하지 못했다. 사흘에 완료하는 새로운 목표를 위해 알프스를 따라 지도상에 새로운 선을 그렸다. 스키로 갈 수 있는 수많은 루트를 활용해서 골짜기의 마을들과 고지대의 산장들을 이리 저리 이으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각 루트에 어떤 특징과 잠재 위험이 있는지 모르는 상태였기 때문에 지도상에서는 그럴싸해 보일지라도, 결국엔 각 루트를 세심히 공부하고 제한된 시간과 체력적, 기술적 난이도 등을 바탕으로 우리 목표에 적합한 루트인지 평가했다. 1일 누적고도와 주행거리를 보면서 라인을 그렸다가 지웠다가를 반복하다 보니 샤모니에서부터 체르마트까지 사흘에 끊는 코스가 그려졌다. 그 코스는 소위 ‘클래식 오트루트’와 흡사했다.
어느새 4월이 되고 구교정이 제네바에 도착했다. 단 사흘의 휴가로 알프스에 와서 오트루트만을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마치고 가려는 사람은 아마도 이 친구가 전무후무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제네바에 있는 나의 집에 짐을 풀고 해질 무렵 동네 놀이터에 나가 고산 스키 투어링에 필요한 기술들을 각자 시연해 보이고 공유했다. 숨겨진 비콘 찾기, 크레바스에서 스스로 탈출하기, 구조하기 등등. 이틀 차날씨 예보가 좋지 않아 이틀차 플랜 B 그리고 사흘차 플랜 B, C까지 준비하고 각각의 코스를 GPX 파일로 만들어 시계에 넣었다. 백업 플랜에 해당되는 루트를 마저 공부하다 보니 새벽 2시가 넘었다. 이 정도면 할 만큼 했고 나머지는 하늘에 맡기자!
평일 이른 아침인데도 에귀 디 미디Aiguille du Midi(3,842m)행 케이블카 승강장 앞으로 하네스에 각종 장비를 찬 스키어들이 꽤 많이 모여들었다. 저들은 몽블랑산군의 어떤 멋진 루트를 목표로 떠나는 걸까? 그랑몽테Grands Montets 스키장에서 1회권 리프트 티켓을 사고 하네스부터 모든 장비를 착용했다. 곤돌라를 한 번 갈아타고 보샤드 스테이션Bochard(2,765m)에 도착했다. 아르장티에 빙하Argentiere glacier로 가기 위해 약간의 다운힐 후에 완만한 업힐 횡단을 해야 했다. 작은 고개Col des Rachasses(3,037m)를 지나니 그랑몽테 동사면 로낭Rognons 빙하에 도착했다. 발 아래 아르장티에 빙하와 그것을 둘러싼 암설벽 병풍이 만들어내는 대자연의 위용에 잠시 넋을 놓았다.
그 시작점으로부터 곧고 평탄하게 뻗어 있는 이 빙하는 피오르드 협곡 안에 꽁꽁 얼어붙은 바다를 연상케 했다. 앞으로 넘어야 할 샤르도네 고개의 위치를 확인하고 다운힐 준비를 마쳤다. 아르장티에 빙하를 향해 스키 다운을 신나게 할 수도 있었지만, 크레바스의 위치를 세심히 파악하면서 이동해야 했다. 다행히 앞서 지나간 스키 자국과 시계상의 GPS 루트를 참고해서 안전하게 아르장티에 빙하를 건넜다.
다음 샤르도네 고개Col du Chardonnet(3,323m)까지 표고차 800m의 본격적인 업힐을 해야 하는데 이미 계획보다 시간이 많이 지체됐다. 초반 업힐이 예상보다 길었고, 다운힐에서 구교정이 버거워했다. 자연 범프의 경험이 적은데 무거운 배낭까지 메고 턴을 하는 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일단 오후 3시경까지 일정을 마무리하려는 목표는 터무니없어졌다.
샤르도네 빙하를 어느 정도 올랐을까? 갑작스러운 슬립으로 추락을 하고 말았다. 킥턴(급경사 면에서 스키 업힐 중에 진행 방향을 반대로 돌리는 기술)을 하는 도중에 아래쪽 디딤발이 순간적으로 미끄러진 것이다. 5m 정도 정신없이 미끄러지다가 다행히 부츠에서 분리된 스키가 먼저 눈에 박히면서 추락을 잡아줬다. 사고로부터 정신을 차려보니 부츠 위 정강이 부분이 몹시 쓰라렸다. 눈에 박힌 스키에 부딪힐 때 바인딩 부분에 정강이가 충돌한 것이다. 킥턴 시에 폴이라도 정확하게 찍었으면 이런 추락은 막았을 텐데, 뒤늦은 후회를 하고 앞으로 매 걸음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기로 다짐했다.
샤르도네 고개의 마지막 50m에서 경사가 가팔라졌고 흙과 돌이 노출되어 스키를 배낭에 묶고 부츠 크램폰을 착용해 등반했다. 고갯마루에 도착하니 오늘 코스에서 제일 염려했던 하강 구간이 나왔다. 전체 일정 중에 유일하게 현수 하강이 옵션인 구간인 데, 40m씩 두번 하강해야 했다. 우리는 30m 로프만 챙겨온 터라 스노 볼라드 앵커나 아발라코프 앵커를 만들어 15m씩 하강할 생각까지 했는데, 다행히 사면의 눈 상태가 좋았다. 나는 스키 다운을 선택했고 구교정은 다운 클라이밍을 하기로 했다. 나는 그에게 피켈을 빌려주고 사이드 슬립으로 천천히 내려왔다.
샤르도네 고개를 지나 살레이나Saleina 빙하를 완만하게 내려가니 다음으로 넘어야 할 살레이나의 창Fenêtre de Saleina(3,261m)이 한눈에 들어왔다. 업힐 모드로 변환하고 약 150m를 올라 고개 앞에 도착했다. 30m의 가파른 사면을 넘으면 되는데 눈의 상태가 좋고 발자리도 이미 잘 다져져 있었다. 고개마다 크램폰을 신었다 벗으면 시간이 많이 지체되기 때문에 불필요한 변환은 없애고 싶었다. 하산이 늦어지면 버스 운행이 끊어져 택시를 불러야 하는 것도 서두르는 이유 중 하나였다. 이 정도의 고개는 해외 산악스키 대회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코스이고 로프나 부츠 크램폰을 사용하는 경우를 못 봤다고 설명하며 구교정에게 회유를 시도했지만 그는 부츠 크램폰을 이용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판단했다. 결국 각자의 방식으로 올랐다.
고개 끝에 도착하니 반대편으로 빙하 고원이 광활하게 펼쳐졌다. 트리엥 플라토Plateau du Trient였다. 등반 후에 하강해야 하는 여느 고개와 달리 올라서자 마자 빙하 고원이 눈높이에서 우리를 평온하게 맞았다. 고개의 바위틈을 지나 눈 덮인 설원에 들어가니 왜 이 고개의 이름이 고개Col가 아니라 창Fenêtre인지 깨달았다.
1m의 낮은 바위 턱을 내려가서 스키를 신고 트리엥 플라토 빙하를 신나게 미끄러져 내려갔다. 경사가 완만해서 많은 턴을 할 수 없었지만 지쳐 있는 우리에게 최적의 다운힐 조건이었다. 노래가 절로 나오고 턴을 그리며 춤을 췄다. 오른쪽 저 멀리 빙하 끝 암반 위에 자리잡은 트리엥 산장Cabane du Trient(3,170m)을 길잡이 삼아 다음 고개인 에캉데스Col des Ecandies(2,793m)로 방향을 잡고 내려갔다. 왼쪽의 빙하 위로는 투르 봉Aiguille du Tour이 공룡의 등뿔처럼 솟구쳐 있고, 정면의 계곡 너머로 에모송 저수호Lac d’Emosson와 이를 받치는 거대한 댐이 주위의 설산과 어우러져 색다른 풍경을 만들어 냈다.
다운힐이 끝나니 바로 암벽 등반 구간이었다. 고정 로프가 설치되어 있어서 나는 또다시 크램폰 없이 부츠로 등반했고 구교정은 크램폰을 착용했다. 슬슬 하늘이 먹구름으로 뒤덮이기 시작해서 이 마지막 고개를 빨리 마치고 싶었는데 잘못된 판단이었다. 중상부 구간의 상태는 고개 아래서 보였던 하단과 달리 스키 부츠로 디디기에 전혀 안정적이지 않았고 얼음이 끼어 있어 미끄러웠다.
먼저 카라비너와 슬링으로 로프와 하네스를 연결해서 만일을 대비했다. 경사가 가팔라지면서 손에 많이 의존했고, 적당한 바위 홀드가 없으면 로프를 잡고 올랐다. 두 개의 고정 로프 중에 체중을 실었던 로프가 위쪽에서 보니 피복이 벗겨지고 끊어지기 직전의 상태인 것을 알아챘다. 순간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이번엔 내 결정이 확실히 틀렸다. 보이지 않아서 판단할 수 없는 구간이 있을 땐 보수적인 결정을 내려야겠다는 교훈을 깊이 새겼다.
1일차의 모든 업힐이 끝나고 이제 약 7km의 다운힐 만이 남았다. 마을까지 표고차 1,400m를 스키 다운하면 된다. 샹페 호수Lac de Champex(1,467m) 방향으로 계곡을 따라 진행하니 파우더 사면부터 눈사태 잔해들이 널브러진 곳, 나무 사이 사이를 통과해야 하는 트리런 구간 등을 다양하게 지났다. 긴 다운힐에 결국 다리가 풀려 작은 범프에 한 번 넘어지고 나니 곧 스키장 슬로프와 만났다. 샹페 스키장 베이스(1,486m)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6시 반. 홀로 스키장 업힐 훈련을 마친 젊은 로컬 스키어만이 문닫은 스키장 스테이션을 지나쳤다.
버스를 기다리면서 다음날 일정을 고민했다. 정오 즈음부터 많은 눈이 예보되어 있었다. 가이드도 없는 초행길이었기 때문에 무조건적으로 보수적인 결정을 내리리라고 다짐하고 이 여정을 시작했다. 다음 코스 부르 생 피에르 마을Bourg-Saint-Pierre(1.642m)부터 샹리옹산장까지 가는 루트에는 위험 요소가 많았다. 사전에 코스 정보는 충분히 수집했기에 시야가 좋으면 도전해 볼 가치가 있었지만 화이트아웃 상황에서는 그 위험성을 안고 갈 수 없었다. 시야가 제한될 때는 크레바스와 낭떠러지를 피해가는 것도 어렵지만 아무리 천천히 가도 진행하는 사면의 상태를 전혀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자칫하다가는 눈사태 위험 구간에서 스스로 눈사태를 발생시킬 수 있다.
여러 옵션들 중에서 고민하는데 구교정이 아이디어를 냈다.
“내일 일정을 이틀에 나눠서 하고, 기존 사흘차 일정을 나흘째에 소화하는 건 어떨까요?”
아침 식사만을 하고 지나칠 예정이었던 발소레이산장에서 숙박을 하자는 얘기였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우리는 여분의 날이 하루 있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사흘 안에 마치는 것이 아니라 이 오트루트를 온전히 즐기는 것이지! 리스크가 있는 쿨와르 플라토Plateau du Couloir를 이틀차에 진행하지 않는 것은 주요했다. 눈사태 위험이 있는 발소레이산장 아래 구간은 눈이 쌓이기 전에 오전 일찍 통과하면 된다. 다만 위험도 측면에서 사흘차에 쿨와르 플라토 일대의 눈사태 위험성을 확인해야 했고, 일정 측면에서는 발소레이산장과 샹리옹산장의 숙박 가능 여부였다.
웹사이트를 통해 확인하니 예약이 꽉 찼던 산장들에 빈자리가 여럿 생겼다. 오트루트의 산장들은 1~2개월 전에 만석이라 이미 결정된 루트를 변경하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는데 기상 악화가 오히려 옵션을 늘려줬다. 숙박 당일 48시간 전부터는 온라인 예약이 안 돼 샹리옹산장에 전화를 거니 다행히 딱 두 자리가 남았다고 했다. 내일로 예약한 숙박을 그 다음날로 하루 미뤄주었다. 발소레이 산장지기와 통화를 하면서 쿨와르 플라토 일대의 눈사태 위험성을 먼저 물었다. 내일의 눈 예보를 고려해도 “No problem문제 없어!”이라고 했다. 가장 듣고 싶었던 대답이었다. 발소레이산장의 숙박 예약까지 마치니 모든 일정이 새롭게 다 세팅되었다. 마을로 내려가지 않고 산에서 온전히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헛투헛hut to hut일정이 생겼다는 점에서 한편으론 더 만족스러웠다.
오르시에르Orsieres에서 버스를 한 번 갈아타고 부르 생 피에르 마을에 도착하니 저녁 8시 30분이었다. 이날 묵은 곳은 스위스와 이탈리아 국경의 그랑 생 베르나르 고개Col du Grand St-Bernard(2,469m)를 넘기 전에 위치한 허름한 시골 호텔이었다. 3대에 걸쳐 60년째 운영되고 있다니 얼마나 많은 여행자들이 어떤 사연을 안고 이곳에 머물렀을 지 궁금해진다. 나 또한 뚜르 드 몽블랑Tour Du Mont Blanc 트레일을 걸으면서 여장을 푼 적이 있고 오늘은 오트루트를 위한 두 번째 방문이다 보니 애정이 생기는 베이스캠프였다. 우리는 마을에서 취하는 마지막 만찬을 푸짐히 먹고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월간산 7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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