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와 산… 역사와 자연이 맞붙어 있는 곳
입력 : 2016.04.28 04:00
[노은주·임형남의 골목 발견] 삼척 '정라진'
강원도 태백의 백병산에서 발원하여 동해안으로 약 50㎞를 달리던 오십천이 바다와 만나는 곳에 삼척항이 있다. 그곳은 신라 지증왕 때 이사부가 지금의 울릉도인 우산국을 정복하기 위해 목각 사자 상을 배에 잔뜩 싣고 출항했던 장소이기도 하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이사부는 쉽게 항복하지 않는 우산국 사람들에게 말을 듣지 않으면 이 짐승들을 풀어놓겠다고 위협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삼척항에는 이사부광장이 있고 그곳에는 트로이의 목마 같은 커다란 나무 사자 한 마리가 멀리 울릉도 쪽을 바라보며 웅크리고 앉아 있다.
삼척에는 원래 조선시대에 왜구를 막기 위해 만든 군사기지가 있었다. 당시의 이름은 정라진이었다 한다. 그곳이 1915년 91m 길이의 방파제를 건설하는 대규모 축항 사업에 의해 삼척항으로 다시 태어난다. 일제강점기에는 석탄을 수출하는 항구였으며, 남한 최초의 시멘트 공장이 생겨 동해안에서 제일 큰 항구로 명성을 떨치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산업의 구조가 바뀌고 항구의 기능들이 인근으로 많이 분산되어 이제는 예전에 비해 퍽 한적한 항구가 되었다.
삼척은 마치 시신경의 맹점처럼 강릉과 울진 사이에 끼어 있어, 굳이 찾아가기엔 참 애매한 거리에 있다. 서울에서 동해를 향해 떠나면 그 발걸음이 강릉이나 묵호항에서 멈추고, 남쪽에서 7번 국도을 타고 올라가더라도 영덕이나 울진, 기껏해야 죽변항까지 올라가다 그친다. 그 묘한 경계에 있는 도시가 삼척이다.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곳이지만 바꿔 생각하면 청정하고 사람이 북적거리지 않아서 좋은 곳이기도 하다. 나는 예전에 부산에서 속초까지 바다 옆으로 난 길인 7번 국도를 타고 일주하다, 임원·용화·장호로 이어지는 삼척의 작고 아름다운 바닷가 풍경에 매혹되어 일정에서 벗어나 그곳에 머물렀던 적이 있었다. 나를 잡아끈 것은 호방한 듯하면서도 압도하진 않는 크기를 가진 삼척만의 묘한 분위기였다.
그렇게 삼척을 처음 알게 되었는데, 이후 신혼여행 때도 들르고, 여름휴가 때도 들르고, 출장길에도 일부러 들른다. 성수기의 혼잡은 잘 모르겠지만, 내가 갈 때마다 그 바닷가 모래사장에 사람은 거의 없다. 다만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새들과 파도에 실려 오는 바닷물의 거품을 보며 마음에 여백을 만들어내곤 했다.
목적 없이 여행으로 다니기만 하던 삼척에, 몇 년 전 일이 생겨서 들락거린 적이 있었다. 영동고속도로를 통해 삼척시로 들어간 것은 사실 그때가 처음이었다. 마치 정장을 입고 머리를 단정히 하고 거래처에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늘 멀리 돌아 천천히 경치 구경하며 다니던 국도가 아닌, 중간이 생략되고 풍경이 압축된 고속도로라는 효율적인 길이어서 그랬다.
어느 날 점심시간에 삼척에 도착했다. 갈 때마다 먹는 것은 늘 대충대충 때웠기 때문에 마땅히 식사할 곳이 떠오르지 않아 일단 삼척항으로 갔다. 내가 늘 다니던 곳은 외딴 바닷가나 한적한 산속이었는데, 삼척항은 훨씬 붐빌 테니 선택지가 많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나의 기대와는 달리 삼척항은 그리 크지 않았다. 길 변에 크고 작은 일반적인 포구의 식당들이 죽 도열하고 있었는데 어디로 들어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관광객 겨냥한 듯한 번지르르한 식당들을 지나 이 동네 사람들이 주로 다닐 법한, 외관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은 허름한 집을 찾아들어 갔다. 앉아서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마침 앞 테이블에 앉아 있던 손님이 외지인의 행색을 눈치챘는지 우리에게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여기 처음 오셨나 봐요? 어떻게 여길 알고 오셨나요?"
역시 이 집은 동네 사람들만 주로 오는 식당이라며, 여기선 그냥 회덮밥을 시키면 된다기에 그렇게 했다. 싱싱한 회가 푸짐하게 덮여 있는 양푼이 나왔고, 따로 시키지도 않았는데 본 메뉴 이상으로 푸짐하게 끓인 매운탕이 따라나왔다. 맛과 양에 비해 가격은 무척 소박해서 더욱 감동이었다.
식당 뒤로는 언덕이 있었고, 그 위로 집들이 들어차 있었다. 그리고 멀리 보이는 언덕에는 더 많은 집과 그 사이사이를 감아 올라가는 길이 보였다.무언가에 홀리듯 비탈을 따라 올라갔다. 나릿골이라는 이름의 동네는 여느 항구 언덕처럼 평범한 집들과 골목으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시간의 흔적이 잘 남아 있었고 바다와 언덕이 한눈에 담기는 풍경이 무척 색달랐다.
내게 비단결처럼 부드럽고 솜털만큼 포근했던 기억으로 남아 있는 나릿골은 그곳 사람들에게는 치열한 삶의 현장이기도 하다. 최근 그곳을 감성마을로 만드는 계획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이 앞섰다. 그 소식을 들으니 벽화로 유명해진 동네 주민들의 고충을 보도하는 뉴스가 떠올랐다. 사람들이 오랫동안 살고 있었고 지금도 평범한 일상이 이루어지는 동네에 흥미로운 벽화를 그려 환경을 개선하겠다는 취지는 좋았지만, 그로 인해 외지인 관광객들이 몰려들어와 주민들의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삼척이 그렇듯 나릿골 언덕에도 흔치 않은 그곳만의 분위기와 색깔이 있다. 천편일률적인 이벤트성 활성화보다는 일상이 잘 영유되며 동네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색깔을 찾아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 바다와 산이 맞붙어 있고, 역사와 자연이 맞붙어 있는 삼척이 그 본연의 모습을 잃지 않고 잘 간직하면 좋겠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이사부는 쉽게 항복하지 않는 우산국 사람들에게 말을 듣지 않으면 이 짐승들을 풀어놓겠다고 위협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삼척항에는 이사부광장이 있고 그곳에는 트로이의 목마 같은 커다란 나무 사자 한 마리가 멀리 울릉도 쪽을 바라보며 웅크리고 앉아 있다.
삼척에는 원래 조선시대에 왜구를 막기 위해 만든 군사기지가 있었다. 당시의 이름은 정라진이었다 한다. 그곳이 1915년 91m 길이의 방파제를 건설하는 대규모 축항 사업에 의해 삼척항으로 다시 태어난다. 일제강점기에는 석탄을 수출하는 항구였으며, 남한 최초의 시멘트 공장이 생겨 동해안에서 제일 큰 항구로 명성을 떨치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산업의 구조가 바뀌고 항구의 기능들이 인근으로 많이 분산되어 이제는 예전에 비해 퍽 한적한 항구가 되었다.
삼척은 마치 시신경의 맹점처럼 강릉과 울진 사이에 끼어 있어, 굳이 찾아가기엔 참 애매한 거리에 있다. 서울에서 동해를 향해 떠나면 그 발걸음이 강릉이나 묵호항에서 멈추고, 남쪽에서 7번 국도을 타고 올라가더라도 영덕이나 울진, 기껏해야 죽변항까지 올라가다 그친다. 그 묘한 경계에 있는 도시가 삼척이다.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곳이지만 바꿔 생각하면 청정하고 사람이 북적거리지 않아서 좋은 곳이기도 하다. 나는 예전에 부산에서 속초까지 바다 옆으로 난 길인 7번 국도를 타고 일주하다, 임원·용화·장호로 이어지는 삼척의 작고 아름다운 바닷가 풍경에 매혹되어 일정에서 벗어나 그곳에 머물렀던 적이 있었다. 나를 잡아끈 것은 호방한 듯하면서도 압도하진 않는 크기를 가진 삼척만의 묘한 분위기였다.
그렇게 삼척을 처음 알게 되었는데, 이후 신혼여행 때도 들르고, 여름휴가 때도 들르고, 출장길에도 일부러 들른다. 성수기의 혼잡은 잘 모르겠지만, 내가 갈 때마다 그 바닷가 모래사장에 사람은 거의 없다. 다만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새들과 파도에 실려 오는 바닷물의 거품을 보며 마음에 여백을 만들어내곤 했다.
목적 없이 여행으로 다니기만 하던 삼척에, 몇 년 전 일이 생겨서 들락거린 적이 있었다. 영동고속도로를 통해 삼척시로 들어간 것은 사실 그때가 처음이었다. 마치 정장을 입고 머리를 단정히 하고 거래처에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늘 멀리 돌아 천천히 경치 구경하며 다니던 국도가 아닌, 중간이 생략되고 풍경이 압축된 고속도로라는 효율적인 길이어서 그랬다.
어느 날 점심시간에 삼척에 도착했다. 갈 때마다 먹는 것은 늘 대충대충 때웠기 때문에 마땅히 식사할 곳이 떠오르지 않아 일단 삼척항으로 갔다. 내가 늘 다니던 곳은 외딴 바닷가나 한적한 산속이었는데, 삼척항은 훨씬 붐빌 테니 선택지가 많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나의 기대와는 달리 삼척항은 그리 크지 않았다. 길 변에 크고 작은 일반적인 포구의 식당들이 죽 도열하고 있었는데 어디로 들어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관광객 겨냥한 듯한 번지르르한 식당들을 지나 이 동네 사람들이 주로 다닐 법한, 외관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은 허름한 집을 찾아들어 갔다. 앉아서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마침 앞 테이블에 앉아 있던 손님이 외지인의 행색을 눈치챘는지 우리에게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여기 처음 오셨나 봐요? 어떻게 여길 알고 오셨나요?"
역시 이 집은 동네 사람들만 주로 오는 식당이라며, 여기선 그냥 회덮밥을 시키면 된다기에 그렇게 했다. 싱싱한 회가 푸짐하게 덮여 있는 양푼이 나왔고, 따로 시키지도 않았는데 본 메뉴 이상으로 푸짐하게 끓인 매운탕이 따라나왔다. 맛과 양에 비해 가격은 무척 소박해서 더욱 감동이었다.
식당 뒤로는 언덕이 있었고, 그 위로 집들이 들어차 있었다. 그리고 멀리 보이는 언덕에는 더 많은 집과 그 사이사이를 감아 올라가는 길이 보였다.무언가에 홀리듯 비탈을 따라 올라갔다. 나릿골이라는 이름의 동네는 여느 항구 언덕처럼 평범한 집들과 골목으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시간의 흔적이 잘 남아 있었고 바다와 언덕이 한눈에 담기는 풍경이 무척 색달랐다.
내게 비단결처럼 부드럽고 솜털만큼 포근했던 기억으로 남아 있는 나릿골은 그곳 사람들에게는 치열한 삶의 현장이기도 하다. 최근 그곳을 감성마을로 만드는 계획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이 앞섰다. 그 소식을 들으니 벽화로 유명해진 동네 주민들의 고충을 보도하는 뉴스가 떠올랐다. 사람들이 오랫동안 살고 있었고 지금도 평범한 일상이 이루어지는 동네에 흥미로운 벽화를 그려 환경을 개선하겠다는 취지는 좋았지만, 그로 인해 외지인 관광객들이 몰려들어와 주민들의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삼척이 그렇듯 나릿골 언덕에도 흔치 않은 그곳만의 분위기와 색깔이 있다. 천편일률적인 이벤트성 활성화보다는 일상이 잘 영유되며 동네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색깔을 찾아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 바다와 산이 맞붙어 있고, 역사와 자연이 맞붙어 있는 삼척이 그 본연의 모습을 잃지 않고 잘 간직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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