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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근히 열 깃든 설렁탕, 한 그릇 해치우면 온몸에 힘이…

산야초 2016. 11. 10. 23:42

[Why] 뭉근히 열 깃든 설렁탕, 한 그릇 해치우면 온몸에 힘이…

  • 정동현 대중식당 애호가  

입력 : 2016.11.05 03:00 | 수정 : 2016.11.08 10:34

[정동현의 허름해서 오히려] 서울 명동 '미성옥'

가나고시원은 학원 건물 꼭대기에 있었다. 수능을 치르고 논술과 면접을 준비하려고 서울로 와서 고른 숙소였다. 숙박비는 12박에 10만원이었다. 고시원 구석 작은 방의 가구라고는 벽에 붙은 책상 하나뿐이었다. 의자를 책상 위에 올리고 그 밑으로 발을 뻗어야 몸을 누일 수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또래 애들과 둘러앉아 말싸움을 하고 오후엔 빈 종이를 붙잡고 글자를 끄적였다. 밤이 되면 서울 사는 애들은 강남이니 잠실이니 하는 곳으로 떠났다. 머리가 반쯤 벗겨진 학원 원장은 밥때를 놓친 고시원 숙박생들을 데리고 설렁탕 집에 갔다. 원장은 매번 "많이 먹으라"고 말하곤 값을 치르고 먼저 나갔다. 설렁탕으로 배를 채우지 않고는 얇은 벽 틈으로 타인의 숨소리가 들리던 추운 밤을 이겨낼 수 없었다. 그때 나는 열흘 남짓 설렁탕을 먹으며 서울 물이 들었다.

서울을 대표하는 음식인 설렁탕의 정확한 기원은 불분명하다. 임금이 제사를 지내던 선농단(先農壇)에서 이름이 비롯되었다는 설은 글자를 짜맞춘 '설'에 불과한 것 같다. 1900년대 이후 서울에서 본격적으로 설렁탕을 팔기 시작했다는 기록은 여럿이다. 현진건 소설 '운수 좋은 날'에서 인력거꾼 김 첨지가 끝내 아내에게 먹이지 못한 음식이 설렁탕이었다. 그 유명세로 장난질도 많이 당했다. 뿌옇게 흐린 국물이 뼈에서 나온 게 아니라고 사람들은 수군댔다. 시간이 흘러 어느덧 평양냉면 맛을 논하는 것이 유행인 시대가 되었다. 설렁탕은 그 기세가 예전 같지 않다.

한 집 걸러 있는 화장품 가게를 빼놓고는 홍콩과 별반 다를 게 없는 명동 거리 뒤편, 명동예술극장 옆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면 50년 넘게 설렁탕을 파는 '미성옥'이 있다. 그 집에 들어가 앉으면 설렁탕의 기세가 주춤해진 것이 실감 난다. 넓은 실내 때문인지 예전만 못한 손님 탓인지 늘 자리가 남는다. 그럼에도 새벽 6시 문을 열고 밤 10시에 문을 닫는 길고 긴 영업시간은 변함없다. 탁자는 잘 닦아 반들거리고 점원은 빠르고 절도 있는 움직임으로 음식을 내놓는다. 여럿이 왔다면 한우 고기를 삶아낸 수육을 먹는 것이 좋다. 작은 것이 3만원, 대자가 4만원으로 싸게 느껴지지는 않지만 한우 시세를 알고 조리한 솜씨를 느낄 수 있는 객(客)이라면 수육 주문한 것을 다행으로 여길 것이다.

이 집이 견뎌낸 세월이 허명(虛名) 아닌 것은 설렁탕(보통 1만원, 특 1만2000원·사진)으로 증명된다. 국물은 흐리지만 맑고, 미지근하지만 뭉근히 깊은 열이 깃들었다. 여기에 하얀 쌀밥을 훌훌 말고 달달하고 간간하며 아삭한 듯 몽글한 깍두기와 김치에 에누리 없이 한 그릇을 해치우게 된다. 첫술은 가볍지만 마지막 술은 무겁게 끝난다. 계산을 치르고 나서면 괜스레 어깨를 쭉 펴게 된다. 온몸에 힘이 돌기 때문이다.

날이 더 짧아지고 혹독히 추워지면 설렁탕 한 그릇에 의지하는 이가 더 많아질 것이다. 어둠 속에 하루를 시작하고 마감하는 사람들을 위해 이 집도 늘 문을 열고 있을 것이다. 그 문틈으로 비친 백열등 빛은 매일 조용히 손님을 부른다. 두툼한 손으로 어깨를 토닥이듯 담담한 국물은 고시원 시절 나에게 그랬듯 오늘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많이 드시라. 더 드시라. 그리고 힘내시라.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