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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맛집엔 '부록'이 없다

산야초 2015. 12. 20. 11:56

[Why] 진정한 맛집엔 '부록'이 없다

  • 정동현 대중식당애호가

입력 : 2015.12.19 03:00

[정동현의 허름해서 오히려] 광장시장 건너편 '장수보쌈'

보쌈에는 '부록'이 많다. 그저 삶은 돼지고기가 먹고 싶을 뿐인데 부침개며 막국수 같은 것이 딸려 온다. 오호라, 공짜인가 싶어 가격을 보면 또 그렇지도 않다. 그럼 맛은 있을까? 부록치고 괜찮은 것은 잡지 부록밖에 없다. 음식에 딸려 나오는 부록은 십중팔구 입맛을 버린다. 전은 눅눅하고 막국수 면은 검고 질기다. "에라이, 이제 보쌈 안 먹어!" 하고 선언하기를 몇 번, 그래도 늦은 밤이면 생각나는 것은 그놈의 삶은 돼지고기다. 기름진데 담백한 그 모순의 맛, 야들야들한 돼지고기를 잘 익은 김치에 싸서 먹을 생각을 하면 침이 고인다. 그 반작용은 한반도 거주민의 숙명이다.

숙명을 이기지 못한 나약한 의지의 한반도인은 영혼 없는 서울의 겨울바람에서도 돼지고기 냄새를 맡는다. 그 냄새를 좇아 한국에서 제일 오래된 지하철 노선을 타고 종로5가에 내리면 광장시장이다. 사람들은 세계사에 유례없는 지상 먹거리 복합 단지에서 길을 잃고 기억도 잃는다. 술을 마시고 고기를 씹고, 울고 웃고 싸우고 난장을 피워야 할 것만 같은 이 주지육림의 유혹도 오늘만은 안녕이다. 부디 기름에 지진 빈대떡도, 채소와 당면을 욱여넣은 돼지 창자도, 연육제를 쓰지 않은 선홍빛 육회도,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 같은 결기로 지나치시길 바란다. 가야 할 곳은 보쌈을 향한 숙명의 시작이자 종착지, '장수보쌈'이다.

군더더기 없이 단순한 맛이 일품인 ‘장수보쌈’의 보쌈 상차림.
군더더기 없이 단순한 맛이 일품인 ‘장수보쌈’의 보쌈 상차림. / 정동현 제공

 

 

광장시장 건너편, 도로변에 늘어선 광운상사나 서울사 같은 장갑 가게와 스티로폼 가게를 지나면 바로 나오는 이곳, 그러나 주의해야 한다. 간판이 작고 가게도 작아 엇 하는 사이에 지나치고 만다. '원식당'이라고 간판이 서 있으면 바로 그곳이다. 그럼 왜 원식당이고 또 장수보쌈일까? 이곳 주인장이 '원할머니 보쌈'이 체인점이 되기 전 창립 멤버였으며(그래서 원식당이며) 오래오래 장사하자고 하여 또 장수보쌈이라고 한다. 그게 1975년이다. 자, 옛날이야기는 여기까지. 고기 먹어야 해서 바쁘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테이블이 달랑 몇 개, 문 맞은편 저 끝에 사람 하나 설 곳이 있는데 바로 그곳이 주인 할머니 자리다. 낮에는 찌개류도 판다지만 저녁에는 국물도 없다. 주문도 하기 전에 자리에 앉기도 전에 파마머리 할머니는 김치를 썰기 시작한다. 선연(鮮姸)하기도 하여라, 동백꽃 대가리가 툭툭 떨어지듯 뻘건 김치가 숭덩숭덩 잘려 나가는 광경에 넋을 놓고 있으면 상에 반찬이 깔린다. 흔히 보던 부침개 따위는 없다. 맑은 콩나물국, 마늘, 고추, 새우젓, 고추장이 전부다. 곧이어 김치와 돼지고기 한 접시가 도착한다. 2인분에 1만7000원인 보쌈에 딸려나온 김치의 생김새가 만만치 않다. 김치에도 장르가 있다면 이것은 배신과 반전, 총격전과 뇌쇄(惱殺)적 여인이 등장하는 누아르다. 돼지고기 맛도 이 문제적 김치에 비할 만하다. 삶은 지 오래된 돼지고기는 군내가 나는데 이 집 것은 전혀 그렇지 않다. 비계와 살코기 비율은 3:7로 지나치게 기름지거나 퍽퍽하지 않다. 맛있다는 뜻이 다. 손님들은 그래서 쉽게 취한다. 주인 할머니는 단골들을 "김 사장" "이 사장"이라고 부르는데 아마 그들은 사장이 아니었던 시절부터 이 집에 드나들었을 것이다.

오래되었다고 무조건 좋을 수는 없다. 하지만 오랫동안 살아남은 것은 이유가 있다. 부록 없는 장수보쌈이 장수한 이유는 군더더기 없는 제대로 된 맛. 이 단순한 이유가 때로는 정말 어려운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