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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대맛 라이벌] (23) 닭볶음탕

산야초 2016. 1. 5. 23:40

[맛대맛 라이벌] (23) 닭볶음탕

강북 vs 강남

닭볶음탕. 한국인이 좋아하는 닭고기와 감자·당근·양파 등을 매운 양념에 자박하게 끓여먹는 음식이죠. 이번에 소개할 집은 각각 강북과 강남의 대표 닭볶음탕 집입니다. 한 곳은 주변의 닭볶음탕 가게가 다 없어진 뒤에도 홀로 남아 50여 년간 종로에서 꿋꿋이 자리를 지키고 있고, 강남에 있는 집은 예약을 받지 않아 줄서서 먹는 가게로 유명합니다.


1·2위 어떻게 선정했나

江南通新은 레스토랑 가이드북 『다이어리알』 이윤화 대표, 그랜드인터컨티넨탈호텔 배한철 총주방장, 롯데호텔서울 무궁화 천덕상 주방장, 강지영 음식평론가, 맛집 파워블로거(비밀이야) 배동렬씨의 추천을 받아 5개 식당을 후보로 추렸습니다. 이후 후보 식당 5곳을 7월 23일자 江南通新에 공지한 후 일주일 동안 독자투표를 진행했습니다. 그 결과 계림과 목포집이 각각 1,2위로 뽑혔습니다.

라이벌 (24) ‘떡집’ 결과는 9월 3일 발표합니다.

현재 진행 중인 ‘비빔밥’ 투표 방법은 19면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늘폭탄’ 덕에 닭볶음탕 골목서 혼자 살아남았네요

종로3가 왕복 8차선 도로변에서 세운전자상가 옆길로 들어서면 좁은 골목길이 미로처럼 펼쳐진다. 두 사람이 겨우 지나갈 정도의 좁은 골목 양옆으론 오래된 밥집과 여관 등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50여 년 동안 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닭볶음탕집 계림은 종로에서 옛 정취가 남아있는 몇 안되는 식당 중 하나다. 허름한 외관, 20년 넘은 테이블과 의자,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양은냄비, 배불뚝이 브라운관 TV 등이 찾아오는 손님을 정겹게 반긴다. 청계천 복원 이후 젊은 사람도 많이 찾지만 아무래도 이곳은 나이 지긋한 70~80대 단골들에게 더욱 특별하다.

 
길진영 사장은 양념이 닭에 잘 배도록 손님상에 내기 전에 닭볶음탕을 미리 한번 끓인다. 이 집 닭볶음탕은 어른 주먹 크기 만큼 쌓인 곱게 간 마늘이 특징이다.
 
 “동대문 닭한마리 골목처럼 여기도 1980년대까진 닭볶음탕 골목으로 불렸대요. 그런데 웬일인지 하나둘 문을 닫고 없어져 지금은 여기 하나밖에 안 남았어요. 이 집을 인수한 지 올해로 23년째인데, 일흔 넘은 단골들이 그런 말을 많이 해요. 젊은 시절 싸고 푸짐하게 먹을 수 있는 닭볶음탕 먹으러 이 골목에 자주 왔는데 다 없어져 서운하다고. 그나마 우리 집이라도 남아서 고맙다고 말이죠. 그런데 사실 처음 이 가게를 인수했을 때는 하도 장사가 안돼서 많이 힘들었어요.”

 종로3가 닭볶음탕으로 이제 알 만한 사람은 다 알 만큼 유명해졌지만 길진영(63·여) 사장 부부가 계림을 92년 인수하고 처음 3개월은 고난의 세월이었다.

 길 사장은 지금 가게에서 그리 멀지 않은 서울극장 근처에서 고기 뷔페 식당을 3년 정도 운영했다. 장사는 그럭저럭 괜찮았는데 갑자기 건물주가 바뀌는 바람에 권리금은 못 받고 보증금 몇천만원만 받고 하루 아침에 쫓겨났다. 한마디로 망한 거나 마찬가지라 수중에 별로 돈이 없었다.

“주인이 바뀐지도 몰랐는데 어느날 갑자기 나가라고 하더라고요. 막막했죠. 뭐 먹고 살아야 하나 해서. 그러다 남편 계모임 멤버이던 이 식당 전 주인이 식당을 내놨다는 얘기를 듣게 됐어요. 문제는 그 양반이랑 건물주랑 사이가 안 좋았는지 건물주가 가게세를 왕창 올렸더라고요. 할 수 있나요. 은행빚도 지고 아는 사람한테 돈도 좀 빌려서 인수를 했죠. 그런데 막상 장사를 시작하고 보니 손님이 너무 없는 거예요. 몇 개월 동안 마이너스 통장으로 살았죠.”

 
2 오래된 테이블과 의자만 봐도 이 집 역사가 훤히 보인다.3 좁은 골목길에 있는 계림.4 매일 국산 마늘 10kg를 간다.
 더는 물러날 데가 없다는 생각에 길 사장은 전 사장의 닭볶음탕 조리법 대신 자기만의 색깔을 조금씩 입혔다. 마늘 양을 더 늘리고 닭고기 찍어 먹는 간장소스도 새로 만들었다. 닭에 양념이 잘 배도록 손님상에 나가기 전 미리 한번 더 끓였다. 손님이 서서히 늘었다. 따라서 형편도 나아졌지만 수시로 고비가 찾아왔다.

 “조금 나아질 만 하니까 97년 외환위기가 오고, 그거 겪어내니까 조류독감(2003년)이다 뭐다 해서 손님이 딱 끊기고. 힘든 순간을 꼽으라고 하면 정말 수도 없이 많아요.”

 하지만 그때마다 길 사장은 포기하는 대신 위기를 뚫을 방법을 찾았다. 원래 메뉴가 닭볶음탕 딱 하나였지만 지금처럼 다양한 점심메뉴를 새로 추가한 것도 조류독감으로 손님이 확 줄었던 위기 때였다.

 “언제인지 정확히는 기억 안나요. 조류독감이 워낙 심할 때라 거의 날마다 가게에서 놀기만 하다가 집에 돌아갈 정도로 손님이 없었어요. 이렇게는 안 되겠다 싶어서 점심 때만이라도 팔 수 있는 메뉴를 고민했죠. 반찬 몇 가지를 뷔페식으로 먹는 것도 시도해보고, 매운탕도 하고, 이것저것 만들어봤는데 신통한 게 없었어요. 그러다 내놓은 알탕·대구탕·부대찌개는 그럭저럭 잘 되더라고요. 그래서 지금의 점심메뉴가 나온 거죠. 이제는 없애고 싶어도 그거 찾는 손님도 꽤 많아서 못 없애요.”

 하지만 역시 계림에서 손님이 가장 많이 찾는 건 닭볶음탕이다. 단골도 많지만 처음 온 손님도 단 한번만에 강렬한 인상을 받는다. 10명이면 10명 다 놀란다. 간 마늘이 성인 주먹 크기만큼 떡하니 올라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늘폭탄 닭볶음탕’이라는 별명도 생겼다.

 “인수하기 전부터 원래 마늘이 좀 많았어요. 전 그것보다 더 많이 넣은 거죠. 매울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끓으면서 담백하고 시원한 맛을 내요. 왜 고기 먹을 때 마늘 구워보면 알싸한 매운맛이 사라지잖아요.”

 이렇게 마늘을 많이 넣으려면 매일 하루에 10kg씩 갈아야 한다. 미리 갈아 놓지 못한다. 맛이 떨어져서다.

 길 사장은 “마늘은 갈아 놓고 오래 두면 노린내가 난다”며 “매일 그날 쓸 만큼만 직접 갈아서 쓴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도 식당 운영하기가 쉽지 않지만 지금 고생은 고생도 아니라고 한다.

 “내 나이 사람들이 다 그렇겠지만 나도 정말 고생 많이 했어요. 23살에 결혼했는데, 그 뒤로 별의별 장사를 다 해봤다니까요. 달걀도매상, 구멍가게, 밥집, 쌀장사, 토끼농장, 아이고~, 따져보니 진짜 안 해본 장사가 없네요. 아, 결혼하고 바로 얼음장사도 했어요. 당시엔 집집마다 냉장고가 있는 게 아니라서 얼음을 다 사서 먹었거든요. 손님이 얼음 사러오면 톱으로 직접 잘라서 팔고 그랬죠.”

 
마늘은 끓으면서 매운 맛이 사라진다. 대신 국물을 담백하고 시원하게 만든다
 길 사장은 요즘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웃음이 배시시 새나온다. 아들 이성민(34)씨 생각 때문이다. 댄스 스포츠를 전공해 지도자 생활까지 했는데, 5년 전쯤 가업을 이어받겠다고 나섰다.

 이씨는 그전까지 요리는 전혀 모르고 살았기 때문에 한식과 중식 조리사 자격증부터 땄다. 그리곤 3년을 가게에서 일하며 현장을 배웠다. 배우기만 한 게 아니다. 젊은 사람 특유의 재기발랄함으로 장사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닭=국내산, 쌀=국내산’ 등 식재료 원산지를 적어놓는 판에 ‘사장=국내산’이라고 적어놓는다거나, ‘지나친 음주를 하는 당신, 성공하실 겁니다’라는 문구를 적어 손님을 웃게 만들기도 했다.

 “다른 식당에서도 흔히 보는 말들이잖아요. 특별하진 않지만 짧은 순간이나마 손님이 웃을 수 있다면 좋을 거 같아서 그렇게 바꿔 봤어요. 2년 전에 충무로에 계림 2호점을 내고 제가 운영하고 있거든요. 금연표시를 손님 기분 상하지 않게 하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99세 이하는 금연’이라고 적어놨어요. 한 손님이 “100살 넘으면 다시 와서 꼭 담배 피우겠다”고 웃으면서 말하더라고요. 그 손님이 100세 넘을 때까지 닭볶음탕 잘 만들어야죠.”

군산댁이 목포집 간판 건 사연? 그놈의 정 때문에

“우리 가게 이름이 목포집이라 주인 고향이 목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난 군산 출신이에요. 처음 장사할 때 매일 아침 가게를 찾던 한 단골손님 고향이 목포였어요.”

 첫인상을 좌우하고 정체성을 나타나는 가게 이름을 주인과 상관없이 손님 고향으로 짓다니. 신사동 목포집엔 대체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이용분(65) 사장은 그저 무덤덤하게 “부탁 때문에 지었죠”라고 말한다.

주인은 특별한 비법이 없다는데 늘 줄서야 먹을 수 있는 목포집 닭볶음탕. 국물색깔이 진해서매울 것 같지만 적당히 칼칼하다.

 이 사장은 1994년 신사동에서 작은 백반집을 했다. 테이블 5개 밖에 없는 아주 작은 식당이었다. 가게 이름도 없이 시작한 터라 간판을 따로 달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장사하던 사람이 놓고 간 ‘실내포장마차’라는 간판을 계속 걸었을 뿐이다.

 “식당 바로 앞에 변호사 사무실이 있었거든요. 거기 사무장 하던 아저씨가 매일 아침 우리 집에서 생김치에 밥을 먹었어요. 거의 4~5년을 매일 그랬을 거예요. 아무튼 그 손님 고향이 목포인데, 자기가 맛있게 먹는 밥집 이름이 기왕이면 자기 고향 이름이면 좋겠다면서 가게 이름을 목포집으로 하면 안 되겠느냐고 하더라고요. 그 말 듣고 그냥 그렇게 지었어요.”

 선뜻 이해할 수 없는 얘기다. 하지만 사람과의 정(情)을 중요시하는 이 사장 성격을 알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는 자기 식당을 열기 전 ‘그놈의’ 의리와 정 때문에 한 식당에서 7년 넘게 일했다고 한다. 군산에서 살던 이 사장 부부는 당시 초등학생이던 두 아들 교육을 위해 86년 서울로 이사하기로 결심했다. 그러고는 친언니 부부가 목공소 하던 바로 이곳 신사동으로 무작정 왔다. 그때 이 사장 형부가 식당 일자리를 소개해줬다.

 
1 이용분 사장은 단골손님의 부탁을 받고 가게 이름을 목포집이라고 지었다.2 식당 내부3 육질 좋은 1kg 크기 닭만 사용한다.
 “보신탕집이었어요. 월급 17만원 받고 일했어요. 연중무휴도 모자라 24시간 운영하던 집이라 매일 아침 9시부터 다음날 새벽 2시까지 일해야 했죠. 일하는 거에 비해 월급이 적었구요. 그런데도 7년 반이나 일했네요.”

 당시 이 사장은 한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식당 출근 전 집에서 1시간 더 일찍 나와 건물청소 일까지 했다. 두 일을 다 해내느라 하루 3시간씩밖에 못 잤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식당 경력이 좀 쌓일 즈음 돈 더 주는 곳으로 옮기는 게 맞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남편이 된장·고추장 등을 조금씩 떼다 파는 장사를 했거든요. 막상 해보니 자본없는 사람에게는 그저 ‘한강에 돌 던지기’더라고요. 손님은 맨날 외상 하지, 돈은 없는데 팔 물건은 계속 사와야 하지. 외상도 모자라 물건값 떼먹는 사람도 있지. 결국 손해만 보고 몇 개월 만에 접었어요. 그래서 돈을 더 벌어야 했던 상황이거든요. 그런데 아무리 월급이 적어도 형부가 처음 소개해 준 곳이기도 하고 주인이 같은 전라도 사람이라 의리 반, 정 반으로 그냥 있었어요.”

 그런데 그가 일하던 보신탕집이 문을 닫게 됐고, 이 사장은 7년 동안 배운 실력으로 보신탕집을 열 작정이었다. 94년 처음 일하던 보신탕집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자리도 잡았다. 하지만 건물주가 “보신탕만은 안된다”며 반대하는 통에 하는 수없이 백반집을 차린 거다. 순두부·된장·김치찌개 등 15여 가지를 팔았다. 식당은 비좁았지만 음식솜씨가 소문 나 하루 매출 40만원이 넘을 정도로 장사가 잘 됐다.

 “특별한 요리도 없는 밥집이었는데 사람들이 줄 서서 먹고 가고 그랬다니까요. 그런데 메뉴가 많으니까 조리하기가 너무 힘든 거예요. 그래서 어째요. 꾀를 내서 같이 섞어서 줘도 되냐고 물어보곤 했죠. 예를 들어 제육볶음이랑 오징어 볶음을 시키면 제육이랑 오징어를 같이 볶아서 주는 식으로요. 그럼 또 그것도 맛있다고 잘 먹고들 가고 그랬어요.”

 그렇게 4년을 장사하며 자리를 잡아갔지만 곧 다른 곳으로 또 옮겨야 했다. 매년 껑충 뛰는 가게 임대료 때문이었다. 그는 그렇게 20년 장사하는 동안 신사동에서만 6번을 옮겨 다녔다.

 “여긴(신사동) 장사 잘 안 되는 집은 진짜 힘들어요. 가로수길 같은 데도 여러 가게가 금방 생겼다가 없어지곤 하잖아요. 장사 시작할 때 내가 얼마나 팔아야 유지가 되는지 정확히 파악해야 해요. 그걸 못하면 버틸 수 없어요. 특히 인테리어에 무리하게 투자했다간 큰일나죠.”

 다행히 이 사장은 늘 장사가 잘되는 편이라 그렇게 가게를 옮기면서도 사정이 나쁘지 않았다. 가게를 옮길 때마다 따라오는 단골도 꾸준했고, 세를 낮춰준 건물주도 있었다.

 “4번째쯤 옮길 때였나, 어떤 건물주가 나보고 임대료 낮춰줄 테니 들어와 달라기에 이사갔죠. 원래 그 자리가 고깃집이었는데 장사가 안되다가 내가 들어가고 나서 건물이 살아났죠.”

 이렇게 계속 가게를 옮기면서도 메뉴는 계속 유지했다. 처음엔 괜찮았지만 점점 힘이 부치기 시작했다. 그러다 재작년, 그러니까 2012년에 메뉴 중 가장 잘 팔리는 닭볶음탕과 대구탕 등 6가지를 주메뉴로 남기고 싹 없앴다. 그 중에서 닭볶음탕이 가장 인기다. 대체 무슨 비결이 있는 걸까.

 하지만 대부분의 ‘엄마손 맛집’이 그렇듯 이집도 특별한 비법은 없다고 손사래 친다.

 “별다른 비법은 없어요. 그냥 정성껏 만들 뿐이지. 다만 닭은 무게가 1kg 정도 되는 닭만 써요. 이것보다 더 작으면 너무 살이 없고 더 크면 고기가 질겨서 맛이 없죠.”

 반찬 역시 특별한 게 없지만 늘 5가지를 낸다는 원칙 아래 매일 다른 찬을 낸다. 같은 부침 종류라도 오늘 전이 나갔으면 다음 날은 두부, 그 다음 날은 달걀부침을 내는 식이다. 정작 손님은 별 차이를 못 느낄 수도 있지만 하루도 같은 반찬을 내지 않고 매일 새롭게 만든다는 게 이 사장의 고집이다.

 최근엔 원칙이 하나 더 생겼다. 이전에는 오후 7시 이후 예약은 받았지만 3개월 전부터 아예 예약을 받지 않는다. 가게 규모가 작다 보니 예약을 받으면 그냥 찾아오는 손님이 너무 오래 기다리거나 돌아가야 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하기에 내린 결정이다.

 그런데 고객을 배려한다고 시작한 바로 이런 일 때문에 오히려 불친절한 집이라는 오해를 받기도 한다. 20대 초반부터 어머니를 돕고 있는 작은 아들 구인무(39)씨는 인터넷에서 이런 글을 발견할 때마다 속상하다고 말한다.

 “손님이 워낙 많다 보니 원하는 걸 제때 못 갖다 드리는 경우가 있어요. 오래 기다려야 할 때도 있구요. 게다가 예약도 안 된다고 하니까 불친절하다느니, 돈 많이 벌어서 배가 불렀다느니, 이런 글을 인터넷에 올리는 사람이 많더라구요. 처음엔 정말 속이 많이 상했는데 지금은 그냥 마음을 편히 가지려고 노력해요. 묵묵히 정성을 다하면 마음이 전달될테니까요.”

글=심영주 기자 yjshim@joongang.co.kr 사진=김경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