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고서화

조선시대 미술-윤두서 작품

산야초 2016. 3. 31. 21:27

恭齋 尹斗緖

 

 

윤두서尹斗緖 1668(현종 9년)∼1715(숙종 41)

 

본관은 해남(海南). 자는 효언(孝彦), 호는 공재(恭齋)·종애(鐘崖). 겸재(謙齋) 정선(鄭  ),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과 함께 조선 후기의 삼재(三齋)로 불린다. 윤선도(尹善道)의 증손이고, 덕희(德熙)의 아버지이다. 1693년(숙종 19)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남인계열이었고 당쟁의 심화로 벼슬을 포기하고 학문과 시·서·화로 생애를 보냈다. 경제·병법·천문·지리·산학·의학·음악 등 각 방면에 능통했으며, 새롭게 대두되던 실학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산수·인물·영모·초충(草蟲)·풍속 등 다양한 소재를 다루었는데 〈자화상〉·〈노승도 老僧圖〉를 통해 인물에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음을 알 수 있다. 산수화풍은 절파계 양식을 수용한 과도기적 작품과 남종화풍으로 그린 작품으로 대별된다. 그외에 〈선차도 旋車圖〉·〈채애도 採艾圖〉는 18세기 후반 김홍도(金弘道) 등에 의해 유행한 풍속화를 예시해준 것이며 그의 실학적 태도를 엿볼 수 있다. 〈패하백로도 敗荷白鷺圖〉(간송미술관)는 이색적인 화조화로 풍속화와 함께 조선 후기 화단의 새로운 경향을 예시해주는 선구적인 면을 보여준다. 〈팔준도 八駿圖〉·〈백마도 白馬圖〉 등의 말그림은 중국산 말들을 약간 변화시켜 생동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화풍은 아들인 덕희와 손자인 용(  )에 의해 계승되었다. 현재 해남 종가(宗家)에 전하는 유품 가운데 〈고씨역대명인화보 顧氏歷代名人畵譜〉는 남종화풍과의 접촉을 알려주며 동국여지도나 일본지도, 천문학과 수학에 관한 서적 등은 그의 실학에 대한 관심을 보여준다. 〈채애도〉·〈선차도〉·〈백마도〉 등은 60여 점의 소품으로 꾸며진 〈해남윤씨가전고화첩〉(보물 제481호)에 전하고 있으며, 〈노승도 老僧圖〉·〈심득경초상 沈得經肖像〉·〈출렵도 出獵圖〉·〈우마도권 牛馬圖卷〉 등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저서로 〈기졸 記拙〉·〈화단 畵斷〉이 있다.

 

 

그의 자화상에 어린 고독, 결연한 내면의지의 표출. 진솔한 영혼의 표출, 자화상. 동서양을 통틀어 이렇게 인물의 정신세계가 표출된 그림은 없다.

 

조선시대 숙종 연간에 활약했던 선비화가인 공재(恭齊) 윤두서(尹斗緖, 1668∼1715년)의 자화상이다. 한국 회화사상 최초의 자화상인 동시에 한국 초상화 중에서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으로 회화작품 중에는 드물게 국보로 지정된 작품이다. 윤두서는 조선 중기 가사문학으로 유명한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년)의 증손자이자 조선후기 실학의 대가인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년)의 외증조부로 조선 후기 실학자인 동시에 시·서·화에 뛰어난 예술가였다. 그는 당대 명문 집안인 해남 윤씨의 종손으로 대부호였으며, 한 나라의 재상이 될 만한 학문적 소양과 도덕적 성품을 가졌지만 그의 인생은 그리 순탄치 못했다. 1693년 25세 때 진사(進士)가 되었으나, 평생 관직에는 나아가지 못했으며 낙향하여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한 선각자의 쓸쓸하고 외로운 삶을 살다가 48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해남에 낙향하여 사는 삶이 한가로웠기 때문일까, 그는 양반이었음에도 서민들의 삶에 관심이 많았는지 ‘나물 캐기’ ‘짚신 삼기’ 등의 농부들의 삶을 주제로 서민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담긴 풍속화를 남기기도 하였다. 선구적 지식인임 동시에 예술가였던 그가 죽기 한 3년 전에 시절 운을 좋게 타지 못했던 그의 불우했던 선비의 삶을 아쉬워했던지 이 자화상을 남겼다. 조선시대에는 타인을 그린 초상화는 많았어도 자화상의 예는 극히 드문 가운데 윤두서의 ‘자화상’은 표현형식이 특이하면서 묘사력이 뛰어나고 인물의 강한 정신세계를 표출해 보는 이를 압도하기에 충분한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된다.

 


 

 

자화상

종이에 담채, 38.5 x 20.5cm 해남종가 소장.

초상화의 미학이 寫實과 傳神의 구현이라고 할 때 공재의 <자화상>은 이 두 가지 모두에서

성공한 드문 예이다. 이 한 폭의 그림속에 공재의 인생과 예술이 모두 담겨있다.

 

   “터럭 한 올이라도 같지 않으면 그 사람이 아니다” (一毫不似便是他人)라는 정통 초상화론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안면의 윤곽선과 수염의 필선에 화력(畵力)을 집중시켰다. 정면을 응시하는 눈에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힘이 있고, 그 뒤에는 선비다운 기개가 충만 되어 있다. 고개지가 인체 중에 사람의 정신이 깃들이어 있는 곳이 눈이라고 한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윤두서상〉은 사진 카메라의 눈만 가지고는 도저히 포착할 수 없는 인간의 심정과 내재적인 정신을 외모와 함께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자화상〉의 화면 구도는 매우 간소하다.

보통의 초상화가 전신(全身)을 그리거나 상반신을 그리고 있는데 반해, 여기서는 얼굴만 강조하여 그렸다. 어깨나 목, 또는 웃옷의 묘사 같은 것은 물론 없으며, 배경은 그냥 여백인 채로 남겨져 있다.

그러나 간소하고 화면에 빈 곳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 화면이 결핍되어 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빈 곳이 그 배후를 충분한 직관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는 경우에는 그 빈 곳은 결코 오래 빈 곳으로 남아 있지 않고 곧 직관에 의하여 채워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화면의 빈 곳은 빈 곳이 아니라 무한한 생각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된다.

   한마디로 〈자화상〉은 초상화의 묘처인 골법화(骨法化)를 성공적으로 달성해 낸 초상화라 할 수 있다. 인물은 정면상이다. 그러므로 정확한 좌우대칭을 이룬다. 얼굴은 단순한 타원형이며 이목구비가 매우 단정하다. 얼굴 전체에서 바깥으로 뻗어난 수염이 표정을 화면 위로 떠오르게 한다. 더하여 새까만 탕건 끝이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며 휘어져 있어 머리 전체의 볼륨을 요령있게 시사한다. 그런데 극사실로 그려진 이 작품 속의 인물은 놀랍게도 귀가 없다. 목과 상체도 없다. 마치 두 줄기 긴 수염만이 기둥인 양 양쪽에서 머리를 떠받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머리는 화면의 상반부로 치켜 올라갔다. 덩달아 탕건의 윗부분이 잘라져 나갔다. 눈에 가득 보이는 것이라고는 귀가 없는 사실적인 얼굴 표현뿐인데 그 시선은 정면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다. 이러한 초상이 무섭지 않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1995년 <자화상>의 옛 사진이 발견 - 1937년 조선사편수회에서 편집하고 총독부가 발행한 『조선사료집진속』에는 몸부분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고, 인상도 어질어 보이는 침착하고 단아한 분위기 자화상은 미완성작임이 확인되었다.

 

 

노승도

종이에 수묵, 57.5 x 37.0,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공재의 인물화 중 최고 걸작으로 긴 지팡이를 짚고 느릿하게 걷는

노승의 자태에서 조용한 명상적 분위기가 서려있다.

녹우당 가까이에 있는 대둔사(대흥사)의 한 스님을

그린 듯 인물의 얼굴과 몸 동작에 사생감이 충만하다.

 

 

 

동국여지 지도

종이에 채색, 117.2 x 74.0cm 해남 종가 소장

공재가 손수 그린 한반도 지도이다.

직접측량 해서 그린 것은 아니지만

당시 목판화로 제작된 지도를 바탕으로 하여 채색본으로 만들었다. 

 

 

 

 

주마상춘도

비단에 채색, 29.0 x 21.0cm, <해남윤씨가전고화첩>, 해남 종가 소장.

 말타고 달리는 경황에서도 주변의 봄 기운을 환상한다는 낭만적주제의 그림이다.

치달리는 속도감을 나타내기 위해 전면의 버드나무 줄기를 대각선으로 설정하고

바람에 휘날리는 잔가지를 아래로 늘어뜨렸다.

 

 

 

 

 나물캐기

삼베에 수묵, 30.2 x 25.0cm, 해남윤씨가전고화첩, 해남 종가 소장,

조선시대 회화사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속화다운 속화이다.

언제 서민의 모습이 이렇게 회화상의 주제로 당당히 그려진 일이 있었던가.

다만 먼 산의 표현이 그림의 현실감을 감소시킨다. 차라리 이를 표현하지 않았다면

더욱 속화의 박진감이 살아났을 것이다. 

 

 

 

 

군마도

종이에 채색,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낙마도

 비단에 색채, 110.0 x 69.1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보기에 따라서는 유머넘치는 그림이다. 그러나 畵題의 표현대로

술에 취한 것도, 졸았던 것도 아닌데 왜 말에서 떨어졌을까?

이 또한 인생에서 좌절을 껵은 공재가 자전적 기분으로 그린것이 아닐까.

 

 

 

 

 

유하백마도

비단에 색채, 34.3 x 44.3cm, 해남 종가 소장

공재의 말 그림 중 회화적 완결미가 가장 돋보이는 佳品이다.

백마의 준수한 자태도 그렇지만 버드나무의 운치있는

표현으로 화폭에 청량한 기운이 돈다.

 

 

 

 

마상처사도

비단에 채색, 98.2 x 57.5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말의 묘사가 정확하고 인물의 자세는 의연하기만 하다.

 

 

 

 

밭 가는 풍경

비단에 수묵, 25.0 x 21.0cm 해남 종가 소장

농부가 소를 몰며 밭 가는 풍경을 그린 이 작품은 그림 자체로는

크게 성공하지 못했지만 마침내 밭 가는 농부,

즉 서민의 회화의 주제가 되었다는 사실에서

이 그림의 진보성을 엿보게 한다.

 

 

 

나물 캐는 연인

종이에 담채, 27.6 x 21.2cm, 간송미술관 소장.

공재의 손자 윤용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화풍을 이어받았다고 하지만

그런 면모를 보여주는 작품은 아주 드물다. 그러나 <나물캐는 연인>만은

할아버지 못지 않은 속화의 참맛을 느끼게 한다.

 

 

 

돌깨는 석공

모시에 수묵, 22.9 x 17.7cm, 학고재 소장.

돌 깨는 석공들의 표정이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이 그림은 현장감과 박진감이 더 살아난다.

 

 

 

 

 

공재 윤두서의 낙관 『근역인수』에서 전재


 


말과 인물 그림 모두에서 회화사에 이름을 남긴 공재선생의 진 면목을 찾아 볼 수 있다.세필이라 할 수 있을 정도의 묘사가 정확하고 말위에 있는 선비의 자세는 의연함과 함께 강건함이 느껴진다. 이는 공재 자신의 모습을 그려낸 것이 아닌가?

윤두서는 말 그림을 잘 그렸는데, 그가 그린 말 그림이 〈유하백마도〉 외에도 상당수 전한다. 말 그림에 있어서 그의 사실적인 묘사력은 세심한 관찰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말을 좋아하여 자신이 아끼던 말을 타지도 않고 잘 길렀다고 한다. 후에 말이 죽자 말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는 이야기가 현재도 그의 고향의 녹우당(綠雨堂) 앞에 있는 말 무덤과 더불어 전해오고 있다. 배경의 버드나무와 언덕은 형식적으로 그렸다기보다는 실제로 말이 매여 있던 현장을 그대로 묘사한 듯 사실적인 느낌이 든다. 이는 그가 아꼈던 백마를 표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