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규 부친 묫자리 선정해준 육관도사가 박정희 대통령 묘소를 비판한 이유
입력 : 2015.12.27 10:17
[문갑식 기자의 기인이사(奇人異士)(36):사도와 남연군과 흥선군과 육관도사의 천하명당(下)]
젠킨스는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됐고 독일인 국적인 오페르트도 아무 책임도 지지않고 자기나라로 되돌아갔습니다. 오페르트는 이후 ‘금단(禁斷)의 나라 조선 기행’이라는 책을 썼는데 이 책에서는 조선을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고 합니다. 오페르트는 이후 한번도 조선을 찾지 않았는데 훗날 이 사실은 독일에도 알려져 반 유대풍조에 불을 붙이는 원인이 됩니다.
당시 독일에서는 유대인에 대한 시선이 극도로 나빴는데 유대계 오페르트가 독일 망신을 시켰다는 비판이 일게 된 것입니다. 이후 역사는 여러분이 아는대로 쇄국정책에 이은 일본과의 강화도 수호조약, 한일병합으로 이어져 조선은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지요. 어떻습니까, 이렇게 본다면 남연군의 천하명당도 다 부질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끝으로 흥선군은 아시다시피 명성황후와의 권력투쟁에서 밀려나 파란만장한 말년을 보내다 1898년 사망합니다. 그런데 이 흥선군 역시 묘를 여러 번 이장합니다.
처음엔 경기도 고양군 공덕리에 있다가 일제가 1906년 파주군 대덕리로 이장했으며 1966년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로 이장한 것입니다. 경기도 화성의 융건릉(사도-정조의 묘), 남연군 묘, 흥선군 묘를 답사하며 근대사를 짚어보는 것도 의미있겠습니다. 지금 남연군 묘는 주말이면 전국에서 몰려든 풍수동호회들로 만원입니다. 최근 이곳을 찾았더니 경상도-전라도에서까지 달려온 풍수동호회원들이 수맥을 찾는다며 몇시간이고 남연군 묘를 서성이고 있더군요. 남연군의 혼이 있다면 뒤숭숭했을 겁니다.
그런데 남연군 묘쪽에서 계속 직진해 올라가면 현대 풍수사에서 이름을 남긴 한 인물이 잠들어 있습니다. 바로 육관도사로 알려진 고 손석우(孫錫佑·1928~1998)씨의 묘입니다. 육관도사는 ‘터’라는 책을 베스트셀러로 만든 인물인데 유명한 일화가 많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선친의 묘를 잡아준 일화입니다. 김 전 부장은 1970년대 중반 건설부장관으로 재임할 때 부친이 사망하자 손석우씨에게 묫자리를 봐달라고 했으며 손씨가 터를 골라주며 말했습니다. “이곳은 군왕지지(君王之地)다!” 그런데 장용득씨(1999년 작고)라는 또다른 풍수가에게 그 땅을 봐달라고 하자 장씨는 “여기 묘를 쓰면 3년 내에 장남이 이금치사(以金致死) 당한다”며 말렸다지요. 이금치사란 쇠붙이를 잘못 써 죽는다는 뜻입니다.
김 전 부장측은 장씨의 말 대신 손씨의 말을 믿었으며 얼마 후 중앙정보부장이 되자 장씨는 ‘괘씸죄’에 걸려 거의 도피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장씨의 말 한마디는 두고두고 화제가 됐습니다. 몇 년 뒤 신군부가 집권하자 장씨는 또다시 조사를 받게됩니다. 수사관들은 “당신이 김재규 부친의 묫자리를 명당이라고 했느냐”고 추궁했고 장씨는 “다른 사람이 한 말”이라고 해 겨우 화를 면했습니다. 육관도사는 이외에도 현충원에 있는 고 박정희 대통령의 묘소에 대해서도 강하게 비판한 바 있습니다.
고 박정희 대통령의 묫자리는 육관도사와 쌍벽을 이룬 청오 지창룡(池昌龍)선생이 잡아준 것입니다. 육관은 청오를 비난하며 “(박대통령) 묘를 잘못 잡아 외아들(박지만씨를 지칭)이 감옥을 들락거리고 가족간에 분란이 그치지 않는다”고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이 대통령이 됐으니 육관도사의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할 지 궁금합니다. 내친 김에 청오 지청룡선생(2003년 작고)은 고 김영삼 대통령 시절 다음과 같은 예언도 남겼다고 합니다.
“다음대는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이 나올 것이며 그 후 가장 불쌍한 대통령이 나올 것이며 한사람의 쫓겨나는 대통령이 나올 것이며 그 다음 성군(聖君)이 나와 나라를 부강케할 것이다!”
청오의 말대로라면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은 고 김대중, 가장 불쌍한 대통령은 고 노무현, 한사람의 쫓겨나는 대통령은 이명박, 성군은 박근혜 대통령이 되는 셈인데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육관도사의 묘는 남연군 묘에서 차로 5분쯤 올라가면 길이 막힌 곳 바로 옆에 있습니다. 여기도 예외없이 풍수동호회원들의 발길에 짓밟히고 있어 잠든 육관도사도 뒤숭숭할 것 같습니다. 육관은 사망하기전 자식들을 불러놓고 “내가 죽으면 사망한 사실을 남에게 알리지말고 내가 잡아놓은 터에 묻으라”는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과연 그 자리에서 보니 조망이 탁 트였고 앞으로는 커다란 저수지가 있었습니다만 주변은 약간 달랐습니다.
손선생 묘에서 볼 때 오른쪽은 너덜바위가 널려있고 개울이 아닌 산골짜기로 물이 줄줄 흐르고있었는데 이것도 수맥이 아닐까요? 풍수는 시대를 막론하고 관심의 대상인데 제가 궁금했던 것은 가야산도립공원에 어떻게 개인 묘를 썼는가 였습니다.
Photo by 이서현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역사·고서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 동네 올림픽, 운동회 날은 온 동네 잔칫날 (0) | 2016.01.02 |
---|---|
역사의 뒤안길로 쓸쓸히 사라져가는 우리 옛집을 찾아서 (0) | 2016.01.01 |
흥선군의 명당터 쟁탈의 결말, 오페르트 도굴사건 (0) | 2015.12.30 |
조선의 르네상스로 전해진 정조시대의 이면 (0) | 2015.12.29 |
오원 장승업(吾園 張承業)의 그림산책 (0) | 2015.12.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