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茶) 문화공간, 구도심 골목 안 ‘루치아의 뜰’
▲ 마당과 한옥 기둥, 콘크리트 기와까지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루치아의 뜰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고 텅 빈 집들만 남은 쓸쓸한 구도심, 밤이면 불량학생들이 모여들던 문 닫은 극장 뒤 좁은 골목에 스텔라 할머니가 살던 집 한 채가 있었다. 파란색 낡은 철문과 소박한 뜰이 있는 이 집은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3년 동안 비어 있어 폐허나 다름없었다.
담장은 무너져 내리고 사람 손을 탄 지 오래된 살림살이가 나뒹굴고 있었지만, 이 집을 만나는 순간 발을 뗄 수 없었다. “첫눈에 반했어요. 넓은 마당도, 집 앞 골목도 예쁘고, 옛집이 그대로 남아 있는 모습도 마음에 쏙 들었지요.” 취미로 오랫동안 차(茶)를 공부해온 미경 씨는 나이 오십이 넘으면 자신만의 차 공간을 갖는 것이 꿈이었다
약 40평의 대지에 방 두 칸, 부엌 한 칸, 다락이 있는 10평 정도의 집이었다. 차도 들어올 수 없는 좁은 골목 안의 다 쓰러져가는 집을 도대체 어쩌려고 사냐고들 했지만, 그녀는 하나도 걱정되지 않았다. 조용한 구도심의 정취가 오히려 좋았고, 집은 손을 보고 뜰을 정리하는 정도로 충분할 거라 생각했다.
◀ 고즈넉한 한옥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겨울 풍경 / ▶ 아담한 부엌에서 차를 준비하는 미경 씨
이 집은 50년 전, 할머니의 남편이 직접 나무를 깎고 기둥을 세워 3년 동안 지은 집이다.
문틀 하나에도 할아버지의 손때가 고스란히 묻어 있는 곳이기에 할머니는 굳이 홀로 이 집에 남아 여생을 보냈다. 할머니마저 세상을 뜨고 집만 덩그러니 남았지만, 아들이 집을 팔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이에 미경 씨는 집을 허물지 않고 옛 모습을 최대한 살려둘 것이라는 뜻을 전했고, 2012년 겨울, 마침내 ‘스텔라의 뜰’은 ‘루치아의 뜰’이 됐다.
하지만 집을 고치는 일은 시작부터 쉽지 않았다. 근처 시공팀 서너 곳을 찾아 상담해봤지만, 대답은 하나같이 ‘집을 허물고 다시 지으라’는 것이었다. 새로 지으려던 것이면 애초에 이 집을 사지 않았을 것이라고 아무리 얘기해도, 비용 차이가 거의 나지 않으니 새집을 짓는 것이 합리적이란 말만 되풀이했다. 그러던 어느 날, 미경 씨는 잡지에서 우연히 임형남 건축가의 글을 보게 됐다. 작은 집과 옛것을 소중히 여기는 생각이 자신의 마음과 똑 닮아 밑줄을 그어가며 읽고 또 읽었다. 후에 다른 책도 찾아 읽으면서 노은주, 임형남 부부가 화려한 이력의 유명 건축가라는 것도 알게 됐다.
▲ 3년 간 방치되었던 고치기 전의 모습
“집을 찍은 사진을 담은 USB를 가지고 서울에 있는 건축사사무소에 직접 찾아갔어요. 버스 안에서 부디 이분들이 우리 집을 귀하게 여겨주시기를 얼마나 기도했는지 몰라요.” 내로라하는 유명 건축가가 이 작은 집을 고치는 일을 과연 맡아줄까 걱정도 했지만, 막상 만나서는 편안한 대화가 이어졌다. 계획했던 예산안에 설계비가 추가되었지만, 사실 건축가를 만나는 순간 미경 씨는 이미 마음을 굳혔다. 건축가의 생각과 설계 작업에 대해 당연히 지급해야 할 비용이라고 생각했고, 건축에 문외한인 자신들이 시행착오를 줄이는 길이기도 했다.
▲ 포근함이 느껴지는 루치아의 뜰 입구
공주에 내려와 실제로 집을 본 임형남 건축가는 오래된 골목과 집의 모습에 연신 감탄했다. 마치 이 집이 오랫동안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고. 그리고 그는 옛 모습을 최대한 간직할 수 있는 방향으로 집을 고칠 것을 제안했다. 미경 씨가 그토록 기다리던 말이었다. “세월의 흔적이 가장 귀한 인테리어라는 한마디가 얼마나 고마웠는지. 서울과 공주를 오가며 집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설계를 진행하던 그 3개월이 참 좋았습니다.” 드디어 공사가 시작되고 작년 여름 두 달을 꼬박 집을 고치는 데 매달렸다. 기본적인 구조는 건드리지 않되, 남북으로 긴 대지 형태에 따라 동향으로 지어진 집에 햇빛을 더 많이 들이기 위해 남쪽 벽면을 트고 창을 크게 냈다. 막혀 있던 천장도 시원하게 터서 대들보와 서까래를 노출해, 열 평 남짓한 집이지만 답답하지 않게 만들었다. 한정된 예산 안에서 작업하기 위해 보강과 같이 꼭 필요한 것들만 하고, 조경 등 천천히 할 수 있는 것들은 미경 씨와 남편이 직접 하기로 했다.
방에 누우면 서툰 솜씨로 다듬어 매끄럽지 않지만 그것조차 정겨운 대들보와 기둥이, 부엌에서는 파란색 수도 펌프가 있는 예쁜 뜰의 정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스텔라 할머니가 쓰던 살림살이들은 미경 씨의 손을 거쳐 화분이 되거나 인테리어 소품으로 재탄생했다. 자개장롱의 문짝은 다락방에 놓인 테이블이 되었고, 삭아 내려앉았던 툇마루는 선반으로 다시 자리 잡았다. 할머니의 옷장에서 나온 광목으로 커튼을 만들어 달고, 할머니가 쓰던 풍로에는 장미꽃을 심어 뜰에 놓았다. 집의 주인은 바뀌었지만, 지난 세월과 이야기는 이렇게 고스란히 이어진다. 그녀는 앞으로 이곳에서 손님에게 따뜻한 차 한 잔을 대접하고, 올봄에는 마당에서 천연염색도 하며 다양한 문화강의를 이어갈 생각이다. 그렇게 이 집에는 스텔라 할머니의 세월 위에 루치아 미경 씨의 삶이, 또 이곳을 다녀가는 사람들의 수많은 이야기가 차곡차곡 쌓여갈 것이다.
▲ 선반, 화초를 심은 그릇, 아리랑 성냥, 소품으로 남겨둔 아궁이와 가마솥까지 스텔라 할머니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 남향으로 창을 내어 종일 햇볕이 따뜻한 부엌
월간 <전원속의 내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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