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신우칼럼] 국가 지도자로서의 황교안 카드
북핵은 한반도 게임 체인저 역할
체제 안보와 자유민주주의 가치
대선의 해인 내년 핵심의제 될 것
- 이신우 논설위원
- 2016-09-22 19:09:09
- 사내칼럼
내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우리 사회에 거대한 포퓰리즘(대중인기영합주의)의 쓰나미가 몰려오고 있다. 어떤 정치인은 수십만원짜리 복권 수당으로 청년들을 유혹하고 어떤 정치인은 여성용 생리대를 공짜로 나눠주겠다며 웃음을 판다.
어떤 정치인은 모병제로 바꿔 사병 월급을 200만원으로 올리겠다고 열변을 토한다. 군인은 적으로부터 나라와 국민을 지키는 전사(戰士·warrior)로 무장해야 한다. 그런데도 이 정치인은 군대를 일자리 창출 수단으로 활용하자는 망언마저 서슴지 않는다.
정치가 이토록 타락한 데는 여러 원인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그중 하나가 보수·우파 집권 10년에 이념적 정향이 바뀔 때가 됐다는 정략적 판단에 따라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이념 틀에서 발을 빼고 진보·좌파 테제로 갈아타려는 집단적 변신 신드롬이다.
하지만 이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다. 그들은 체제 안보와 자유민주주의 가치가 붕괴할지 모른다는 존재적 공포가 보수·우파의 강력한 추동력이라는 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잖아도 지금 한반도는 전에 없는 격동의 소용돌이로 빠져들고 있다. 북한 김정은의 5차 핵실험은 남과 북이 퇴로 없는 대결의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음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핵무장을 둘러싼 남북과 미북 간의 대립 심화에 미국의 신고립주의까지 겹치면서 동북아 정치에서의 특이점이 대통령 선거가 있는 내년에 집중적으로 전개될 것으로 전망된다. 필자가 체제 위기나 자유민주주의 수호의 관점에서 황교안 현 국무총리에 관심을 갖는 이유다.
지금 우리에게는 기름 장어 같은 테크노크랫이 아니라 난세에 정면으로 맞설 수 있는 장수(將帥)가 요구되는 때다. 누군가 말했듯 금수저로 태어나 흙수저 코스프레하는 사람, 개혁 운운하며 얼치기 좌파 노릇하는 사람이 아니라 돌멩이나 날계란이 날아와도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키면서 국민 모두에게 안심감을 심어줄 수 있는 국가 수호자를 찾아야 할 시점이다.
많은 정치공학자들이나 언론의 내년 대선에 대한 분석과 전망에서 ‘황교안 카드’는 철저히 평가절하당하는 편이다. 뚜렷한 정치 기반이 없는데다 한국이라는 특수한 지역 판도에서 지연(地緣)의 이점을 갖추지 못했다는 지적이 대부분이다. 과연 그런가. 다행히도 지연이라는 용어는 색깔이 바래가는 구시대의 정치 명제일 뿐이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충청 대망론’에 올라타고 있다지만 그런 구도는 이미 두 명의 대통령이 세종시라는 이름으로 우려먹은 바 있다. 유권자들에게 한 번 더 설득 당하는 척 해달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구태의연한 선거 전략이다. 흔히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하지만 성공 역시 실패의 어머니일 뿐이다. 기존의 성공 방정식에 사로잡혀 그것만이 정답이라고 주장하는 정치공학자들의 해석 능력을 크게 기대할 것이 없다는 이야기다.
언론의 판세 분석에도 굳이 현혹될 필요가 없다. 불행히도 지난 수십년간의 선거 판세 보도에서 언론이 제대로 과녁을 맞힌 적은 별로 없다. 그럼 언론은 이런 실수나 오판을 어떻게 분식해왔을까. 선거 다음날 수많은 신문·방송의 톱뉴스 제목을 유심히 살펴보라. 하나같이 “역시 국민의 선택은 현명했다”였다. 늘 그래왔듯 앞으로도 여전히 그럴 것이다.
전쟁과 마찬가지로 대선 역시 대의명분과 세력이 다투는 것이다. 내년 선거의 세력 구도를 대략이나마 예상해본다면 박근혜 대통령 캠프와 이전 대선에서 맞붙었던 문재인 캠프로 수렴되는 추세다. 정계 일각에서 제3지대론이 거론되고 있지만 여전히 실체는 모호하다. 설령 세력화에 성공한다 해도 명분이라는 접착제가 없는 한 그저 전야제나 장식할 가능성이 크다.
일정한 세력을 확보하고 있는 박근혜 캠프가 황교안 카드를 수용한다면 전쟁에 나갈 장수와 군대가 갖춰진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조건들이 충족된다면 기성 정치인들의 ‘정치 흉내 내기’ 앞에서 갈 길을 잃은 채 방황하고 있는 보수·우파 유권자들도 다시금 집단 에너지를 응축, 폭발시킬 수 있다.
안보 없는 경제란 그 자체로 성립 불가능한 명제다. 국민으로서는 누가 나를 지켜줄 수 있는가를 묻는 게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 그들에게 ‘누가 여러분을 지켜줄 수 있는가’라고 물으면 된다. shinwoo@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