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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벽, 그 너머를 향해…

산야초 2017. 2. 3. 22:47

빙벽, 그 너머를 향해…

처음엔 악다구니 쓰는 발톱처럼 보인다. 100m짜리 수직 빙벽 앞에 섰을 때, 그것이 뿜어내는 한기(寒氣)에 앞서 마주하게 되는 건 황당함.
최근 개장한 국내 최대 인공 빙벽장 강원도 원주 판대 아이스파크. 빙폭이 넓고 높이가 다양해 초보부터 고수까지 모두 모이는 곳이다. 겁을 상실하는 방식으로 겨울을 난다.

    입력 : 2017.02.02 04:00

    국내 최대 100m 빙벽
    원주 판대 아이스파크
    빙폭 넓고 높이 다양해
    초보부터 고수까지
    평일에도 50여명 북적

    저걸 일으켜세운 건 공포였을 것이다. 추락을 앞두고 하악(下顎)도 못 닫은 채 그대로 질려버린 것. 두부외상을 피하려 스스로 수직이 된 물을 본다. 빙벽(氷壁), 물의 혈관에 갇힌 기포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다.

    지난 25일 강원도 원주 판대 아이스파크의 수직 빙벽을 사람들이 오른다. 손으로 발로 얼음을 찍어 누르며 스스로의 고도(高度)를 올린다. 근처 삼산천을 양수기로 퍼올려 절벽을 얼린 이 인공 빙벽장은 40m짜리부터 최대 100m 코스까지 갖춰 경력 불문 인기가 좋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지난 25일 강원도 원주 판대 아이스파크의 수직 빙벽을 사람들이 오른다. 손으로 발로 얼음을 찍어 누르며 스스로의 고도(高度)를 올린다. 근처 삼산천을 양수기로 퍼올려 절벽을 얼린 이 인공 빙벽장은 40m짜리부터 최대 100m 코스까지 갖춰 경력 불문 인기가 좋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공포가 인간을 일으킨다.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 이 직립의 종족이 수평의 본능을 찍어 누르며, 조금씩 안정에서 멀어지며 중력 반대 방향으로 기어오른다. 겁을 조금씩 상실하는 방식으로 겨울을 난다. 혈관이 뜨거워진다.

    처음엔 악다구니 쓰는 발톱처럼 보인다. 100m짜리 수직 빙벽 앞에 섰을 때, 그것이 뿜어내는 한기(寒氣)에 앞서 마주하게 되는 건 황당함. 대체 이런 위험한 짓을 왜 하는 거지? 최근 개장한 국내 최대 인공 빙벽장 강원도 원주 판대 아이스파크. 빙폭이 넓고 높이가 다양해 초보부터 고수까지 모두 모이는 곳이다. 평일인 지난 25일에도 얼음꾼 50여명이 북적이고 있다. 머리 희끗한 노년도 상당수. 신발에서 얼음을 털어내고 있는 이용대(80) 코오롱등산학교 명예교장도 보인다. 얼음의 기립근이 단단해지자 몸이 근질근질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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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 최대 인공 빙벽장 강원도 원주 판대 아이스파크. 머리 희끗한 노년도 상당수 보인다.

    "낙빙!" 누군가 빙벽 위에서 외치자 주변 사람들이 돌림노래처럼 소리를 질러댄다. 몇 초 뒤 쿠지직 살벌한 소음을 내며 얼음 조각이 떨어져내린다. 바위 수준 얼음이 부서지며 산탄총처럼 얇은 파편을 날린다. 엄지에 살짝 스쳤을 뿐인데 피가 퐁퐁 솟는다. 옆에 있던 산악인 고철주(55)씨가 "낙빙에 헬멧이 부서져 기절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더욱 황당해지기 시작한다.

    외국인도 보인다. 영국에서 출장 왔다가 짬을 내 들렀다는 리처드 커스버트(42)씨가 "빙벽 등반은 일종의 명상"이라며 엄지를 추켜올린다. "추락하면 안 되잖아요. 감정을 조절하며 오로지 다음 스텝에만 집중하게 되는 거죠." 맑은 영하의 날씨, 조건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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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음꾼 중엔 의외로 여성이 상당수. 주부부터 손녀를 둔 할머니까지 연령대도 폭넓다. 대부분 등산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뒤 실습 차원에서 도전한다. 이용대 코오롱등산학교 명예교장은“운동신경 좋은 사람은 일주일 정도 교육 받으면 무리 없이 야외 빙벽을 오를 수 있다”고 했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추운 데다 응달이어서 배가 덜덜 떨린다. 밑에서 떠느니 한 번 올라가 보기로 한다. 헬멧을 쓰고, 장갑을 끼고, 빙벽화 밑에 아이젠을 채운다. 이어 안전벨트를 차고, 거기에 로프를 묶어 안전을 확보한다. 선등자(先登者)가 빙벽에 아이스 스크루를 박아 고리에 연결해 둔 로프다. 이제 아이스바일(등반용 얼음 도끼)까지 양 손에 쥐었으니 준비는 완료. 고씨가 "로프 매놨으니 마음 놓고 올라가보라"고 한다. 책에서 본 게 있어 이번엔 당황하지 않는다.

    등반 자세는 크게 'X바디'와 'N바디'가 있다. 'X 바디'는 양손과 양발을 각각 수평으로 같은 높이에 둬 X자를 만드는 것으로, 안정적인 반면 속도가 느려 체력 소모가 크다. 그래서 대부분 'N 바디' 자세를 쓴다. 아이스바일을 든 양손에 높이 차를 둬 몸을 N자로 만드는 것이다. 첫 발을 떼고 2m쯤 올랐을 뿐인데, 불안이 엄습한다. 몸은 곧 M이 됐다가 W가 됐다가 알파벳을 초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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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령은 단순하다. 아이젠 앞 발톱으로 얼음을 찍어 하체를 받치고, 아이스바일을 높이 타격해 한 걸음씩 올라서면 되는 것이다.

    요령은 단순하다. 아이젠 앞 발톱으로 얼음을 찍어 하체를 받치고, 아이스바일을 높이 타격해 한 걸음씩 올라서면 되는 것이다. 발톱을 얼음에 박을 땐 뒤꿈치를 너무 많이 들어 올리지 않는 게 좋다. 등산화 앞부분이 먼저 빙벽에 닿아 발톱이 빗나가기 쉽기 때문에 가볍게 끊어 찍어 걸친다는 느낌으로 하면 된다. 축구공을 후려차듯이 세게 발길질할 필요는 없다. 발의 진자운동을 작게 해 발톱을 빙벽과 수직이 되도록 '콕' 찍는 게 힘을 아끼는 요령. 얼음은 오목한 곳을 공략하는 게 편하다. 세게 찍으려 하기보다는 정확하게 찍는 느낌을 기억할 것. 아이스바일은 찔끔찔끔 찍지 말고 높이 찍어서 쭉쭉 올라갈 수 있게 한다. 얼굴 근처에 아이스바일이 있으면 다칠 위험이 크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20분이 지나갔다.


    빙벽엔 정해진 루트가 없다. 오르고 싶은 방향으로 종횡을 오가면 된다. 얼음의 얼굴은 제각각. 고난도 돌출부 '오버행'(over hang)과 얼음이 얼기설기 엮인 '샹들리에', 그리고 일명 '썩은 얼음'도 있다. 부서지기 쉬운 이런 박빙엔 매달릴 생각을 하면 안 된다. 그냥 부숴서 떨어뜨릴 것. 등반 내내 '떨어지면 안 되는데…' 이 생각뿐이다. 불안하니 날이 제대로 박혔나 싶어 계속 도끼질을 해대고, 타격할 만한 지점이 자꾸 줄어든다. 소심해지니 발도 잘 안 떨어진다. 발을 옮길 땐 시선이 발을 향해야 한다. 시야 확보를 위해 몸을 얼음 쪽에 너무 붙이지 말고, 상체와 엉덩이를 젖혀서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 로프가 있어도 공포 때문에 몸이 바짝 언다. 뭐든 자세가 안정되려면 일단 마음의 여유가 필요한 법. 부지런히 몸을 놀린 것 같은데 겨우 10m쯤 올라왔다. 기분이 나쁘지 않다.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허기를 채울 겸 가방을 뒤적이다 보니, 주변엔 땀을 뻘뻘 흘리며 라면에 소시지에 삼겹살까지 굽는 팀도 있다. 추위에 벌겋게 된 얼굴이 홍조처럼 뜨거워보인다. 올해 처음 빙벽 등반을 시작했다는 주부 전명숙(45)씨가 "이 재미는 딴 데선 못 찾는다"고 한다. 겨울만 기다렸다니 오죽할까.

    ◇ 추천 빙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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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악산 토왕성폭포./ 조선일보DB
    가래비 도락산 옛 채석장 터에 형성된 자연 빙벽. 길이 40m. 초·중급 코스. 서울 근교라 접근성이 좋다.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가납리 산5.

    토왕성폭포 외설악에 자리한 자연 빙벽의 끝판왕. 국내 최대·최장·최고 난도를 자랑한다. 길이 320m. 강원도 속초시 설악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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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천 딴산 빙벽(사진=화천군) / 춘천 구곡폭포(사진=한국관광공사)

    구곡폭포 봉화산 자연 빙벽. 길이 65m. 급경사라 중·상급자용 코스. 대개 이곳에서 훈련한 뒤 난도 높은 대형 빙폭을 오른다. 강원도 춘천시 남산면 강촌리 432.

    딴산 강원도 화천군 딴산유원지 내 인공 빙벽. 길이 70 m. 초·중·고급 코스. 강원 화천군 간동면 구만리.

    청송 얼음골 오버행, 고드름, 완경사 등 여러 형태를 탈 수 있는 인공 빙벽. 길이 65m. 영남 최대 규모로 매년 전국 빙벽 등반 경기가 열린다. 경북 청송군 부동면 내룡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