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혁거세의 비밀
신라의 시조는 박혁거세로 알려져 있다.
신라는 원래 김씨왕조가 아니라 바로 박씨가 먼저 왕이 되는 시조였고, 나중에 석씨를 거쳤다.
왕조의 성씨가 바뀌는 데도 불구하고 나라명이 바뀌지 않는 것은 역사상 신라밖에 없는 것 같다. 더구나 다른 왕조들과도 완연하게 다른 여러 가지 특성이 있다.
성씨가 다른 왕이 되는 것 뿐 아니라 사위가 왕이 되고, 여자가 왕이 되고, 황후가 왕이 죽은후 다음왕이나 또 다른 왕족과 혼인하고 등등.
지금으로선 상상하기도 힘든 여러 가지 형태가 신라왕조에서 나타난다.
이것은 기존의 역사적 상식, 즉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역사철학으로 신라를 평가해서는 안된다는 것이고 이것은 곧 우리의 선조들을 평가분석하는 데 객관적 잣대가 따로 필요하다는 것이다..
신라의 시조를 흉노족으로 보고 한무제때 포로가 되었다가 고조선 정벌로 한사군에 들어오면서 중국관할에 있던 한사군에 진출했던 흉노족이 신라를 건국한 것이 중국 북서부에 있던 흉노족이 처음으로 한반도에 발을 내딛는 것이고, 2차적으로 왕망의 난으로 대거 한반도로 피난한 흉노족들이 가야를 건국하고 신라로 유입되었으며, 5호16국시대에 중국에서 세력을 완전 상실한 흉노족의 일부와 일본에서 밀려난 흉노족들이 신라로 유입되었음을 주장했다.
그럼, 가장 중요한 초기의 흉노족이 어떻게 신라를 건국하게 되는 지 자세히 살펴보자..
중국은 한무제때 고조선을 정벌하고 기원전 108년에 한사군을 설치한다.
그런데, 한사군중에서 임둔과 진번은 오래가지 못하고 곧바로 해체되어 낙랑과 현도로 편입되고 만다.
함경남도와 철령이북에 있던 임둔군과 황해도 일대에 있던 진번군은 동시에 기원전 82년에 해체되어 낙랑과 현도등에 편입하게 되는데 막강한 무력을 가졌던 한나라의 2개군이 30년을 넘지 못하고 해체된다는 것은 한사군 자체적으로 커다란 와해요인이 있었다는 것이다.
임둔군은 15현중 7현만 현도와 낙랑에 편입되고 나머지 8현은 사라진다. 진번군도 15현중 8현만 낙랑과 합쳐지고 나머지 7현이 사라진다..
기원전 82년에 임둔과 진번에서 사라진 현은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즉, 이때 한사군과 함께 도래한 흉노족들중에 중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고 한 세력들이 대거 한반도 남쪽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시작부분에 보면 신라건국년인 기원전 57년에 앞서 고조선의 유민이 남하해서 6개마을을 이루고 살다가 신라를 건국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중간부분에서 중국의 삼국지를 참고하여 같은 내용으로 삼국사기의 박혁거세 38년 기록에에서 ‘중국사람들이 진나라가 일으킨 난리로 말미암아 고통을 당하다가 동쪽으로 온 사람들이 많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후한서에는 약간 다른 뉘앙스의 기록이 있다. 후한서의 동이편에는 ‘진한의 노인들 스스로 말하기를 진나라가 망해서 도망해 온 사람으로 피난 가는 것이 고역이라고 말했다. 한국(韓國)의 마한 땅이 적당할 것 같아서 마한의 동쪽을 나누어 같이 살았으며 말은 진(秦)나라와 비슷하여 그런 이유로 나라 이름을 '진한(秦韓)'이라고 하였다
즉, 약간 다른 이 두기록에서 분명한 것은 진시황의 진나라와 신라의 건국세력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중국 서쪽 끝에 있는 중국 진나라사람들이 아시아 동쪽 끝에 한반도 남쪽에 나타나려면 중국대륙에서 강력한 정변과 더불어 이주계획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신라가 건국되기전에 중국 진나라땅에서의 강력한 정변은 결국 한나라의 진나라땅 오르도스의 흉노정벌밖에 없다. 이 흉노정벌은 중국 한나라가 국가의 모든 역량을 집중한 것이었고, 흉노 포로만 십수만에 달하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즉, 오르도스에서 포로가 된 흉노족들이 한사군 설치와 더불어 한반도에 도래해서 남하한 것이란 강력한 증거가 된다. 신라의 건국 30여년 전에 한사군의 4개군중 진번과 임둔등 2개에 내원한 흉노족들이 최소 수만단위의 인원들이 대거 남하 한 것이다.
기존에 진시황의 만리장성 축조로 한반도로 피신한 중국인이라고 한다면 중국 전국시대이전에 수도 없이 일상적으로 남하했을 것이란 것으로 역사적 특이성을 가질 수 없다.
또한, 결정적인 이유는 청동기문화의 고조선의 남하로 이루어졌다는 마한의 성립 때문이다..
원래 고조선이 망한 것은 기원전 190년경에 연나라에서 도래한 위만조선이 성립한 것으로 인한 것인데, 이때 남하한 사람들이 마한을 이룬 주축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진시황이 죽은게 기원전 200년이고 만리장성의 축성의 그보다 20여전부터인데, 진나라에서 만리장성축성 때문에 중국인이 한반도에 왔다는 것은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다.
더구나, 우리말은 중국말과 구조자체가 완전히 다르다. 신라가 중국본토세력이 와서 성립한 나라라면 동사가 맨 뒤에 나오는 언어를 가질 수가 없었을 것이다.
즉, 삼국사기와 중국의 삼국지, 후한서는 마한이 성립해서 안정되었을 기원전 150년 이후로 추정되므로 기원전 108년에서 기원전 82년까지인 한사군 흉노족의 남하시기와 일치하고, 삼국유사에서 신라의 기원으로 한 고조선유민이라고 한 것도 나중에 중국에서 온세력이란 것과 서로 일치하려면 고조선지역에서 중국에서 온 세력들이 내려와서 신라에 자리잡아서 신라건국기인 기원전 57년경부터 번성했다고 하는 게 맞는 해석으로 대규모의 흉노족 남하와 일치하게 된다..
이렇게 중국 북서부에서 잡혀와서 한사군에 편입되었다가 가장 오지지역으로 배치된 흉노세력들부터 이탈하여 남쪽으로 이동하였다는 것이다.
가장 오지지역이니 중국에 가장 반발이 심한 흉노족들이었을 것이므로 이들이 이탈하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인 것이다.
또한, 삼국사기에서 신라건국기 초기에 낙랑과의 분쟁이 심함을 알 수 있다. 즉, 한사군에서 이탈한 흉노족들은 마한과 동맹해서 한사군에 대항했고, 한사군측에서는 도망친 흉노족을 벌하기 위해서 계속 신라를 공격한 것으로 보여진다.
이렇게 중국으로부터 독자적인 세력으로 자리한 신라흉노들은 기원전 57년 흉노분열기에 독립하게 되는데, 이때 지도자가 바로 박혁거세로 보여진다.
박혁거세(朴赫居世)가 흉노족이란 증거가 너무나 많다.
이것은 박혁거세를 자세히 분석해 보면 신라의 시조가 고조선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는 것을 알수가 있다.
알에서 태어났다는 난생설화도 고조선의 곰등 동물의 토템신앙과는 거리가 멀다.
박혁거세의 부인도 알영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흉노 왕들의 알지와 같은 뜻으로 보여진다.
또한, 박혁거세는 서라벌을 금성이라고 칭해서 너무나 명백한 흉노족 도시임을 나타내고 있다..
박혁거세는 기존학설로는 성이 박씨이고 이름이 혁거세인데, 박씨는 박같이 큰 알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박씨라 하고 세상을 밝힌다고 혁거세라고 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것은 유아적인 잘못된 해석이다.
일단 성씨는 박씨를 설명하기 앞서 이름부터 분석해 보자.
혁거세(赫居世)의 ‘혁(赫)’은 중국에서 5호16국중 하나인 대하를 건국한 흉노족인 혁련발발(赫連勃勃)의 흉노족 성씨인 혁련(赫連)씨과 유사하다.
‘거(居)’는 중국에서 마찬가지로 5호16국중 북량(北涼)을 건국한 감숙성 양주의 흉노족 ‘저거씨’의 ‘거’자가 있다.
혁련씨는 흉노 왕족에서 발원한 성씨로 유명한 흉노 성씨인데, 혁련의 련은 호련씨, 연제씨등 연과 연관이 있고 혁에서 또한 독특한 흉노족 특성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거는 저거씨에등에서 보듯 흉노의 관직에 붙는 것이다.
흉노에는 골도후라고 하는 선우를 보좌하는 최고위 관직이 있는데, 이것은 주로 선우의 외척과 관련된 씨족들의 직위가 있었고,, 이때 골도후들의 관직이 좌대차거, 우대차거등 거라는 관직이 붙었다.
즉, 혁거란 흉노의 골도후중에서 혁과 관련된 씨족출신장이란 것이다.
이것은 신라에 선우씨족인 연제씨가 없었고, 선우씨족 다음의 세력을 펼쳤던 선우의 외척인 골도후 씨족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골도후들간의 신분을 나타내기 위해 나중에 골품제도등으로 발전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혁거는 박혁거세 자신의 유래를 표현한 시조성씨와 같은 것으로 보여지고 세가 이름일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본인의 개인적이며 아마추어적 해석이고 자료를 찾아보니 박혁거세라는 이름으로 흉노족과 연관된 전문가적인 또 다른 정확한 해석이 있었다.
흉노의 신앙 체계는 천신사상이 강하게 나타나는데, 통치자 선우(單于)는 천신(天神)의 아들로서 하늘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는 제사장으로 표현되고 있다. 여기서 통치자가 신의 아들로 표현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중국 주(周)나라 때부터 등장하는 천신의 대리자로서의 천자(天子)의 개념은 주왕조 설립자와 초기 왕조가 북방 유목민족 출신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북방 알타이민족의 개념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라 왕조의 설립자라고 알려진 혁거세(赫居世)의 이름은 赫 K k “하늘”과 居世 kishi 두 단어가 합성된 것으로써 돌궐어(突厥語) 하늘의 아들 즉, 천자(天子)를 뜻한다. 신라어에는 이것 외에도 북방 유목민족들이 사용하던 관직명이 다수 나타난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간(干)과 각간(角干)이 있는데, 干은 돌궐어 Khan으로써 통치자를 뜻하며, 각간(角干)은 돌궐어 Kagan(< Ka + Kan) 으로써 통치자의 왕, 즉 최고의 통치자를 뜻한다.
돌궐어가 신라어에 접목될 수 있는 이유는 돌궐의 선조가 흉노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듯 돌궐은 지금의 터키의 선조들이다. 터키역사를 보면 자신들의 선조를 스키타이->흉노->돌궐->터키로 연결되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럼으로 돌궐어는 신라의 초기언어와 거의 같았다고 볼수 있으며 지금도 터키어는 우리 한국어와 같이 알타이어로 같은 언어군에 속한다..
어쨌든, 신라의 시조가 흉노족이라는 측면에서 연구한 전문가적 의견에 따르면 즉, 혁거세는 하늘의 아들 즉 천자(天子)란 뜻이고 신라의 관직의 각간 등은 천자 아래의 제후들이란 것이 된다. 어쨌든 신라는 비록 도시국가적 성격이 강했지만 초기부터 흉노족의 후예로 자존심이 강해서 자신들을 천자로 표현했으며 칸 제후를 둔 국가였던 것이다.
그럼, 마지막으로 박혁거세에서 박(朴)씨란 성은 도대체 무엇일가?
알이 박같이 컸다고 왕의 성씨를 음만 따라서 朴씨라고 하다니 한자의 뜻을 모르는 것도 아닌 사람들이 이게 이해가 되나?
어쨌든, 박씨라고 한 것은 박혁거세 시대에 붙였는지, 아니면 나중에 혁거세란 이름에 성씨를 붙였는지 알수는 없지만, 중국에 박씨가 거의 없기 때문에 박씨라고 한 성의 의미에 합당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결국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소박상무(素朴尙武)라고 하는 한자어이다.
북방유목민의 장점이 바로 소박한 삶속에서 무를 숭상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북방유목민들이 중국화 하는 이유가 바로 소박상무 정신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분석되고 있다.
신라의 흉노족 중에서 김일제 일족은 金씨란 성을 한무제에게서 하사받았다.
기원전 57년 신라의 건국세력은 김일제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고 같이 포로가 된 처지였을 것이므로 깊은 관련이 있었지만, 산동성에서 투후국의 제후였던 김일제일족자체는 아니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중국에서 큰 세력을 가진 이들에게 심리적 반감이 있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고향땅에서 중국 한나라에 포로가 되어 가장 멀리 떨어진곳의 한반도의 고조선 정벌전에 참여하고 또한 가장 오지로 내몰렸다가 간신히 중국세력으로부터 벗어난 흉노족들이 무엇을 생각했겠는가?
고향평원을 잃어서 다시는 고향땅의 푸른 목초지와 조상의 영이 깃든 성스런 기련, 언지산으로 돌아갈 수가 없고 이젠 목축업보다 농업에 더 의지하여 농업을 천하게 여기던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해가는 안타까움에서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그들은 흉노족 선우에게 중국의 공물에 흉노족이 중독되면 안되고 검약한 생활을 유지해야 흉노가 번성할 수 있음을 일깨웠던 중향장의 충고를 새겼을 것이란 것은 당연한 것이다.
즉, 신라흉노들은 흉노의 장점이었던 소박상무의 정신을 되살려서 자신들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기리는 마음으로 박(朴)씨 성을 딴 것이다.
또한, 한무제가 흉노족 김일제에서 김이라는 황금성을 하사함으로써 흉노족을 사치한 민족으로 표현한 것에 대한 반발이기도 하다. 이렇게 신라의 건국세력들은 비록 중국에 포로가 되어서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신라를 건국하면서 흉노의 영광을 한반도에서 재현하기를 열망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한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시조의 소박하다는 뜻의 朴씨 성에서 보듯 신라에서 내물왕이후에 김씨왕조가 성립되어 금으로 치장하기까지 흉노본연의 검소한 생활을 실천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한반도에 도래한 흉노제국 신라건국의 뜻깊은 속사정이기도 하다..
그리고 박씨성이 박씨성인가? 이것도 한번분석해 보면 재미있을 듯 싶다 왜냐하면 통일신라말기에 박씨성 왕이라고 하던 신덕왕, 경명왕, 경애왕이 사실은 박씨성이 아니라 김씨란게 최근의 연구로 밝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지금 천추태후를 보면 왕건의 손녀인 천추태후가 왕씨가 아닌 황보씨로 나온다. 즉, 통일신라시기에 중국의 눈치 때문에 같은 성씨끼리 근친하기 뭐해서 왕족들끼리 결혼할 때 성씨를 바꿨다. 그래서, 김씨가 박씨가 되었던 것이다. 천추태후가 왕씨면서 황보씨라고 하듯, 그러므로, 신라역사 전체에서 초기의 박혁거세와 그 몇몇 후손들외에 박씨란 김씨의 허상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신라라는 나라이름, 신라의 역사를 기록한 것도 모두 다 신라에 김씨왕조가 성립하고 난 이후의 일이다. 박혁거세라고 명명한 것도 알고 보면 김씨들이 한것이다.
즉, 신라의 역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김씨들이 기록한 것이다.. 그러니, 그 정확한 속사정을 누가 알겠나? 기록이 넘치고 넘치는 200년전 정조대왕도 분석을 제대로 못해서 전국민이 헛다리를 집어서 허망한데 하물며 기록이 거의 전무하다시피 한 2,000년전 이야기는 더 어렵고도 난해한 것이다.
'◇.역사·고서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 최초 글로벌 여성 CEO 강빈 (0) | 2015.12.20 |
---|---|
미국인 화가 "휴버트 보스"가 그린 / 1900년대 전후의 우리나라의 모습 (0) | 2015.12.19 |
조선시대 오원(吾園) 장승업 등 4인방의 그림세계 (0) | 2015.12.09 |
궁궐 그림, 다섯봉우리의 비밀 (0) | 2015.12.07 |
朝鮮王陵의 10가지 秘密 (0) | 2015.12.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