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천억 주고 사왔는데 '날벼락'…도장 찍자 마자 '줄퇴사·파업'
리스크가 된 해외기업 인수
K엔터 기업 세계화는 신기루였나
글로벌 영화·웹툰·음반사 샀다가 '삐걱'
CJ ENM·하이브 등 대형 M&A 나섰지만
1000억 이상 투자 기업 8곳 중 6곳 '적자'
▶마켓인사이트 5월 6일 오후 6시 38분
K콘텐츠 분야의 국내 대표 기업이 최근 수년간 수천억~수조원을 주고 세계적인 콘텐츠·엔터테인먼트 기업을 경쟁적으로 사들였다가 후폭풍에 시달리고 있다. 라라랜드 제작사, 아리아나 그란데 소속사 등 명성과 영향력을 믿고 거액을 투자했지만 대부분 실적 악화에 시달리고 핵심 자산인 전문인력도 이탈하는 양상이다.
K콘텐츠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지만 글로벌 산업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기업 분석 능력과 인수 후 관리(PMI) 역량을 더 키워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10일 한국경제신문이 2020년부터 2022년까지 국내 콘텐츠 기업의 1000억원 이상 크로스보더(국내 기업의 해외 기업 인수) 거래를 모두 조사한 결과 총 8곳 중 6곳이 지난해 적자를 냈다. 경영 상황도 대부분 인수 당시보다 나빠졌다.
CJ ENM이 9200억원을 투입한 미국 영화 제작사 피프스시즌은 지난해까지 이어진 미국 할리우드 작가와 배우들의 파업 여파로 사실상 운영이 멈췄다. 지난해 적자만 1179억원에 달했다. 하이브가 1조515억원에 인수한 이타카홀딩스도 핵심 아티스트의 이탈설이 나오며 내홍을 겪고 있다. 네이버가 6974억원에 사들인 북미 1위 웹소설 플랫폼 왓패드와 카카오가 7809억원을 투입한 래디쉬·타파스미디어도 실적 악화에 고전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대형 인수합병(M&A)으로 인한 후유증이 단기에 해소되진 않을 것으로 전망한다. 뚜렷한 유형자산이 없는 콘텐츠 기업 인수는 M&A와 향후 관리 측면에서 난도가 높은 분야로 꼽힌다.
한 글로벌 투자은행(IB) 한국대표는 “투자에 실패했다고 ‘해외 M&A 포비아(공포)’에 빠지기보다 이를 자양분 삼아 면밀한 산업 분석 능력을 갖추고 현지 기업에 적합한 인수 후 관리 시스템을 구축하는 등 M&A 경쟁력을 키우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고 말했다.
K엔터 '과도한 베팅'이었나…인수도장 찍자 현지인력 줄퇴사·파업
글로벌 진출 교두보·시너지 기대…"콘텐츠 기업 인수 난도 높아"
하이브가 전 세계 엔터업계를 뒤흔든 무기는 BTS뿐만이 아니었다. 세계적 팝스타인 저스틴 비버, 아리아나 그란데 등이 소속된 이타카홀딩스를 2021년 1조원에 인수하며 화제의 중심에 섰다. 회사를 매각한 프로듀서 출신의 스쿠터 브라운은 하이브 아티스트의 미국 진출을 전폭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3년 뒤 이 회사는 하이브의 최대 리스크가 됐다. ‘캐시카우’ 저스틴 비버는 건강상 이유로 투어를 중단했고 아리아나 그란데 등 주요 아티스트는 경영진과의 불화로 이탈 조짐을 보였다. 미국 내 인수합병(M&A)과 관련해 전권을 부여받은 브라운은 영업이익이 5억원에 불과한 ‘절친’의 힙합 레이블을 2669억원에 사들여 손실을 더 키웠다. 하이브와 분쟁 중인 민희진 어도어 대표는 “적자 나는 회사를 1조원이나 주고 사냐”며 경영진을 공개 저격하기도 했다.
○수천억~수조원 주고 샀는데 대거 적자
비교적 저금리 기조가 이어지던 2020년부터 2022년까지 K콘텐츠 기업들은 수천억~수조원의 초대형 크로스보더(국경 간 거래) M&A를 잇달아 단행했다. 이타카홀딩스(하이브·1조515억원)를 비롯해 피프스시즌(CJ ENM·9200억원), 왓패드(네이버·6974억원) 등 8곳이다. 국내 기업들의 글로벌 진출을 위한 교두보가 될 것으로 기대했다.
인수 후 분위기는 확 달라졌다. 작년 흑자를 낸 회사는 넷마블의 소셜 카지노 기업 스핀엑스(1538억원)와 크래프톤의 미국 게임 개발사 언노운월즈(181억원) 두 곳뿐이다. 이타카홀딩스는 인수된 해 190억원의 영업이익을 올렸다가 곧바로 적자로 돌아섰다. 2022년 701억원, 2023년 1424억원의 순손실을 냈다. CJ ENM이 2022년 인수한 피프스시즌도 작년 1179억원의 대규모 적자를 발표했다. 2021년 카카오가 인수할 당시 적자 폭이 200억원이던 타파스·래디시의 작년 손실은 4252억원에 달했다. 일부 영업권 상각 등 회계상 이유로 적자 폭이 늘어난 점을 고려해도 기대한 만큼 시너지를 내지 못한 곳이 대다수라는 평가다.
○시너지 기대했지만…인력 줄 퇴사
K콘텐츠 기업들의 M&A 실패 원인으로는 △산업 분석의 부재 △임직원 융화 실패 △과도한 가격 책정 등이 꼽힌다. 특히 ‘사람’이 기업가치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콘텐츠 기업은 문화 차이로 인해 인수 후 관리(PMI)에 어려움이 많다. 기존 사업과 시너지를 내려다가도 현지 경영진의 반발에 물러서는 사례가 대다수다.
할리우드 3대 제작사 중 두 곳인 윕과 피프스시즌은 각각 2021년 SLL중앙, 2022년 CJ ENM에 매각됐다. ‘스카이캐슬’과 ‘기생충’ 등을 자체 제작한 역량에 글로벌 영향력을 갖춘 제작사가 결합하면 시너지가 날 것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인수 도장을 찍자마자 미국의 배우·방송인 노동조합과 미국작가조합이 동시 파업에 나섰다. 고정비는 느는데 가동률은 나오지 않아 손실이 쌓였다. 본사에서 임원을 파견했지만 자존심이 강한 현지 작가와 배우를 자극할까 봐 적극적으로 경영에 나서지 못한 채 상황을 관망할 수밖에 없었다.
한 투자은행(IB)업계 관계자는 “제조 분야 대표 기업들과 달리 콘텐츠 기업들은 제대로 된 해외 PMI 경험과 노하우가 없다”고 했다.
○글로벌 1위 욕심이 부른 베팅?
넘치는 유동성에 기대 높은 가격으로 사들였다가 금리 인상 후유증을 겪는 사례도 있다. 2021년 네이버가 왓패드를 인수하자 카카오는 물밑 검토만 하던 래디시와 타파스를 곧바로 사들여 맞불을 놨다. 양사 모두 면밀한 실사를 거치지 않고 인수한 대가를 대규모 적자로 치르고 있다.
한 IB 임원은 “초기 시행착오가 불가피한 측면이 있는 만큼 과도하게 위축되지 말고 세계 시장의 문을 계속 두드려야 한다”고 말했다.
차준호/하지은 기자 chach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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