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北, 춘향이 나오랬더니 방자를…당당히 격 따져라”
34년전 박정희도 “당당히 格 따져라”
기사입력 2013-06-12 03:00:00 기사수정 2013-06-12 14:03:12
1979년 회담에 北 ‘조국전선’ 나오자 “책임있는 대화 상대인지 문제 제기”
박정희의 친필 대북협상 지침 1979년 1월 29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북한과의 협상 때 염두에 두라며 협상 관련자들에게 전달한 친필 문서. 동훈 전 국토통일원 차관 제공
“한마디 성명서만 발표할 것이 아니라 당당히 대좌(對坐·마주 앉음)해 조리 있게 따지라.”
1979년 2월 15일. 박정희 전 대통령은 남북 당국회담을 이틀 앞두고 관련자 준비 회의에서 이같이 지시했다.
당시 회담은 그해 1월 19일, 박 전 대통령이 연두기자회견에서 1972년 7·4남북공동성명 발표 이후 사실상 중단됐던 남북 대화의 복원을 통해 시기·장소와 같은 조건이 없는 남북 당국자회담을 제안하면서 성사됐다.
동훈 당시 국토통일원 차관이 11일 동아일보에 제공한 회의 자료에 따르면 박 전 대통령은 북한이 공식 채널인 남북조절위원회가 아닌 정체불명의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조국전선) 대표를 회담 파트너로 참석시킨 데 대해 강력히 문제제기를 하라고 지시했다. 회담 파트너의 ‘격(格)’을 강조하는 박근혜 대통령의 현 인식과도 흡사한 대목이다.
박 전 대통령은 “조국전선이 무슨 단체인가를 따지고 (이는 북한이) 7·4성명을 무효화하겠다는 속셈이 아닌지를 중점적으로 추궁하라”며 “그들(조국전선)은 책임 있는 대화의 상대가 아님을 공개 석상인 대좌에서 야무지게 따져 내외에 분명히 알리라”고 지시했다. 그는 “춘향이(조절위 부위원장)를 나오라고 했는데 방자(조국전선 대표)가 나온 꼴인 그들의 무책임한 기만은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공박(攻駁)하라”며 “성명은 그 뒤에 내도 늦지 않다”고 지시했다. 박 전 대통령은 얼토당토않은 상대가 나오는 것을 향단이도 아닌 방자에 빗댄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도 “우리의 기본 입장은 당국 간이라면 언제 어디든지 갈 용의가 있음을 밝히라. 회담 장소에는 너무 구애될 것이 없다”며 “중립국감독위원회에 우리 측이 가서 대좌를 할 수도 있다”고 대화 의지를 비치기도 했다.
박 전 대통령이 구체적으로 실무진에게 회담에 임하는 자세를 당부한 점도 눈에 띈다. 그는 “대좌 후 처음부터 시비를 가릴 것이 아니라 부드럽고 포용성 있게 대하며 우리의 우위와 자신감을 최대한 보이도록 하라”면서 “악수도 하고 담배도 권하며 (북측이) 욕설을 하더라도 점잖게 대응하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 “北, 춘향이 보내랬더니 방자 내보내” ▼
앞서 박 전 대통령은 연두기자회견 열흘 뒤인 1월 29일 “북한의 의도를 잘 파악해야 한다”며 유의해야 할 북측의 함정 7가지를 친필로 정리해 회담 실무진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역시 동 전 차관이 제공한 친필 문서에 따르면 박 전 대통령은 북한이 회담에서 미군 철수나 연방제 채택을 결의하는 등의 통일전선전략을 시도할 것이며, 우리 측의 전력을 증강하는 계획을 중단시키거나 미군 철수를 촉진하는 평화 공세를 펼 수 있다고 여겼다. 또 7·4공동성명 합의기구인 남북조절위를 무력화하고 무리한 요구를 통해 향후 대화가 중단될 때 책임을 전가할 것이라는 점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동 전 차관은 “시대가 많이 흘러 그대로 대입할 수는 없지만 지금도 참조할 만한 내용들이 많이 담겨 있다”고 말했다.
실제 1979년 북한이 보인 행태는 34년이 지난 지금과도 흡사한 구석이 적지 않다.
북한은 박 전 대통령이 조건 없는 남북 대화를 제안한 지 나흘 뒤인 1월 23일 당국 간 회담이 아니라 정당과 사회단체 대표로 구성된 ‘전민족대회’ 소집을 역제안했다. 이어 2월 5일 ‘조국전선 중앙위’의 명의로 남한에 ‘민족통일준비위’의 발족을 제의했다. 조국전선이라는 단체와 민족통일준비위는 정체불명의 단체와 회의체였다. 북한은 민족통일준비위에 당국과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국내외 정당, 단체 대표들이 모두 참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박 전 대통령은 2월 12일 7·4공동성명 발표 이후 당국 간 공식 협의기구로 운영 중이던 ‘남북조절위원회’ 부위원장이 참여하는 회담을 다시 제안했다. 북한의 조국전선을 책임 있는 당국으로 인정할 수 없으니 남북조절위 회의를 판문점에서 갖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다음 날인 13일 북한은 일방적으로 “민족통일준비위 협의를 위해 17일 판문점에 조국전선 대표를 파견할 것이며 남한에서 어떤 명의의 대표가 나오든 민족통일준비위의 연락대표로 간주한다”고 발표했다.
34년이 지난 후, 북한은 박근혜 대통령이 4월 11일 정부 간 대화를 제의했으나 남측 민간 대표들을 개성에 초청하거나 개성공단 기업인들을 방북 초청하는 등 민간과의 접촉을 시도했다. 이는 북한에 우호적인 민간 기업이나 단체를 활용해 남남갈등을 유발하거나 선전용으로 활용하기 위한 전형적인 행태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북한이 회담 대표의 급을 놓고 장난을 치는 것도 비슷하다. 1979년 당시 남북은 17일 첫 회담을 한 뒤 3월까지 두 차례 회의를 더 했으나 우리 정부는 북한이 대화에 진정성을 갖고 있지 않다고 판단해 더는 접촉하지 않았다. 결국 회담은 흐지부지됐다.
동정민 기자 ditt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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