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고서화

원효의 '판비량論' 잃어버린 페이지, 도쿄에서 찾았다

산야초 2016. 4. 20. 21:30

원효의 '판비량論' 잃어버린 페이지, 도쿄에서 찾았다

현존 最古의 한국인 저술 "신라 각필, 日 가타카나의 기원" 韓정재영·日고바야시 교수 주장

특수 조명 장치로 조사하자 뾰족한 기구로 새긴 '각필' 보여 오타니대 판본과 같은 필사본

조선일보 | 도쿄/허윤희 기자 | 입력 2016.04.20. 03:09


현존 최고(最古)의 한국인 저술인 신라 원효(元曉· 617~686) 대사의 '판비량론(判比量論·사진)' 미공개 조각이 일본 도쿄에서 발견됐다. 원효가 55세 때인 671년 쓴 '판비량론'은 완본(完本)이 전해지지 않으며 전체의 8분의 1 정도만 교토 오타니(大谷)대학에 소장돼 있었다. 서지학자인 정재영 한국기술교육대 교수는 "조각나 흩어져 있어 그동안 학계에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던 '판비량론' 단간(斷簡·떨어지고 빠져서 일부만 남은 책) 9행을 도쿄의 개인 소장자에게서 찾았다"며 "오타니대가 소장하고 있는 '판비량론'과 동일한 필사본"이라고 밝혔다.

본지는 지난달 한·일 양국 학자들이 새 자료를 조사하는 현장을 단독 동행 취재했다. 크기는 27.1(세로)×14.2㎝. 유려한 초서체로 흘려 썼다. 고서 수집가인 오치아이 히로시(落合博志) 일본 국문학연구자료관 교수는 "10여년 전 교토의 한 고(古)서점에서 구입했다"고 했다.


특히 새 자료에서도 신라의 구결(口訣)이 적힌 각필(角筆)이 확인돼 일본의 가타카나가 신라에서 유래했다는 설을 뒷받침할 중요한 근거가 될 것으로 보인다. 각필 연구의 권위자인 고바야시 요시노리(小林芳規) 히로시마(廣島)대학 명예교수는 "세 곳 이상의 각필 흔적이 뚜렷이 보인다"며 "각필 문자는 가타카나와 문자 형태와 글자를 만드는 방식이 유사하다. 한자를 축약해 만든 가타카나가 한반도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크기와 종이 재질, 서체까지 똑같네요! 오타니대 판본과 같은 필사본입니다."

지난달 17일 오후 일본 도쿄의 한 호텔. 필사본을 검토한 한·일 양국 학자들이 흥분했다. 정재영 한국기술교육대 교수를 비롯해 고바야시 요시노리(小林芳規) 히로시마대학 명예교수, 김천학 동국대 HK교수(불교학)가 새 '판비량론(判比量論)'을 조사하기 위해 모여 있었다. 소장자인 오치아이 히로시(落合博志) 일본 국문학연구자료관 교수가 조심스럽게 필사본 한 장을 꺼냈다.

정재영 교수는 "전체 9행인데 내용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1~5행은 판비량론 제6절의 앞부분이고, 6~9행은 이와 다른 어떤 절의 후반부에 해당한다"며 "서로 다른 부분을 이어 붙여서 만든 것"이라고 했다. "판비량론의 글씨가 워낙 빼어나고 아름답기 때문에 일본에서 관상용 서예첩으로 만들면서 별도의 다른 두 부분을 정교하게 이어 붙여 만든 것"이라는 설명이다. 오치아이 교수는 "고서첩에 낱장으로 끼어 있었는데 '비량'이란 글자가 보여서 혹시 '판비량론'이 아닐까 싶어 구입했다"고 했다. 그는 2005년 서예 도록인 '고필(古筆)에의 유혹'을 내면서 이 필사본 사진을 넣었다. 정 교수는 "4년 전 우연히 그 도록을 보고 오치아이 선생을 수소문했는데 드디어 실물을 찾았다"며 감격해했다.


'판비량론'은 671년 원효가 저술하고 나서 오래지 않아 중국과 일본에 전해졌고 일본에는 8세기 중엽 이전에 전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에 전해진 '판비량론' 필사본은 에도시대 말기에 조각조각 나눠진 것으로 추정된다. 1967년 일본 학자인 간다 기이치로(神田喜一郞)가 집안에서 소장해온 필사본을 책으로 출판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판비량론은 원래 1권 25장으로 구성돼 있지만 3장 105행 정도만 남아 있었고, 이후 간다 소장본은 교토 오타니대에서 보관해 왔다. 오타니대 필사본은 일본 중요문화재로 지정돼 있으며 말미에 나라시대 쇼무(聖武) 일왕(701~756)의 부인 고묘(光明) 왕후(701~760)의 붉은색 사인(私印)이 찍혀 있어 늦어도 8세기 이전에 필사됐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인 승려가 신라에서 베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가 지난 2002년 고바야시 교수가 신라의 언어와 발음이 적힌 각필 흔적을 발견해 신라인이 만든 것임이 확인됐었다.


이번에 발견된 '판비량론' 필사본에도 신라 구결이 적힌 각필이 나와 주목된다. 고바야시 교수는 흰 장갑을 끼고 특수 조명장치(각필 스코프)로 조사한 후 "배접 과정에서 각필 자국이 무뎌지긴 했지만 세 곳 이상의 각필 흔적이 뚜렷이 보인다"며 "오타니대 소장본에선 없었던 신라시대 범패부(梵唄符·불경 읽는 소리의 높낮이, 길이 등을 표시한 부호)도 있다. 본격 연구를 시작하면 더 많은 각필 흔적과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정재영 교수는 "한자 오른쪽 아랫부분에 '토(吐)'를 넣어 읽는 방식 등 나라(奈良) 도다이지(東大寺)에 소장돼 있는 신라 사경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에 적힌 구결과 자형, 기입 방식이 똑같다"고 했다.


각필 문자는 상아나 대나무의 한쪽 끝을 뾰족하게 만든 젓가락 모양의 전통 필기구인 각필로 새긴 글씨를 뜻한다. 한국·일본·중국의 고문서에서 발견되며 주로 한자를 읽기 쉽게 하기 위해 한자 옆에 발음법을 표기하는 데 사용했다. 고바야시 교수는 일본에서 최초로 각필 문헌을 찾아낸 권위자로, 일본 학자 최고의 영예인 은사상(恩賜賞)과 일본학사원상(日本學士院賞) 등을 수상했다. 2002년 고바야시 교수가 기자회견을 통해 "신라 각필이 일본 가나의 기원"이라고 발표했을 당시 NHK, 니혼게이자이신문 등 일본 언론들은 앞다퉈 이를 보도했고, 일본 학계에서도 화제가 됐다.

☞판비량론

원효가 남긴 150여권 중 유일하게 쓴 시기와 장소를 알 수 있는 저술이다. 말미에 ‘함형(咸亨) 2년(671) 7월 16일 행명사(行名寺)에서 탈고하다’라는 기록이 있다. 당나라 현장법사(602~664)가 고안한 논증 방식인 ‘비량(比量)’을 비판하는 논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