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트리 산행 | 화악산 르포] 제왕의 산에 울리는 크리스마스 캐럴
입력 : 2016.12.13 13:09
조무락골~중봉~언니통봉~조무락골 15km 원점회귀 산행,
중봉 부근이 경기도 최대의 구상나무 자연군락지
능선은 좀처럼 가까이 오지 않았다. 낙엽이 다 떨어진 앙상한 산을 찾는 이는 없었다. 산을 채운 건 맑은 공기와 바람 소리뿐. 낡은 등산화와 잘 어울리는 외로운 산을 올랐다. 잡념도 거친 숨결 속에 지워지고, 언젠간 끝나겠지 하며 걷던 센 비탈에서 기품 있는 그를 만났다. 초록색을 띤 채 곧게 뻗은 기품 있는 나무, 구상나무다. 문득 얼굴에 차가운 무언가가 와 닿는다. 순식간에 구상나무는 하얀 장식을 매단 크리스마스트리가 되었다. 첫눈이 내리고 있었다.
12월 크리스마스 시즌을 맞아, 크리스마스트리로 유명한 한국 토종 구상나무 산행을 하기로 했다. 대표적인 자생지는 한라산, 지리산, 덕유산. 산 좀 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본 산이라 다른 곳을 찾던 중 화악산이 떠올랐다. 오래된 월간<山> 등산지도에 구상나무 군락지라 표시되어 있을 정도로 화악산 중봉은 등산인들에겐 이미 알려진 구상나무숲이다. 다만 학계에선 덕유산 이남의 고산에 자생한다고 알려져 있어, 검증이 필요하다. 구상나무와 구별이 어려울 정도로 비슷한 분비나무일 확률도 높기 때문이다.
들머리는 조무락골. 계곡으로 중봉에 올라 능선을 타고 언니통봉을 거쳐 조무락골로 내려오는 원점회귀 코스다. 보통 석룡산 조무락골이라 부르는데, 화악산과 석룡산 사이의 골이지만 조무락골로 석룡산을 오르는 이가 더 많아서 그리 굳어졌다. 남들이 잘 가지 않는 길로 간다. 동행한 이는 등산을 즐기는 숲해설가인 석지영씨다.
골짜기를 따라 임도마냥 너른 산길을 오른다. 손님이 떠난 잔칫집처럼 낙엽이 수북하게 설거지마냥 쌓였다. 옛날 이 골짜기에는 호랑이들이 득실댔다고 한다. 여름이면 폭염에 지친 호랑이들이 폭포 아래 바위에 엎드려 더위를 씻었다는 말도 전해지는데 복호동(伏虎洞)폭포 역시 이로 인해 유래한다. 야윈 물줄기를 뿌리는 폭포는 화려하지 않지만 잠깐 숨 돌릴 수 있는 볼거리다.
드라마 속 한 장면처럼 만난 첫눈
조무락골을 버리고 중봉 쪽 이정표를 따라든다. 부드러운 산길도 여기까지다. 경기도 최고봉이 그 힘을 드러내며 체력을 시험한다. 가파른 산길이 밀려와 잡념을 삼켜버린 찰나, 눈발이 날린다. 잔뜩 흐린 하늘에 비가 오지 않을까 걱정했던 마음이 녹아내린다. 첫눈이다.
빈 가지만 나부껴 황량하던 화악산이 화이트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바뀌었다. 기품 있는 구상나무 위로 사르륵 사르륵 눈이 내리고,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던 일행들의 얼굴도 환하게 바뀌었다. 캐럴 소리가 들릴 것 같은 낭만적인 구상나무숲으로 변한 것이다.
구상나무는 신갈나무, 잣나무와 함께 자란다. 구상나무로만 빽빽했다면 훨씬 볼 만했겠지만 다른 나무와 함께 자라는 숲이라 더 건강하다. 한 가지 해충이나 재해에 숲이 몰살당하지 않는 강한 생존력을 갖추었다. 구상나무와 분비나무 구별은 수목학과 교수들도 쉽지 않다. 결정적 단서는 열매의 껍질 부위가 뒤로 젖혀진 것인데, 열매가 없어 구분이 어렵다.
1,400m가 넘는 주능선에 이르자 도사 같은 구상나무가 곳곳에 있다. 크리스마스트리로 꾸미기 아까운, 칼바람 맞으며 한 세월을 버틴 전설 같은 나무들이 도도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툭 튀어나온 바위에 올라서자 구상나무숲 너머로 첩첩산중이 아득하게 펼쳐진다. 흰 종이에 검은 먹만으로 그려낸 대가의 단순명료한 산그리메가 망막을 지나 가슴속으로 방울방울 스며든다. 거친 바람 소리가 화악산 주릉을 휘감는다. 산이 우리를 부르고 있다. 제왕의 칼바람 속으로 들어갈 시간이다.
화악산은 경기도의 제왕이다. 1,468.3m로 가장 높고 덩치도 웅장하다. 위성봉도 숱하게 거느리고 있으니 걸출한 장군들과 수많은 병사를 거느린 경기도의 군주격 산이다. 하지만 정상의 군부대로 인해 산행지로는 인기가 없다. 중봉(1,446m)은 등산인들의 정상이다. 통제되어 있어 더 이상 갈 수 없다. 데크에 올라서자 속 시원한 경치가 빵 터진다. 꾸역꾸역 비탈길을 올라온 인내의 땀을 한방에 날려버린다.
강원도와 경기도의 산줄기가 동시에 드러난다. 흘러내린 능선의 결을 따라 낙엽송이 노랗게 물들어 예쁜 반점을 이루었다. 구상나무는 드문드문 꼿꼿한 자세로 초록 잎을 틔우고 있다. 초소의 사병들은 혹시나 카메라를 시설물 쪽으로 돌릴까봐 전전긍긍이다. 인사를 하고 하산한다.
적목리로 이어진 서쪽 능선에 몸을 던진다. 고도를 뚝뚝 떨구던 산길은 간간이 언니통봉(928m), 749.7m봉 같은 봉우리를 세워 근육을 골고루 쓰도록 유도한다. 고도를 내려서인지 눈이 비로 바뀌었다. 재미있는 이름의 언니통봉은 유래를 알 수 없다. 터지는 경치도 없어 바로 지나친다. 2시간을 넘게 고도를 내렸지만 능선은 여전히 오르내림을 끝낼 생각이 없다. 날은 벌써 어둑하고 빗방울은 굵어진다. 749.7m봉을 지나 안부에서 조무락골로 방향을 튼다. 조무락골 방향으로 이정표는 없지만 매달린 표지기를 믿고 간다.
빨리 산을 떠나려는 마음을 제왕에게 들키고 말았다. 길이 점점 희미해지더니 낙엽송 숲에서 사라졌다. 어차피 계곡만 따라가면 되는 짧은 코스라 막무가내로 뚫고 내려가면 되지만, 숲이 걸음을 세운다. 쓰러진 거대한 낙엽송마저 부드러운 이끼로 치장한 비밀의 계곡, 시간과 공간이 바뀐 듯한 착각이 든다. 원시 숲으로 온 듯 묘하게 공기가 바뀌었다. 다른 세계로 통하는 입구 같은 협곡을 지나자 인가가 나온다. 신비로운 느낌의 계곡을 빠져나오자 순도 높은 어둠이 깊게 깔린다. 첫눈의 추억을 만들어준 구상나무 산을 떠난다.
1468.3m
경기 가평 북면
산행 거리 14.7km
산행 시간 7시간
산행 난이도 중상(가파른 비탈길 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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