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 그림, 다섯봉우리의 비밀
최종수정 2012.06.01 15:07기사입력 2012.06.01 14:47
근정전 등 5곳 정전 상징..조선 왕들의 치세·통치·예술적 취향 등 표현
[아시아경제 이상미 기자] 조선 궁궐의 그림에는 왕들의 치세, 통치, 예술적 취향은 물론 아이를 많이 낳고 싶은 왕비들의 소원까지 잘 드러난다. 조선의 궁궐에서 벽화를 만나보기란 쉽지 않다. 목조건축물인 궁궐 내부가 종이 창호로 둘러싸인 경우가 많고, 단조로운 흰 벽면을 선호하는 성향 때문이다. 이런 미적 감각과 구조적ㆍ재료적 특성상 영구적인 벽화는 흔치 않다.대신 조선 왕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궁궐 실내를 아름답게 장식했다.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는 부벽화(付壁畵)와 운반, 형태의 변형이 자유로운 병풍그림, 그리고 장지문 그림이 대표적이다.
왕의 존재와 권위를 상징했던 일월오봉도,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의 십장생도, 궁궐의 편전이나 왕세자가 거주하는 동궁에 설치해 학구적이고 교육적인 분위기를 조성했던 책가도, 왕실 여성의 공간에 다산을 상징하는 의미로 쓰였던 백자도 등이 궁궐 그림의 주제다. 이 그림에는 장수와 영원, 다남과 자손번창, 태평과 복락을 비는 다양한 상징세계가 펼쳐져 있다.
◆왕의 존재와 권위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그림 =일월오봉도(日月五峰圖)란 해와 달, 그리고 다섯 산봉우리를 그린 그림이란 뜻이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에서 항상 왕의 뒤편에 놓여있어 우리에게도 매우 익숙하다. 만원짜리 신권지폐의 세종대왕 뒤편에도 어김없이 일월오봉도가 그려져 있다.
근정전, 인정전, 명정전, 중화전, 숭정전 등 도성 내의 다섯 개 궁궐의 정전(正殿)에는 반드시 이 그림이 설치됐다. 왕이 공식적인 업무를 보던 공간 외에도 '왕'을 상징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함께했다. 심지어 왕이 죽을 때도 같이 묻힌다.
일월오봉도 구성 자체는 매우 단순하다. 좌우대칭의 해와 달, 다섯 봉우리의 산, 네 그루의 붉은 소나무와 바위, 폭포, 파도와 흰 포말이 전부다. 이 그림의 상징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지만 시경(詩經)의 천보(天保)라는 시의 내용을 그린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하늘이 당신을 보호하고 안정시키사 매우 굳건히 하셨네/높은 산과 같고 큰 땅덩이 같으며/강물이 흐르듯 달이 차오르듯 해가 떠오르듯 결코 무너지지 않으리/소나무의 무성함과 같이 당신의 후계에 끊임이 없으리" 이 시의 내용을 살펴보면 해와 달, 산과 소나무 등의 상징이 모두 들어가 있다.
일월오봉병. 6첩 병풍. 비단에 채색. 149.3*325.8센티미터.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
◆왕세자의 교육을 위해 설치된 책가도= 조선의 왕들도 자식 교육을 위해 학구적인 분위기를 만드는 데 애썼다. 책가도는 책과 여러 가지 장식물로 꾸민 정물화 병풍이다. 주로 궁궐의 편전이나 왕세자가 거처하는 동궁에 설치해 도서실과 같은 학구적이고 교육적인 분위기를 조성했다.
책가도는 18세기 후반 정조 시기에 활발하게 그려지기 시작했다. 정조는 어좌 뒤의 책가도를 진짜 책으로 혼동할지 모를 신하들에게 "그림일 뿐"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책이 서가에 가득 꽂혀 있는 모습이 실제를 방불케 했다는 뜻이다.
이종현, 이윤민, 이형록 3대에 걸쳐 책가도를 그려온 화원 집안의 전통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만큼 책가도는 많은 경험과 세심한 기법이 요구된다. 책가도는 일종의 눈속임그림으로 공간이 확대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 기법은 청나라의 회화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서양화법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책가도. 이형록. 8첩 병풍. 종이에 채색. 139.5*421센티미터.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
◆왕실여성의 공간에서 다산을 상징 = 백자도(百子圖)는 많은 어린이들이 천진스럽게 노는 장면을 그린 그림으로 '득남'이나 '다산'을 기원하는 뜻을 담고 있다. 주로 여성의 방이나 여성의 물건을 장식하는 데 두루 쓰였다.
왕비 후보가 별궁에서 궁중의 법도를 배우는 기간 동안 윗목에 항상 백자도 병풍을 쳐놓았다. 백자도를 가까이 두고 보면서 득남을 기원하라는 의도였다. 그림 속 아이들은 매화 따기, 연꽃 꺾기, 원님 행차 흉내 내기, 닭싸움, 잠자리 잡기 놀이를 하느라 바쁘다. 백자도는 평상시 어린이들이 놀고 장난치는 평범한 모습을 표현한 듯 하지만 여기에는 모두 소망과 행운의 의미가 담겨 있다.
4~5명의 아이가 나무에 오르는 장면은 과거급제를 상징한다. 원님행차를 흉내 내는 원놀이는 수레에 비교적 나이 어린 아이를 태우고 깃발과 징, 북을 앞세워 행렬하는 역할 놀이다. 이때 원님 행렬 옆에는 반드시 죽마를 탄 어린아이가 구경꾼으로 그려졌다. 말은 고관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말 위에 타는 것은 아이가 커서 머지않아 중요한 관리가 되기를 바라는 소망을 상징한다.
백자도. 6첩 병풍. 비단에 채색. 각 74.8*46.3센티미터.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
한편 최근 돌베게 출판사가 이런 내용을 담은 책 '조선 궁궐의 그림'을 통해 궁궐의 실내를 장식하고 의례 공간을 꾸몄던 궁중 장식화와 궁궐 사람들이 제작하고 향유했던 궁중 감상화를 집대성했다. 장중한 조형미와 섬세한 묘사가 응축된 조선 궁궐의 그림들을 통해 화려하고 장엄한 궁중문화를 살펴볼 수 있다. 궁궐 그림은 당대 최고의 화가들이 최상의 재료로 꾸민 작품들이어서 심미적으로도 뛰어날 뿐 아니라 미술사ㆍ건축사적 가치도 높다.
이상미 기자 ysm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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