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고서화

임진왜란 때 아버지 대신 같은 날 죽은 네 명의 효자

산야초 2016. 5. 3. 21:16

임진왜란 때 아버지 대신 같은 날 죽은 네 명의 효자


 대구 달성군 비슬산 자락의 사효굴에 얽힌 슬픈 실화

오마이뉴스 | 정만진 | 입력 2016.04.22 09:20

[오마이뉴스정만진 기자]

 겨울에 가본 사효굴에서는 입구에 새겨져 있는 '四孝窟' 세 글자를 찾기가 쉽다.
ⓒ 정만진
 사효굴 입구 바위에 새겨져 있는 (흰 동그라미 부분의) '四孝窟' 세 글자는 (앞의 사진에서 보듯이) 겨울에는 잘 보이지만 여름에는 찾기도 힘든다. 사진은 아직 덩굴식물로 완전히 덮히기 전에 세 글자가 간신히 보이는 광경이다.
ⓒ 정만진

사효굴(四孝窟)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면 양리 360번지에 있다. 이름만으로도 짐작이 되지만 이곳은 네 명의 효자로 말미암아 빚어진 슬픔이 깃들어 있는 굴이다. 때는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학살을 피해 비슬산 기슭의 이 동굴로 피란 온 아버지와 네 아들에 얽힌 이야기이다. 

사효굴에 관한 안내문은 사실 비슬산까지 오지 않고도 읽을 수 있다. 도동서원으로 가기 위해 현풍IC에서 내리면, 곧장 그 오른쪽에서 만나게 되는 '현풍곽씨12정려각'이라는 문화유산이 바로 그 현장이다. 한 집안에서 정려를 12개나 받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 현풍곽씨 문중에서 세운 대규모 정려각이다. 정려 열둘과 효자비 둘을 한 지붕 아래 모두 모시려니 자연스레 정려각이 커졌다.

 현풍곽씨12정려각 중 사효자각 부분
ⓒ 정만진
달성군 현풍면 지리 1348-2번지에 있는 현풍곽씨12정려각 앞 안내판에는 '임진왜란 때 비슬산 자락의 사효자굴에서 병든 아버지를 대신하여 목숨을 바친 곽재훈의 네 아들인 결, 청, 형, 호가 사효자공(四孝子公, 네 명의 효자)으로 정려(충신, 효자, 열녀를 기리기 위해 조정에서 내린 표창)'되었다는 설명이 쓰여 있다. 정려각 안에 12개나 되는 정려기(旌閭記, 정려 내용을 적은 나무조각)를 걸어두어야 하는 관계로 안내판에도 사효자에 관한 해설은 간략하다.

사효자를 표창하여 내려진 정려기는 이곳에만 있으므로 유심히 살펴볼 일이다. 12정려 중 가장 오른쪽은 화왕산성 전투에서 전사한 곽준과 그의 두 아들, 그리고 사위와 딸들을 기려 세워진 '일문삼강' 정려각이고, 사효자각은 그 왼쪽에 있다. 물론 정려기에 쓰여 있는 한문의 의미는 비슬산 사효굴 현지 안내판의 내용이 축소된 것이다. 현지 안내판의 본문은 아래와 같다.


사효굴(四孝窟)
달성군 유가면 양리 360

사효굴의 유래는 망우당 곽재우의 사촌형인 곽재훈의 네 아들과 관련 있다. 곽재훈의 슬하에는 결, 청, 형, 호의 네 아들이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들은 병환 중인 부친을 모시고 비슬산 중턱에 있는 동굴에 숨어 피난 생활을 하였다.


그런데 부친의 천식이 심해 기침소리가 끊이지 않았는데, 어느날 굴 밖을 지나던 왜병들이 기침소리에 굴 안에 사람이 있음을 알고 밖으로 나오라고 하였다. 이에 효성이 지극한 큰아들이 부친을 대신해 나갔다가 죽임을 당했고, 같은 방법으로 나머지 세 아들 또한 차례로 살해당했다.


결국 마지막에는 곽씨가 굴 밖으로 나가게 되었는데, 이에 그 간의 정황을 알게 된 왜장은 네 형제의 효성에 감동하여 곽씨의 등에 '네 효자의 아버지(四孝子之父)'라는 글을 써붙여 석방하였다. 그 후 마을사람들은 이 곳을 '사효굴'이라 이름하여 네 형제의 효성을 추모하였고, 나라에서도 이 사실을 알고 정려를 내렸다.

 사효자각 안에 걸려 있는 정려
ⓒ 정만진
굳이 해설을 붙이지 않아도 누구나 그 뜻을 헤아릴 수 있는 내용이다. 언뜻 읽으면 '일본군들에게도 자비심이 있었구나!' 하고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아니다. 깊은 산 속까지 돌아다니며 무고한 조선 백성들을 학살했고, 이곳에서도 이미 네 명이나 되는 죄없는 아들들을 처참하게 죽인 자들이다. 그들에게 무슨 '인간에 대한 예의'가 있으리.

안내문에 '네 형제의 효성에 감동'한 왜장이 아버지 '곽씨의 등에 "네 효자의 아버지"라는 글을 써붙여 석방'함으로써 다른 왜군들이 그를 다시 죽이지 않도록 했다는 문장은 일본군들의 자비심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쓰여진 것이 결코 아니다. 그 자들조차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사효굴의 네 아들이 너무나도 지극한 효심을 나타내었다는 강조일 뿐이다.


찾기 쉽고 오르기도 쉬운 사효굴, 꼭 가봅시다

사효굴은 차도에서 150미터 정도 떨어진 산비탈에 있다. 유가사가 있는 비슬산 정상 쪽이 아니라 그 맞은편인 초곡산성 아래의 계곡에 얹혀 있다. 당연히 과거에는 사람이 거의 접근할 수 없는 지점이었고, 그래서 아버지와 네 아들도 그곳에 숨었지만, 지금은 도로에서 응시할 때 곧장 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평지에서 굴로 올라가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계단도 설치되어 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는 '임진란 초기에 관군이 연전연패를 당하니 일반 백성들의 불안감은 극도에 달했다. (중략) 일본군의 침입이 없는 곳에 거주하는 백성들도 깊은 산속으로 피란하는 소동을 일으켰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소문만 듣고도 백성들이 산중으로 숨어든 때였으니 실제로 왜적들이 학살을 자행하는 곳에 거주한 병든 아버지와 그 아버지를 보살펴야 하는 네 아들이 힘들게 사효굴을 찾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지금은 총칼을 들고 뒤를 추격해오는 왜군들도 없다. 길도 평이하다. 비슬산에 간 이상, 아니 아직 한 번도 비슬산에 가보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한번은 마음을 내어 사효굴을 찾을 일이다. 비슬산은 땀흘려 오르지 않더라도 가볍게 닿을 수 있는 사효굴만은 꼭 답사를 해보자는 제안이다.


사효굴에 가서는, 누군가가 암벽에 새겨놓은 '四孝窟' 네 글자를 반드시 찾아보자. 사효굴에서 아버지를 대신하여 같은 날 함께 죽은 네 아들의 효심, 네 아들의 죽음 앞에서 무력함과 슬픔으로 몸을 가누지 못했을 병든 아버지의 고통, 세월이 흐른 뒤 '잊지 않겠습니다' 하는 뜻에서 암벽에 매달려 '四孝窟' 글자를 새긴 사람의 착한 마음, 그것들을 헤아려 보는 과정이 곧 인성교육이기 때문이다.

 사효굴 입구. 평지에서 굴까지 계단이 설치되어 있어 전혀 위험하거나 힘들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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