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군의 명당터 쟁탈의 결말, 오페르트 도굴사건
입력 : 2015.12.27 10:16 | 수정 : 2015.12.27 11:32
[문갑식 기자의 기인이사(奇人異士)(36):사도와 남연군과 흥선군과 육관도사의 천하명당(中)]
흥선군이 거액을 주지에게 뇌물로 준 뒤 스님들을 몰아내고 절에 불을 질렀다는 설과 충청감사에게 중국에서 최고로 치는 단계벼루를 뇌물로 준 뒤 스님들을 쫓아냈다는 설 등입니다. 절을 폐하고 탑을 헐기 전날, 흥선군 형제는 같은 꿈을 꿨다고 합니다. 꿈에 수염이 백설처럼 흰 노인이 나타나 외쳤습니다. “나는 탑신(塔神)이다. 너희들은 어찌 나의 자리를 빼앗으려 하느냐? 일을 벌인다면 네 형제가 모조리 폭사하고 말리라!” 놀란 형제들이 서로 꿈 이야기를 하는데 하나같이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흥선군만은 달랐다지요. “꿈에 탑신이 나타날 정도면 이곳은 진정 명당(明堂)”이라고 한 것입니다. 형제들을 설득해 탑을 부수자 바위가 드러났습니다. 흥선군이 도끼를 내려치자 바위는 최후의 저항이라도 하듯 도끼를 튕겨내는 것이었습니다. 흥선군은 이에 이렇게 외쳤습니다. “나라고 왜 왕의 아비가 되지 말라는 것이냐!” 이러면서 다시 도끼질을 하자 마침내 바위마저 깨져버렸습니다.
그런데 흥선군이 없앤 가야사는 ‘동국여지승람’의 내용을 보면 수덕사보다 큰 절로 짐작된다지요. 꿈에 등장했다는 금탑은 공주 마곡사(麻谷寺) 대웅전 앞에 있는 탑처럼 탑 윗부분을 구리쇠로 씌운 라마교 양식이며 절 자체는 공민왕 7년(1358)에 나옹화상이 세운 것이라고 전해집니다.
어쨌거나 절을 없애고 탑을 부순 흥선군이지만 마음이 편할리는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훗날 고종이 즉위한 뒤 목수를 보내 은덕에 보답한다는 뜻의 보덕사(報德寺)를 지었지만 이 보덕사는 가야사에 비하면 그 규모가 비교할 바가 못된다고 합니다. 흥선군은 이렇게 절을 없애고 그 다음해인 1845년 남연군 묘를 조성하는데 여러가지 장치를 했다고 하지요. 훗날의 도굴(盜掘)에 대비해 철(鐵) 수만근을 붓고 강회를 발랐던 겁니다. 명당터를 마련한지 7년뒤부터 흥선군은 ‘행복한 조짐’을 느낍니다.
1852년에 둘째 아들 재황(載晃, 아명은 명복·命福)을 얻은 것입니다. 흥선군엔게는 모두 세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재면, 이재황, 이재선 입니다. 이 가운데 둘째 재황을 순조의 큰아들로 21살 때 사망한 효명세자(익종으로 추증)의 양자로 입적시킨 것인데 이 둘째아들이 철종 사후 대가 끊긴 왕위를 잇게된 것입니다. 여기서 남연군 묘를 살펴보겠습니다. 제가 이곳을 간 것은 예산 수덕사를 오가며 경허선사와 만공스님, 옹산 스님을 취재할 때였습니다. 남연군 묘를 가리키는 도로 표지판이 곳곳에 있어 가보니 풍수가들은 보통 남연군 묘를 다음과 같이 평했습니다.
“한마디로 풍수지리가 일컫는 명당의 조건을 모두 갖춘 곳이다. 뒤로 가야산 서편 두 바위가 문기둥처럼 서있는 석문봉(石門峰)이 주산(主山)이며 옥양봉, 만경봉이 좌청룡, 가사봉, 가엽봉에 원효봉으로 이어지는 맥이 우백호가 된다!”
또한 묘 앞쪽 평야를 지나 60리 떨어진 봉수산(鳳首山)이 안산(案山)이 되며 옥녀폭포-가사봉 계곡의 물이 와룡담에 모였다가 묘 앞으로 굽이쳐 흐르니 그야말로 배산임수의 임수(臨水)라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남연군 묘에서 보아 왼쪽에 돌부처(상가리 미륵불)가 있는데 앞이 아닌 골짜기쪽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를 두고 남연군 묘에서 상대적으로 지세가 약한 그쪽을 비보하려 부처를 세웠다는 설과 이 석불이 흥선군이 보기 싫어 고개를 돌렸다는 설이 있습니다.
이렇게 절을 없애고 명당을 얻어 고종과 순종을 배출했지만 과연 이곳이 진정한 명당일까요? 훗날의 역사를 보면 고개를 갸우뚱할 수 밖에 없습니다. 먼저 고종 5년인 1868년 독일 상인 오페르트에 의해 남연군 묘는 도굴을 당하는 수모를 겪지요. 오페르트가 어떤 인물인지 살펴봅니다. 유대계 독일인이자 인류학자인 에른스트 야코프 오페르트(Ernst Jakob Oppert· 1832~1903)는 살면서 모두 세차례 조선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도굴을 하기 2년전인 1866년 오페르트는 조선 정부에 통상(通商)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앙심을 품지요. 2년 뒤인 1868년 4월 그는 조선으로 오기 전, 100여명으로 구성된 세력을 규합합니다. 여기엔 중국 상해 미국영사관에 근무했던 미국인 프레더릭 헨리 배리 젱킨스, 프랑스 선교사 스타니슬라스 페롱 등 백인 8명과 말레이시아인-조선인-중국인이 포함돼 있었습니다.
그들은 조선에 오기전 북(北)독일연방 국기를 게양하고 지금 서해안고속도로 휴게소인 행담도(行擔島)에 정박하다가 구만포(九萬浦)에 상륙했습니다. 이들은 조선 관리들에게 “우리는 러시아에서 왔다”며 총칼을 휘두르고 위협을 했습니다. 겁을 집어먹은 조선 관리들이 사라지자 오페르트 일당은 덕산 가동(伽洞)에 있는 남연군의 무덤으로 향했습니다. 이들이 묘를 파헤치자 덕산군수와 몇몇 주민들이 제지했지만 서슬퍼런 위협에 물러설 수 밖에 없었지요. 날이 밝자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조선 주민들이 몰려오자 오페르트 일당은 미처 남연군 묘를 다 파헤치지 못하고 도주하지요. 아예 도망간 것이 아니라 배를 타고 영종도 부근까지 북상합니다. 오페르트의 만행은 조정에 알려지는데 뜻밖에도 흥선군에게 오페르트의 편지가 도착합니다.
“남의 무덤을 파는 것은 예의가 없는 행동인걸 알지만 귀국의 안위(安危)가 오히려 귀하의 처리에 달려 있으니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있거든 좋은 대책을 강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만일 내말을 듣지않는다면 몇 달 지나지 않아 우환을 당할 것이니.”
그야말로 협박문을 받아든 흥선군은 겁을 먹기는커녕 서양 오랑케 즉 양이(洋夷)를 추척하라고 명하는 한편 그 이면에 천주교도의 내응(內應)이 있다고 보고 천주교 탄압에 박차를 가합니다. 조상의 묘를 파헤친 이 사건은 조선의 앞날에 영향을 끼칩니다.
1866년 병인양요로 가뜩이나 서양에 대한 인식이 나빠진 가운데 1868년 오페르트 도굴사건까지 일어나자 조선은 쇄국으로 국가방침을 정하지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어쨌든 오페르트는 도굴에 실패한 후 영종도에서 다시 조선군과 싸웁니다. 4월 25일 영종도에 상륙해 격렬한 전투를 폈는데 조선군의 피해도 컸지만 오페르트 일당 가운데 2명도 죽지요. 조선은 그들의 목을 베 효수한 뒤 서울로 가져와 전시했습니다. 불안한 백성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조치였지만 이게 끝은 아니었습니다.
4월 29일 오페르트는 황해도 장연(長連)의 찬도, 풍천 회렴곶까지 진출했다가 비로소 되돌아갑니다. 오페르트 일행의 만행은 머지않아 중국 상해에 있는 서양 외교가에도 알려집니다. 특히 그 배후에 젠킨스가 있었다는 사실에 미국은 충격을 받지요. ‘최고 문명국가’라고 자부했던 미국이 남의 묘를 파헤쳤다며 조소의 대상이 되자 미국은 젠킨스를 체포해 법정에 세웠으며 오페르트 역시 증인으로 소환됐습니다. 이때 젠킨스는 조선과 통상조약을 맺기위해서 이런 일을 했다며 해괴한 주장도 펴지요. “조선 왕국의 사신 1명을 배에 태워 세계일주를 시켜주고 이 일을 통해 은둔국 조선을 세계에 알리려했다”는 허무맹랑한 말을 한 것입니다.
Photo by 이서현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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