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고서화

궁여들의 녹봉은 얼마였을까

산야초 2017. 2. 12. 23:48

궁녀란 좁게는 상궁과 내인을 말하고
    넓게는 무수리나 비자같은 하녀들까지 포함된다.
    그렇다면 궁녀의 녹봉은 얼마 였을까. 


 
월급 지급

  궁녀들은 관리였으며 녹봉을 받았다
   태조실록에서 그 기록을 찾을 수 있었다.

   궁녀들은 매월 정기적인 보수로 쌀 세말
   그외 옷감 등도 특별히 하사 받았다.
                                     

   1896에 쓰여진 궁중예산서가 바로 그것이다

   여관봉급- 이백사십원.
   대전 소속 궁녀들에게 지급할 봉급 총액이다
   이때 궁녀들은 돈으로 월급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월급 명세서

  궁녀들의 봉급은 어느 정도나 됐을까
   우리는 앞의 자료와 연구 논문를 근거로 
   순종때 지급됐던 궁녀들의 월급 명세서를 
   재구성할 수 있었다                    

 당시 가장 높은 보수였던 196원은 
 지금의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얼마나 될까
                            
 당시 경제 상황이 고려돼야 하기 때문에
 화폐 자체로는 과거와 현재 돈의 가치를  정확히 환산할 수는 없다.

 우리는 1926년의 80킬로그램에 해당하는 
 쌀가격과 현재의 쌀가격을 기준으로 비교할 수  있었다.
                                     
 쌀가격 기준으로 환산했을 때  그당시 1920년
 대 당시는 20원 했다 99년말 현재 15만9천원 상회했기 
 때문에 그것을 기준으로 했을 때
 1926년에 196원은 오늘날 150만원을 상회  한다고 할 수 있겠다"

 *체계적이었으며 월급까지 받았다*

 

-궁내부 비예산 명세서 

 

  궁녀들은 맡은 업무와 연차에 따라 월급이달랐고 품계에 따라 월급이 차등 지급됐다

  실제로 궁녀는 조선왕조에서 정식으로 월급을 받는 소위 여성 공무원이라고 할 수 있다

  또그들을 전문직여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어려서부터 궁궐에 들어와서 자기가 맡은

  일을 평생토록 하는데 특히 왕실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수준 높고 체계있는 자기의 전문

  영역을 개발할 수 있게 되는거다."

 

-서류 여관 봉급

 

  궁녀-그들은 국가에서 월급을 지급 받았던공무원이었으며 전문직 여성들이었다

  여성에겐 관직의 길이 열려 있지 않았던 남성 중심의 조선 사회에서 궁녀가 여성

  관리였다 는 사실은 잘 모르셨을 거다.

 

 

-궁녀들의 주된 근무 공간-소주방 

       

    조선시대 후기에 그려진 궁궐의 평면도인
    동궐도형에서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동궐도형에는 소주방이라고 하는 곳이 여러
    군데 보여서 임금의 수라상을 마련하거나 
    아니면 궐내의 잔치때 잔치 음식을 마련하는
    곳들이 많이 분포돼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궁녀의 일

 

    궁녀들은 주로 의식주에 관계된 일을 주어진
    역할에 따라 분담해서 일했다.

    수라간

    아침, 저녁 수라와 잔치 음식 등을 준비하는 
    일은 궁녀들이 맡은 중요한 업무 중의 하나다.
                                     

    이자리는 왕과 왕비의 침전이었던 그                                      
    대조전의 서쪽 행각 바깥에 있는 것으로서 
    원래 임금님의 수라상을 마련하던 소주방이있던 자리이다.

    그런데 1917년 외정때에
    불타고 나서 다시 지으면서 서양식으로                                      
    개조돼 있기는 하나 여전히 임금님의 수라상을
    마련하던 곳이었고 그 수라상을 마련하던 궁중                                      
    나인들이 잠자던 곳이 바로 이옆에 있는 방
    온돌방이었던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대조전은 창덕궁에서 가장 내밀한 왕비의 생활 공간이다

    왕과 왕비가 잠을 자는 대조전의 침전에 궁녀들의 특별한 업무가 있다

    왼쪽 방문열리고 들어가면 중앙의 큰방은 왕과 왕비의 침전이고
    그 둘레에는 여러개의 작은 방이 있다.침전을 둘러싸고 있는 이 작은 방에서 
    궁녀들은 숙직을 섰던 것이다. 각각의 작은 방에 한명씩 들어가 숙직을
    섰는데 그곳에 이부자리를 두지 않았다. 왕과 왕비가 함께 잘때는 노상궁들이 숙직을
    섰고 젊은 궁녀들의 접근은 금지됐다
                                     


숙직과 부서

1. 지밀

   숙직은 지밀에서 했다
    지밀이란 말 그대로 가장 지엄하고 중요하여
    말한마디 새어 나가지 못한다는 뜻이다.
    왕과 왕비가 거처하는 침전과 안사랑 대청등이
    있는 곳에서 근무하며 왕과 왕비를 보필하는
    가장 중요한 업무를 맡은 핵심 부서가 
    지밀이다

2. 침방                 

   왕과 왕비의 옷, 이부자리 등을 만드는 부서이다.
                                    

3. 수방

   의복과 장식물에 쓰이는 수를 놓는 부서이다.

4. 생과방                      

   음료와 과자를 만드는 곳인 생과방이 있다.

 

5. 세수간                      

   세수간에선 세숫물과 목욕물을 준비하는 일을 전담한다. 내전 청소도 이들의 임무다

 

6. 세답방                      

   빨래와 그 뒷손질을 담당하는 세답방까지 궁녀들은 각 부서별로 일했다.

 

   침전 일과 주변에 주로 수라간을 중심으로 해
    서 침방이라든지 수방이라든지 또 생과방
    이라든지 하는 궁녀들의 작업실들이 배치돼 
    있었던 것으로 된다"

               
궁녀의 수는 얼마나 될까

 

    영조때 이익의 성호사설에 궁녀는
    육백팔십사명이라는 기록이 있다.

    영조실록에도 궁녀의 수를 적어 놓은
    기록이 있다

    대전에서 세손빈궁 시녀수12
    대전 및 각전궁의 궁녀는 다 합해서 480명- 
    이들 기록을 통해 조선시대 궁녀는 5백명에서
    6백명에 이르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대전회통

    대전 회통에 의하면 '궁녀란 궁중 여관의 별칭
    으로 상궁이하의 궁인직' 이것은 즉 
    궁녀란 궁중에서 일하는 여성 관리라는 뜻이다

 

 궁녀도 직급이 있었던 것일까

 

     궁녀들은 맡은 일에 따라 품계가 나눠져 
     있었다. 경국대전에 그에 대한 기록이 있다.

     상궁후궁을 포함한 궁궐에서 근무하는 
     여성들을 내명부라고 했다

     정1품 빈이하로부터 종4품 숙원까지는 국왕의
     여자로 후궁을 말하며,
                                     
     궁녀는 정5품에서 종9품까지 10등급으로 
     나뉘며 그 업무에 따라 품계가 달랐다
                                     
      "정5품" 양반 관리하고 비교한다면  참판 
                 밑에쯤 되는 상당한 고위 관리는 아니지만 
                 중견 실무자라로서 모든 업무를 총괄하는 
                 책임자라고 할 수 있다"

 

여성 관리인 궁녀가 되는 길

 

   궁녀의 선출과 교육
    각 부서별로 그 나이가 달랐다
                                     
 
지밀
    4,5세,침방과 수방은  7,8세 그외 부서는 13세 미만으로 궁녀는 어린 나이에 뽑혀 들어왔다

    지밀은 왕의 눈에  닿기도 쉬운 자리고  제일대표 그러니까 교양도 어느면에서는 왕자 왕녀
    못지 않게 4살부터 들어와서 말 익힐때부터 후천적인 준비라고 할까 궁중에서 길러지는
    것이니까 품격이나 관습이나 모든 행동이나 이런 것들이 궁중화되어 있다고 생각했을 것.

 

궁녀의 출신 성분은 어떠했을까                                 
                             
     예종때 궁녀의 신분에 관한 기록이 있다
     한명회는 '양반 관료 첩의 딸과 양인의
     딸을 뽑자'고 했고
     신숙주는 '그때그때 임시로 선택하고 법을 미리
     정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이때만 해도 명확한 기준이 없었던 듯하다.

     그러다가 조선 중기 효종때엔 궁녀를 양가의
     딸 중에서 뽑았다

 

     조선초기에는 관청의 여자   종을 선발하기도 
     하고 기첩 소생이 궁녀로 선발되기도 했다 
     그런데 점차로 시기가 흐르면서 양가집의 
     규수들이 궁궐로 선발돼서 들어가는 경우가 
     허다하게 나타나고 그러다 보니까 민간에서 
     일찍이 궁녀로 뽑히지 않기 위해서 조혼을 
     하는 풍습도 생겨나고 그랬다"

     궁에서는 되도록이면 양가의 딸을 궁녀로
     뽑길 원했지만 폐단이 생기자 영조는 양가의
     딸을 궁녀로 뽑지 못하게 법으로 명문화시켰다.

 

 

상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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