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전방은요" 20대 박근혜, 27년뒤 또…충격

산야초 2015. 10. 11. 15:35

"전방은요" 20대 박근혜, 27년뒤 또…충격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2012.12.23 02:23 / 수정 2012.12.23 10:41

22세부터 5년간 청와대 안보회의서 북한 공부
박근혜 당선인의 ‘북한 생각’ 짚어보기

1979년 10월 27일 새벽 1시30분 청와대. 당시 27세 박근혜는 전화벨 소리에 잠을 깬다. 잠시 후 김계원 비서실장이 “각하께서 돌아가셨습니다”라고 알렸다. 이어 뒤에 ‘10·26’으로 알려질 사태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들은 박근혜는 불쑥 “전방엔 이상이 없나요”라고 물었다. 방금 아버지의 총격 사망 소식을 들은 딸의 말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다.

“전방은요”라는 이 말은 27년 뒤인 2006년 5월 20일 지방선거 유세 중 ‘신촌 면도칼피습’으로 수술을 받은 뒤 “대전은요”라고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그가 유난히 강인해서일까. 그것만은 아니다. 박당선인에겐 50여 년에 걸친 ‘북한 생각’ 형성 과정이 있다. 그의 북한관은 청와대, 야인, 정치인에 걸쳐 형성기-유지기-변화기를 겪는다. 대체적으론 50~60대가 그렇듯 ‘보수적’이지만 농도에 굴곡이 있다. 그의 일기, 관련 서적, 당시 관계자를 통해 ‘박근혜의 북한 생각’을 짚어본다.

북한이 당선인에게 ‘직접 영향’을 미친 건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어머니(고육영수 여사)가 아버지의 오래된 군복 바지를 줄여 내게 입히곤 하셨다. 깡충 짧은 바가지 머리에 국방색 바지를 입은 내 모습은 어린 눈으로 봐도 촌스러웠다. 나는 그걸 입는게 너무 싫었다”라고 자서전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에 썼다.

북한이 소녀 박근혜를 괴롭힌 셈이다. 북한 경험은 띄엄띄엄 이어진다. 성심여고 시절인 68년, 북한 특수부대가 청와대를 공격하려 했던 1·21사태도 충격을 줬다. 당연히 반북 정서가 형성됐다.

그러나 아직은 어린 소녀, 당시 그 나이 또래들처럼 북한관은 단편적이었다. 결정적 계기는 어머니의 사망이다. 당시 프랑스에 유학 중 황망히 돌아온 박 당선인은 “날카로운 칼이 심장 깊숙이 꽂힌 듯한 통증이 몰려왔다.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내내 쉬지 않고 울었다.온몸의 뼈마디가 저려오는 듯했다… 배후에 조총련이 도사리고 있으며 북한의 지령에 의한 범행이었다”고 회상했다. 반북을 넘어 북한은 원수가 됐다. 75년부터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통해 북한관은 강화되고 역할도 깊어진다. ‘근혜-카터 회담’은 좋은 사례다.

청와대 시절

75년 월남의 패망·공산화에 이어 지미 카터 대통령이 주한미군 지상군 철수 방침을 정하자 한국은 ‘북한 남침’의 공포에 휩싸였다. 당시 국력이 북한에 미치지 못하던 때였다. 그런 가운데 79년 6월 29일 카터 대통령이 방한했다. 카터는 국빈 예우도 마다하고 동두천의 2사단 캠프로 가서 첫날을 잤다. 박 대통령의 인권 탄압에 대한 경고였다.

다음날 정상회담에도 차가운 태도를 보였다. 박 대통령이 두 시간 반의 정상회담에서 45분간이나 철군 반대론을 설명하자 카터는 밴스 국무장관과 브라운 국방장관에게 “박이 계속 이런식으로 나온다면 미군을 다 철수시키겠다” 는 메모를 보냈다(돈 오버도퍼의 ?투 코리아?). 냉랭한 분위기는 언론에도 드러난다.

중앙일보 79년 6월 30일자는 ‘정상 간에 솔직한 대화가 있었다’고 썼다. 이는 ‘거친 회담’의 외교적 표현이었다. 박-카터 1차 회담이 그렇게 끝나자 박근혜가 카터 대통령의 조깅을 대화 소재로 부인 로절린 여사에게 말을 걸었다.

박근혜=“조깅이 건강에 도움이 될 것 같군요. 그런데 방금 수술한 사람이나 몸이 아픈사람은 안 되겠네요.”

로절린=“네, 섣불리 하면 해로울지도요.”

박=“국가도 마찬가지 같습니다. 지금 한국은 북한 남침으로 폐허가 된 지 얼마 안 됐고,지금도 북한은 남침을 노리고 있습니다. 간첩을 보내고 땅굴을 파고 특공대를 보내 청와대까지 습격했습니다.”

로절린=“그 정도인가요.”

박=“아픈 사람에게 건강한 사람처럼 조깅하라면 건강을 상할 수 있는 것처럼 남북이 대치하는 어려운 상황에서 경제 발전에 모든 힘을 쏟아야 하는 한국은 다른 나라와 상황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로절린=“그 얘기를 대통령께 전할께요.”

만찬 자리에서 카터 대통령은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고, 만찬 내내 박근혜에게 질문했다. 그래서 ‘근혜-카터’ 회담이란 우스개말이 나왔다. 곧 주한미군 철수 계획이 철회됐다(이상 박근혜의 자서전 인용, 재구성).

후에 로절린은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박근혜와의 대화를 카터 대통령에게 전해 문제를 푸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했다.

박 당선인은 저서에서 “그런 외교적 수완은 국빈 방문 때 퍼스트레이디를 하면서, 또 간간이 아버지를 통역하거나 수행 차량에 함께 타서도 배우고 밥상 대화를 통해서도 배웠다”고 썼다. 여동생 서영(옛이름 근영)도 94년 7월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아버지가 언니와 외교 얘기를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실제론 그 정도가 아니었다. 74~79년 부총리를 지낸 남덕우 전 국무총리는 이렇게 회상한다.

“매주 목요일 대통령 주재로 청와대 안보회의가 있었어요. 관계 장관들이 소관 분야안보 정세를 보고했는데 거기에 어린 박근혜가 있었거든. 의견은 내지 않고 가만히 앉아들었지요. 육영수 여사가 사망한 뒤 박 대통령이 그렇게 하도록 한 것이에요. 나도 박근혜가 대통령 옆에 앉아 있는 것을 봤는데 그래서 안보 정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알았지. 총명하니까… 대통령 다음으로 안보상황을 잘 알게 됐어요. 방위산업도 전부는 몰라도 어깨 너머로 알게 됐고…”라고 했다. 요즘 대학생 인턴을 시작할 22세부터 27세까지 대통령을 위한 사전 수업을 받은 셈이다. 그런 게 바탕이 돼 “전방은요”라는 통치자 수준의 말이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런데 당시 상황은 실제로도 간단치 않았다. 10. 26 이틀 전인 24일 존 위컴 주한 미 사령관은 “북한이 항공기 1100대, 함정 450대를 보유해 한·미 연합전력보다 우위”라고 말했고, 다음날인 25일엔 문화공보부 대변인 명의로 “북한은 한국 내 일부 소요사태에 오판 말라”는 성명을 발표했었다. 그때 부산·마산은 군이 투입될 만큼 반유신 시위가 심각했고, 마침 25일은 목요일로 안보장관 회의가 있는 날이다. 당시 박근혜는 북한을 심각하게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박 당선인은 그런 경험을 언급하지 않아 왔다. 80년 2월 4일 “지도자가 속도 없이 자비한 척하다 많은 사람이 도리어 희생된다. 1급 기밀까지 모두 보고되는 이유도 정보를 잘 듣고 판단해 안심하고 살 수 있게 해달라는 뜻”이라고 일기에 슬쩍 비치는 정도였다.

야인 시절

청와대를 떠나 평범한 야인이 된 박근혜의 대북 인식엔 큰 변화가 없었다. 북한 관련 뉴스가 있을 때 남긴 일기의 단상들이 이를 보여준다. 90년 6월 21일 북한이 남북 고위급회담 재개를 제의하자 그는 ‘최근 여론조사에 주한미군 철수 반대가 84%쯤 된다’고 썼다.

6월 24일에는 ‘한반도에는 전쟁 가능성이 있다고 믿는 국민이 61% 이상이라는 여론조사가 나왔다. 하물며 70년대 초기야! 북한 노선은 예나 지금이나 변치 않았다고 믿는 사람도 50%가 넘는다’고 썼다. 이날 북한 출신 소련파 18명이 서울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소련 주간지 ‘모스크바 뉴스’가 ‘6·25는 스탈린 명령으로 북한이 도발했다’ ‘북한이 독가스를 대량 비축하고 있다’는 보도를 쏟아냈다.

91년 10월 10일엔 ‘평온·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얼마나 공을 들여야 하는지 모른다’고 썼다. 이날 중국을 방문한 김일성이 냉대를 받았다는 내용, 6·25를 스탈린이 부추겼다는 당시소련 극동군 사령관 참모의 증언 같은 보도가 있었다.

정치인 시절

당선인의 북한 인식 변화는 2002년 북한 방문이 계기였다. 결심 전 그는 ‘북한은 나에게 어떤 존재였던가. 어머니가 북의 사주를 받은 총탄에 돌아가셨고, 아버지와 우리 가족을 기습하기 위해 북에서 보낸 특수부대가 청와대 바로 앞까지 왔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북의 위협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노심초사하던 모습을 보아 왔다’고 회상했다. 북한은 여전히 원수였다.

그럼에도 ‘이제 과거의 아픔과 기억을 뛰어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그런 아픔을 겪은 나이기에 남북관계를 가장 잘 풀어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북한방문길에 나선 그에게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특별기를 보냈고, 단독 회담도 했으며 판문점 귀환도 배려했다. 그 경험을 토대로 박 당선인은 “북에 다녀온 후 남북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고 했다.

진심을 바탕으로 상호 신뢰를 쌓아야 발전적 협상과 약속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신뢰 중시’라는 자신 인생관의 연장선이다. 한 관계자는 “2002년 평양 방문 때 김정일이 박근혜를 통해 김대중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냈다. 거기엔 ‘박근혜가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쓰여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박근혜의 대북 인식이 변화의 언저리에 서게 된 것이다.

이후 2005년 미국 방문길엔 북핵 해결을 위한 ‘밥상론’도 제시했다. ‘단계적으로 하지 말고 한 상에 다 올려놓는 한국 밥상처럼 모든 걸 올려놓고 포괄적으로 타결하자’는 것이다. 그럼에도 2007년 그는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문제는 북한 변화, 북한의 선군 정치 폐기”라고 말해 여전히 ‘이명박보다 더 오른쪽’으로 평가됐다.

좌파는 그를 ‘평화통일이라는 숙제를 풀어가는 데 적합하지 않은 인물’로 규정했다. 이번 대선 과정에서 그는 북한과의 상호 존중과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말했고 ‘동포애와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북한을 언제라도 도울 준비가 돼 있다’고 했다.

‘신뢰 중시’라는 기조를 유지하면서도 반북·보수에서 개량적 보수로의 이동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김정은이 쏜 미사일로 실천 시점은 멀어졌다. 당선인의 외교안보 핵심 브레인인 윤병세 단장은 “당선인의 북한 생각은 확실히 진화하고있다. ‘안보도 튼튼히 하면서 유연한 대화에도 무게를 둔다”며 “그런데 북한의 미사일이 악재가 됐다”고 말했다.


참고서적

『평범한 가정에 태어났더라면』(남송, 1993)
『고난을 벗 삼아 진실을 등대 삼아』(부산일보 출판국, 1998),
『나의 어머니 육영수』(사람과 사람, 2000)
『(자서전)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위즈덤하우스, 2007)
『나는 독신을 꿈꾸지 않았다』(북포스, 2005)
『박근혜 일기』(동동, 2012)
『박근혜, 무궁화 꽃이 필 때』(리전, 2012)
『박근혜의 거울』(시대의 창, 2011)
 
 
 
상상초월 충격 받은 박근혜 눈물 쏟으며…
 
 
[박근혜 대통령 당선] 고1때 꿈 교육자 였지만… 육여사 참극 후 영욕의 삶
청와대 살면서도 검소한 생활
보리밥·멸치 도시락 들고 다녀
입력시간 : 2012.12.19 23:26:24  수정시간 : 2012.12.20 08:03:24
 
  • 지난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영전에 헌화, 분향하는 모습.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20일 새벽이 돼서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자택으로 돌아왔다.

19일 자정께 여의도 당사 주변을 붉게 물들인 지지자들에게 벅찬 당선 소감을 밝히고도 몇 시간이 지나서였다.
박 당선인은 거실에 놓인 고(故)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사진을 보며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른다. 12세 어린 나이에 어머니의 손을 잡고 들어가 15년을 지낸 청와대를 이제 환갑을 넘은 61세의 나이에 다시 들어간다. 그는 이제 아버지에 이어 국민이 선택한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 당당하게 첫발을 내딛는다.

▦촌스러운 엄친딸

"근혜 숙제 좀 봐주세요."

지난 1961년 5월15일 밤 10시. 권총을 차고 서울 중구 신당동 집을 나서려는 박정희에게 아내 육영수가 말했다. 장충초등학교 4학년이던 딸 박근혜는 안방에서 그림숙제를 하고 있었다. 박정희는 딸의 머리를 쓰다듬은 후 아내에게 "내일 아침 정각 5시에 라디오를 들으시오"라고 말하며 집을 나섰다.

다음날 새벽 5시7분 라디오에서는 "군부는 일제히 행동을 개시해 국가의 행정ㆍ입법ㆍ사법의 3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했다"는 발표가 나왔다. 5ㆍ16 군사 쿠데타가 성공했다는 소식이었다. 당시에는 5ㆍ16 '혁명'으로 불렸다. 박 당선인은 이날을 "집안이 평소와 다르게 긴장돼 있었고 어머니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주변을 정리하신 것으로 생각된다"고 술회했다.

박 당선인은 6ㆍ25 전쟁 중인 1952년 2월2일 경북 대구시 삼덕동(현 중구 삼덕동)에서 육군본부 작전국 차장이던 박정희 대령과 옥천공립여자전수학교(현 옥천여중)교사 출신인 육영수의 큰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전 부인과의 사이에 딸 하나가 있었고 이후 육영수와 사이에 딸 근영(육영재단 이사장)과 아들 지만(EG대표)을 뒀다.

아버지 임지를 따라 광주를 거쳐 서울 신당동에 살던 10세 무렵까지 평범했던 박 당선인의 삶은 아버지가 대통령에 취임한 1963년 12월17일부터 '영애(令愛)'로 바뀐다. 다만 특권의식을 갖지 않게 하려는 어머니의 뜻에 따라 청와대 생활은 성심여중에 입학한 1964년부터 시작했다.

박 당선인은 이 시기부터 각종 외교 행사에 참석한다. 당시 신문 보도를 보면 박 당선인은 14세이던 1966년 존슨 미국 대통령의 방한 당시 '한국의 밤' 행사에 등장했고 1968년 9월에는 대통령 부부의 호주 방문에 동행했다. 1969년에는 그가 대통령 내외 없이 일본 요코하마에서 열린 당시 세계 최대의 유조선인 '유니버스 코리아'호의 진수식에서 샴페인을 떠뜨리는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

박 당선인은 어머니 육 여사의 영향으로 검소한 삶을 살려 애썼다. 박 후보 캠프에서 유튜브에 올려놓은 동영상 '박근혜를 말하다 진짜 근혜를 아세요?'에 등장한 중고등 학교 동창생이 전하는 박 당선인은 다소 촌스러운 '엄친딸'이었다.

한 친구는 영상 인터뷰에서 "근혜는 보리쌀 들어간 밥에 달걀부침ㆍ멸치볶음을 도시락으로 싸왔다. '별것도 없이 싸오네' 싶었다"고 말했다.

한 학년 선배라는 이는 "(당시 박 당선인은) 의외로 조금 촌스러웠다"며 "그래서'어머 쟤야?'라고 했었다"고 평가했다. 박 당선인은 어머니의 뜻에 따라 어머니 옷을 줄여 입었고 치마 길이는 늘 무릎 아래까지 내려왔다.

박 당선인이 2007년 대선 경선 당시 공개한 성적표를 보면 초등학교 6년 내내 '수'와 '우'를 받았고 중ㆍ고교 시절에는 6년 내내 반에서 1등을 했다. "성실하고 겸손하며 말이 부드럽고 친절하다" "약간 냉정한 감이 흐르는 편"이라는 선생님의 평가도 눈에 띈다.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다. 박 당선인은 고 1때 장래희망으로 교육자라고 썼다. 그의 인생이 평범했다면 교육자가 돼 있을 것이라고 주변 지인들은 말했다.

▦유신 시위에 공부 매진…어머니 사망 후 교수 꿈 포기

박 당선인은 1970년 서강대 전자공학과에 수석으로 입학한다. 어머니는 사학 전공을 권했지만 그는 "전자산업 분야에서 뭔가를 생산하겠다는 의욕으로 전자공학을 고집했다"고 말했다. 사학보다는 전자공학을 원했던 박 대통령의 권유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대학에서도 그는 4년 동안 B학점 7과목, C학점 1과목을 제외하고는 모두 A를 받은 모범생이었다. 그는 이공계 수석으로 서강대를 졸업한다.

그를 둘러싼 시국은 심상치 않게 흘러갔다. 박 대통령은 3선 개헌을 통해 1970년 7월 1일 7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박 대통령은 그날 각국 외교단과 여야 의원이 참석한 경축연회장에 서강대 2학년이던 딸 박 당선인을 대동했다. 박 당선인의 서강대 동료들은 박 대통령이 내린 유신반대 시위를 했지만 그는 "실험실과 도서관에서 공부만 열심히 했다"고 밝힌 바 있다.

박 당선인은 1974년 서강대를 졸업한 후 곧바로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그러나 6개월 만인 1974년 8월15일 광복절 경축식장에서 육 여사가 간첩 문세광의 총탄에 맞아 사망하며 그의 인생은 변곡점을 맞는다. 프랑스 유학에서 귀국하던 중 신문기사로 어머니의 별세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그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수 만 볼트의 전기가 훑고 지나가는' 충격을 받았고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박 당선인은 그해 11월10일 일기장에 "소탈한 생활, 한 인간으로서의 나의 꿈, 이 모든 것을 집어던지기로 했다"고 적는다. 그는 어머니 장례 한 달 뒤 열린 영부인배 쟁탈 어머니 배구대회 참석을 시작으로 영부인을 대행한다.

박 당선인은 단순히 영부인 대행 역할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충ㆍ 효ㆍ 예'라는 새마을운동의 정신을 확산한다며 '새마음운동'을 시작한다. 그가 어머니 사망 직후인 1974년 8월 말 만난 고 최태민 목사의 권유를 받고서다. 1978년 구국여성봉사단과 새마음봉사단 총재가 된 박 당선인은 자선 구호모임 중심의 활동을 한 육 여사와 달리 시도별·직능별·연령별 지부를 만드는 등 조직 운동을 벌였다. 새마음운동은 현재까지도 각 지역에 새마음 포럼 등의 친박계 조직으로 남아 있다.

1979년 10ㆍ26이 일어나기 직전 박정희 정부의 장기집권에 반대하는 민심은 요동치고 있었다. 박 당선인은 박 대통령의 최측근이자 서로 대립하고 있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차지철 경호실장부터 해임해야 한다고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박 당선인은 1989년 인터뷰에서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몇 개월 전부터 점심 때마다 누가 후임 대통령으로 적당하냐고 나에게 물으셨다. 저는 어떤 사람이 적당하다고 말씀 드리지는 않았다. 다만 아버지가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면서 '최규하를 생각하고 계시구나'라고 알았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이 같은 증언을 통해 박 대통령이 퇴임을 준비했다고 강변했다.

▦다시 살라면 죽음 택할 것…마흔 넘어 평온 찾아

박 당선인은 박 대통령의 장례를 치른 후 1979년 11월21일 동생들과 함께 청와대를 떠나 신당동 집에 돌아왔다. 10ㆍ26 직후 전두환 당시 합동수사본부장은 청와대 금고에 있던 돈 중 6억원을 '위로금'조로 박 당선인에게 줬다. 그는 1982년 경남기업 신기수 회장이 마련해준 서울 성북동 주택으로 이사했다. 그때부터 박 당선인은 1997년 정치에 입문하기까지 약 17년간 대외 접촉을 삼간 채 박정희 정부가 세운 학교와 장학재단을 이끄는 데 전념했다. 영남대재단 영남학원 이사, 육영재단 이사장, 정수장학회 이사장, 한국문화재단 이사장을 맡았다.

그러나 이 시기 언론이 보도한 그는 평안하지 않았다. 그는 1980년 영남대재단 비리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고 1988년에는 이사 자리에서도 내려왔다. 1990년 동생 근영과 갈등 끝에 육영재단 이사장직을 내놓았다. 정수장학회 이사장은 2005년에, 한국문화재단은 올해 10월 해산하면서 자연스럽게 사퇴했다.

1980년 이후 박 당선인은 주로 '박정희 역사 바로 세우기'에 많은 시간과 공을 들였다. 그러나 1980~1990년대 여론은 박정희 정부에 비판적이었다. 그가 권력의 속성과 여기에 엮인 사람의 배신을 체감한 때도 이 시절이다. 이즈음 그가 쓴 일기에 드러나 있다. "돼지우리 같은 곳에 살면서 허기가 져 누렇게 뜬 얼굴로 이웃나라에 기대기나 하고 자신을 믿지 못하던 민족이, 옛날이 거짓 같이 변모했는데, 그 일을 이룬 사람은 결국 욕만 먹고, 욕하면서도 그 희생자가 이뤄놓은 열매를 즐기는 나라라면, 그 나라에서는 아무도 애국할 이유나 가치를 찾지 못할 것이다."(1981년 3월5일 박 당선인 일기)

그는 전두환 정부의 과를 추궁했던 1989년 11월 '5공 청문회' 때 자신의 처지를 되새긴 듯한 일기도 남겼다. "권력이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아무 죄 없는 가슴에, 그 가족의 가슴에 영원히 지우기 힘든 상처를 남길 수도 있고 생사람을 잡을 수도 있는 것이다."(1989년 11월3일)

박 대통령 서거 10주년을 맞아 그는 박정희 기념사업회, 육영수 기념사업회를 발족시킨다. 또 자신이 만든 근화봉사단의 소식지인 '근화보' 사설을 직접 쓰고 책 '겨레의 지도자', 영화 '조국의 등불' 등을 만들어 박정희 정부에 대한 비난 여론을 되돌리려고 노력했다. 10ㆍ26 이후 10년 만에 대담 프로그램인 MBC 박경재의 시사토론에 출연한 것을 비롯해 각종 여성지ㆍ신문 등 언론과 잇따라 인터뷰도 했다.

당시 인터뷰에서 그는 5ㆍ16, 3선 개헌 등의 논란에 대해 "(1960~1970년대) 당시 시대 상황에 대해 정확한 이야기가 안 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5ㆍ16이 먼저 나느냐 공산당이 쳐들어오느냐 하는 시점인데 다행히 5ㆍ16이 먼저 나서 파멸 직전의 국가가 구출됐다. 나라가 없어지면 민주주의를 못하는 것은 둘째치고 다 죽는 판"이라고 대답했다. 동시에 박 당선인은 이 시기 독서와 사색ㆍ여행을 통해 수양에 가까운 생활을 한다. 열국지 등 제왕학에 관한 책을 비롯해 불교와 유교 등 종교서적을 읽은 기록이 남아 있다.

미혼인 박 당선인은 한때 마음에 둔 남성이 있었으나 인연이 닿지 않은 후로 이성적인 만남은 없었다고 한다. 그는 최근 서울여대생과 만남에서 두 명의 이상의 남성과 데이트했다는 데 수긍해 화제가 됐다. 그는 1990년대 초 비로소 과거의 굴레에서 벗어난 것 같다. 박정희 정부에 대한 공과를 모두 인정하자는 여론이 인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마흔이 되던 1992년 5월21일 "다시 살라고 한다면 차라리 죽음을 택할지도 모른다"면서도 "그런데 요즘에는 난생 처음으로 산다는 것이 기쁘고 고마운 일이라는 느낌이 든다"고 썼다.

▦IMF 사태 여파 박정희 신드롬…스타 정치인으로 변신

대통령 딸로 국민적인 인기를 얻었던 박 당선인을 향한 정치권의 영입 제의가 들어온 것은 이즈음이다. 자유민주연합은 1995년 창당과 함께 신당 바람을 일으키기 위해 박 당선인을 대구 구미 지방선거 후보로 공천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해 열린 15대 총선 출마설도 나돌았다.

정작 박 당선인이 정계에 입문한 것은 1997년 제15대 대선에 출마한 당시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를 지원하면서다. 그는 정치권에 들어온 가장 큰 이유로 외환위기로 인한 국제통화기금(IMF)체제를 들었다. 그는 당시 한나라당 입당 기자회견에서 "1960∼1970년대 국민이 피땀 흘려 일으킨 나라가 오늘 같은 난국에 처한 것을 보면 돌아가신 아버님 생각이 나 목이 메일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면서 "이러한 때 정치에 참여해 국가를 위해 기여하는 것이 부모님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한나라당은 15대 대선에 패했지만 대선 유세에서 박 당선인의 인기는 높았다. IMF시대를 맞으면서 일어난 '박정희 신드롬' 까닭이다. 그는 1998년 경북 문경ㆍ예천 보궐선거에 공천을 신청했다가 당의 천거에 따라 연고가 없던 대구 달성군 보선 후보로 낙점 받는다.

열세인 선거 상황에서 승리하는 박 당선인 특유의 뒷심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다. 당시 박 당선인의 상대는 이 지역 출신의 엄삼탁 국민회의 부총재다. 정치적으로 거물이었지만 박 당선인은 두 배 넘는 표차로 압승을 거뒀다.

이후 박 당선인은 1998년 각종 선거 유세에서 '박근혜 신드롬'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스타 정치인으로 부상한다. 이어 그는 초선 의원임에도 9명인 부총재단에 여성 몫으로 발탁된다. 이후에는 여성 몫이 아닌 선출직으로 야당 지도부가 된 그는 전국을 다니면서 김대중 정부의 실정을 규탄한 장외집회에서 다른 중진의원보다 돋보이는 활약을 펼쳤다.

박 당선인은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당 지도부와 일전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당내에서 박정희 기념관 건립에 미온적이자 부총재직을 던지는가 하면 국무총리 해임 건의안에 홀로 불참하며 반대의사를 나타냈다.

무엇보다 그가 쇄신파 의원으로 알려진 계기는 이회창 총재의 독선적 당 운영에 탈당으로 맞서면서다. 그는 2002년 정치개혁을 외치며 전격 탈당했고 대선출마 가능성을 닫지 않았다. 그는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해 대표에 취임했고 보수 진영 정치인으로서는 처음 고(故)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정치실험은 9개월 만에 끝난다. 당시 그는 대선주자로 급부상한 정몽준 무소속 의원과 연대가 무산됐고 지지율은 20%에서 1%로 폭락했다. 노무현-정몽준 단일화 열풍 속에 이 총재는 박 후보가 요구한 정치개혁방안을 전폭 수용하면서 보수진영에서 연합전선을 형성했다. 한나라당 안팎의 환영과 비판 속에 복당한 박 당선인은 "정치인은 한순간 발을 잘못 내디디면 나락으로 빠지는 것을 알게 됐다"는 말을 남겼다. 당시 대선자금 수사 과정에서 안대희 특별검사는 박 당선인이 이 총재로부터 받은 2억원을 문제 삼았다. 박 당선인은 "대선 지원 유세를 위한 당의 공식 지원 활동비"라고 해명했다.

▦차떼기, 탄핵 역풍 이겨낸 천막당사…선거의 여왕으로 등극

박 당선인이 보수 진영의 대표 지도자로 부상한 계기는 2004년 3월 '노무현 탄핵'이었다. 때마침 터진 대선자금 차떼기에 탄핵을 주도한 것까지 겹쳐 한나라당은 극심한 후폭풍을 맞았고 당의 존립이 흔들렸다. 박 당선인은 4월 총선을 코앞에 두고 당 대표로 선출되며 서울 여의도 노른자위에 있는 당사를 팔아 국가에 헌납하고 자신은 천막을 쳐서 생활했다. 108배, 고해성사, 눈물의 연설 등을 통해 바닥 민심을 얻는 데 성공한 그는 그물망 유세로 승기를 잡았다. 한나라당이 80~100석 정도 얻는 데 그치리라는 예상을 뒤엎고 그는 121명을 당선시키며 완승한 것이다. 그는 2006년 6월 대표에서 물러날 때까지 모든 선거를 승리했다. 특히 2006년 5ㆍ31 지방선거에서는 신촌 유세 도중 면도칼 테러를 당했으나 수술 후 병상에서 "대전은요?"라며 선거 상황부터 찾았다. 이 한마디가 알려지면서 한나라당은 대전은 물론 호남ㆍ제주를 뺀 모든 시도를 휩쓸었다.

탄력을 얻은 박 당선인은 정당 개혁에 속도를 낸다. 당 대표와 원내대표를 분리하며 국회 중심의 원내 정당화를 만들었고 대선주자는 대선 1년 6개월 전에 당 대표를 그만두는 규정도 받아들여 그 스스로 지켰다.

▦2007년 대선 패배 승복연설 후 5년간 보수 진영 1위 주자

박 당선인은 2007년 대선 경선에 출마해 서울시장을 막 마친 이명박 후보와 맞붙었다. 그러나 실용주의 노선과 경제 살리기를 앞세운 이 후보에게 민심에서 밀렸다. 박 당선인은 "저 박근혜 경선 결과에 깨끗이 승복합니다"라는 선언으로 경선 효과를 극대화했다.

그러나 이후 대선과 총선에서 승리한 한나라당 내에서 친이계와 친박계의 대립은 이어졌다. 이명박 대통령은 당선 직후 박 당선인에게 국무총리직을 제안했으나 박 당선인은 당에 남겠다며 거절했다. 이 대통령의 형 이상득 의원이 두 사람 중재에 나섰으나 이재오ㆍ이방호 등 공천을 좌우한 친이계의 의중에 따라 친박이 대거 탈락했다는 소문이 기정사실처럼 떠돌았다. 박 당선인은 마침내 "국민도 속고 나도 속았다"고 강력 비판했다. 이 과정에서 공천 탈락한 김무성 전 의원을 비롯한 친박 무소속 연대와 정당 '친박연대'가 25석이나 얻었다.

박 당선인과 이 대통령은 내내 불화하다 2010년 6월 세종시 수정안 국회 통과에서 정면 출동했다. 박 당선인은 정치 입문 이후 처음 국회 본회의에서 연설을 자청하며 반대했고 청와대가 추진하고 친이계가 이끈 세종시 수정안은 부결됐다. 보수 진영은 더 이상의 갈등을 용인할 수 없다는 분위기였고 30% 중반을 넘던 박 당선인의 지지율은 20%대로 떨어졌다. 박 당선인은 그해 8월 이 대통령과 청와대에서 만나 정권 재창출을 위해 노력하기로 극적으로 화해했다.

총선 공천 비리 파동이 일자 박 당선인은 다시 전면에 나서며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았다. 그는 빠른 속도로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고 정치와 정책 쇄신에 나섰다. 그는 19대 총선에서 또다시 예상을 깨고 151석의 과반을 달성하며 다시 한 번 선거의 여왕임을 입증했다. 그는 올해 8월20일 당내 대선후보 경선에서 83.9%를 득표하며 모두의 예상대로 새누리당 후보가 됐다.

 

 

"피묻은 肉親(육친)의 옷을 씻으면서
 
‘평생분의 눈물’을 흘렸던 사람이 청와대로 돌아온다."
 
일본 아사히신문(朝日新聞)의 名칼럼 ‘天聲人語’(천성인어): <幸(행)인지 不幸(불행)인지 우리 쪽에는 그만큼 울어본 정치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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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월21일자 일본 아사히신문(朝日新聞)의 名칼럼 ‘天聲人語’(천성인어)는 朴槿惠 대통령 당선자에 대한 글이었다.
  
  <먼저 어머니를 잃었다. 아버지 朴正熙(박정희)를 노린 총탄이었다. 유학중이던 프랑스에서 돌아와 퍼스트레이디 역을 맡은 때 스물두 살. 5년 뒤, 아버지도 측근에게 射殺(사살)된다. 한국의 첫 여성대통령 박근혜씨(60)는 悲憤(비분)으로 마음을 닦아가면서 강해졌다.
  
  야당 黨首(당수)이던 6년 전, 선거지원 유세 중 (범인이) 오른쪽 목을 11cm 그었다. 5밀리만 더 깊었다면 동맥이 잘려 卽死(즉사)하였을 것이라 한다. 부모를 테러로 잃고, 자신도 부상을 당한 지도자는 거칠고 뒤죽박죽인 개발도상국에서도 드문 예이다.
  
  “아직 나에게 할 일이 남아 있어 (하늘이) 목숨을 남겨주었다고 생각하니 더 잃을 것도 더 탐낼 것도 없다는 생각이 절로 솟구쳤다.”(자서전)
  
  아버지의 시대는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경제성장으로 재평가되고 있다. 딸은 선거중 軍政(군정)에 핍박받은 민주화 운동 관계자들에게 사과하였다. 한국판 ‘三丁目의 夕陽(석양)’(불우한 사람들이 많이 나오는 인기 만화)을 측은하게 여기는 老壯層(노장층)의 지지가 勝因(승인)이었다.
  
  피묻은 肉親(육친)의 옷을 씻으면서 ‘평생분의 눈물’을 흘렸던 사람이 청와대로 돌아온다. 소녀시절 15년을 보낸 대통령 관저, 슬픔의 그곳. 아버지가 암살되었다는 急報(급보)를 전하는 高官(고관)에게는 北의 침공이 아닌가라고 물었다고 한다. ‘나라와 결혼하여’ 獨身(독신)으로 살고 있는 그녀는 아무튼 뼈 속 깊이 애국자인 모양이다.
  
  아버지의 威光(위광)이 있었겠지만 남성중심 사회에서 뽑힌 여성이다. 경쟁 후보보다는 일본에 우호적이라 하지만 만만한 벗은 아닌 듯하다. 幸(행)인지 不幸(불행)인지 우리 쪽에는 그만큼 울어본 정치가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