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년 무렵 외국 잡지에 실린 숭례문의 모습으로, 두 개의 전차선이 부설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을사오적, 숭례문 성곽을 제거하자는 상소 올리다
숭례문은 조선 후기에 큰 변화를 겪게 된다. 1898년 12월에는 종로에서 용산을 잇는 전찻길이 생기면서, 숭례문 홍예를 관통하는 선로가 부설되었다. 1904년에는 숭례문 앞에서 다시 서대문으로 이어지는 또다른 선로가 부설되었다. 이로써 숭례문 홍예는 사람, 마차, 말, 전차 등이 뒤섞여 매우 복잡한 통행로가 되었고, 달리는 전차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들로 인하여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게 되는 사고가 연이어 일어났으며, 이러한 전차를 없애자거나 운행을 방해하는 일도 생겨나게 되었다. 이러한 복잡한 교통은 성곽을 철거하는 하나의 단초가 되었다.
1907년 4월 3일에 발간된 <대한매일신보> 기사에 의하면, 전차와 차마(車馬)가 다니기 편리하게 서울 성곽 동쪽과 남쪽 일부를 철훼하기로 결정하였다.
1907년에 이르러 을사오적(乙巳五賊)인 의정부 참정대신(議政府參政大臣) 박제순(朴齊純), 내부대신(內部大臣) 이지용(李址鎔), 군부대신(軍部大臣) 권중현(權重顯)등은 다음과 같은 상소를 임금에게 올리고 임금의 허락을 받았다..
“동대문과 남대문은 황성(皇城) 큰 거리와 연결되어 있으므로 사람들이 붐비고 수레와 말들이 복잡하게 드나듭니다. 게다가 또 전차(電車)가 그 복판을 가로질러 다니기 때문에 서로 간에 피하기가 어려워 접촉사고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교통 운수의 편리한 방도를 특별히 강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문루(門樓)의 좌우 성첩(城堞)을 각각 8칸씩 헐어버림으로써 전차가 드나들 선로(線路)를 만들고 원래 정해진 문은 전적으로 사람만 왕래하도록 한다면 매우 번잡한 폐단이 없을 것 같습니다. 삼가 도본(圖本)을 가져와 성상께서 보실 수 있도록 준비하였습니다. 삼가 성상의 재결(裁決)을 기다립니다.” ([고종실록] 48권, 1907년 3월 30일)
숭례문 성곽을 제거하는 것은 이러한 자료로 볼 때 숭례문 홍예의 복잡한 교통 상황을 감안하여, 성곽을 제거함으로써 통행의 편리함을 도모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는 더 큰 의미가 숨어 있는데, 서울 성곽과 성문은 약 500년 동안 서울에 거주하던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통제하고, 조선왕조의 권력을 뜻하는 상징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성곽을 없애는 것과 성문의 모습을 바꾸는 것은 조선왕조가 더 이상 실제 권력을 갖지 못하게 됨을 뜻하며, 일반 사람들에게 통행의 제한을 없앰으로써 조선왕조와 같은 신분제 사회가 더 이상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을 뜻한다. 한편 이 기록에 따르면, 숭례문 좌우의 성곽은 좌우 일부만 철거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다시 전체를 철거하는 것으로 변경된다.
“동쪽 문루와 남쪽 문루의 좌우 성첩을 헐어버리는 문제를 가지고 이미 주청하여 재가를 받았습니다. 그 나머지 성벽은 교통 중심 도로에 있어 장애가 될 뿐이고 유사시를 미리 방비하는 데는 실로 유익할 것이 없으니 속히 내부(內部)와 탁지부(度支部)에게 책임지고 헐어버리도록 함으로써 한없이 큰 폐하의 뜻을 보여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고종실록] 48권, 1907년 6월 22일)
성곽의 철거는 곧바로 진행되었으나 1907년에 일본 황태자의 한국 방문을 기념하기 위하여 제작된 사진첩을 보면, 숭례문 좌우로 성곽 일부가 더 길게 뻗어 있었다. 황태자는 10월 16일에 방문하였으며, 숭례문 좌우의 성곽을 완전히 철거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사진을 자세히 보면 흰 천으로 공사 중인 부분을 가린 것을 볼 수 있다. 이 당시 황태자의 방문에 맞춰 숭례문 앞에는 일제가 세운 ‘봉영문(奉迎門)’이 세워졌고, 숭례문 뒤에는 친일단체인 일진회(一進會)에서 세운 또다른 봉영문이 세워졌다.
1907년에 발간된 <황태자전하한국어도항기념사진첩(皇太子殿下韓國御渡航紀念寫眞帖)>에 수록된 숭례문 앞(좌측), 뒤(우측)의 봉영문. 앞의 봉영문 사진을 보면, 가운데로 숭례문 서편의 성곽이 보다 길게 뻗어 있음을 알 수 있고, 아래로 흰 천이 덮여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숭례문 뒤에서 찍은 일진회에서 세운 봉영문 사진에도 서편으로 성곽 일부가 남아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후 숭례문 주변을 시작으로 하여 곳곳의 성곽이 차례로 철거되기 시작하였는데, 이러한 성곽 철거의 사무를 위하여 1907년 7월 30일에 ‘성벽처리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이 위원회는 서울을 비롯하여 몇몇 지방 도시를 둘러싸고 있던 성곽을 철거하는 업무를 담당하였다.
한편 숭례문 좌우의 성곽 철거는 1909년에 완료되었으며, 바로 뒤를 이어 주변에 원형 석축을 건립하는 공사가 진행되었고, 1910년에 공사가 완료되었다. 이 원형 석축은 2008년 숭례문 화재 이전까지 있었으며, 최근 숭례문 복구와 성곽 복원에 따라 일부만 남기고 철거되었다. 공사 완료와 더불어 숭례문 홍예를 관통하던 전차 선로는 숭례문 좌우로 옮겨졌고, 이 선로를 설치하기 위한 기초 유구가 최근 발굴 조사에서 발견되었다.
1911년에 일본에서 발간된 [일본의 조선(日本之朝鮮)]에 수록된 숭례문. 주변의 원형 석축이 설치되었다. | 숭례문 좌우를 지나던 전차 노선 엽서. 1910년대 추정. <엽서: 개인소장> |
숭례문 오른편으로 옮겨진 전차 노선을 보여주는 엽서. 1930년대 이후 추정. <엽서: 개인소장>
1910년에는 남쪽 화기를 누르는 상징적 시설인 연못을 매립
1910년에는 숭례문 앞에 위치하고 있던 남지(南池)를 매립하였다. 이 연못은 숭례문 앞에 위치하여 화재에 대비하는 방화수의 역할을 함과 동시에 풍수적 해석에 따라 관악산의 화기가 너무 센 것을 누르기 위해 상징적으로 설치된 시설이었다. 한편 이 연못을 배경으로 한 그림이 전하는데, 1628년에 당시 도화서 화원인 이기룡이 그린 [이기룡필남지기로회도]이다. 이 그림은 당시 기로회의 모임을 묘사한 것으로 그림의 아래쪽에 숭례문과 좌우 성곽이 묘사되어 있어, 숭례문을 묘사한 가장 오래된 그림으로 평가되고 있다.
[대동전도(大東全圖, 김정호 제작, 1861년 이후)]에 나타난 숭례문과 남지. 지도에는 ‘池’라고 표시되어 있다. 한편 조선시대 흥인지문 밖에는 ‘동지(東池)’, 돈의문 밖에는 ‘서지(西池)’가 있었다. | [이기룡필남지기로회도(李起龍筆南池耆老會圖, 1629,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보물 866호)] 가운데 숭례문 부분 확대한 모습. |
1927년에 이 연못 터에 건물을 짓기 위해 기초 공사를 하던 중 유물이 수습되었다. 당시 유물을 수습한 기록에 따르면, 조선 왕실에서 설치한 것으로 추정하였으며, 장대석과 강회를 이용하여 연못의 물이 안으로 스며들지 않도록 단단히 밀봉된 격실 안에서 용 모양의 거북을 발견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유물의 이름은 당시 발견자에 의하여 ‘청동용두의 거북(靑銅龍頭の龜)’으로 명명되었으며, 조선총독부로 이관되었다가 해방 이후 국립박물관에 수장되었다.
이 유물은 2009년 2월 숭례문 화재 1주기를 맞이하여 개최된 전시회에서 다시 그 모습을 드러내었는데, 형상으로 볼 때 전설상의 동물인 ‘현무(玄武)’의 형태와 유사하였다. 한편 유물 내부에서는 지류 유물 1점이 발견되었는데, 한 가운데에 불을 뜻하는 ‘화(火)’를 쓰고, 주변에는 팔괘 모양을 그렸으며, 그 안팎으로 물을 뜻하는 ‘수(水)’를 여러 개 써 넣었다. ‘현무’는 북쪽의 방위를 관장하는 사신(四神)의 하나이며, 북쪽은 오행(五行) 방위에서 물인 ‘수(水)’를 뜻한다. 이러한 의미와 지류에 그려진 도안의 형태를 감안하면, 이 유물 또한 남쪽의 화기를 누르기 위한 상징적인 장치로 보인다.
청동용구의 구(거북) | 의궤에 나타난 현무 [장릉봉릉도감의궤(1698)] | 유물 안에서 수습된 지류 |
일제 강점기 중에는 박람회 전시장으로도 사용돼
숭례문 좌우의 성곽이 훼철됨과 함께 설치된 원형 석축은 앞 뒤가 뚫려 있는 형태였으며, 1934년까지 일반인들이 통행할 수 있게 개방되어 있었다. 그러나 1932년 4월의 신문 기사에 의하면, 앞 뒤로 철문을 설치하여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될 것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어, 이 시기부터 숭례문 홍예는 폐쇄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일제 강점기 중 숭례문은 박람회의 전시장으로도 사용되었다. 이 때 숭례문의 모습은 각 박람회 마다 발행된 엽서와 도록 등에서 볼 수 있는데, 용마루와 추녀마루 등에 전구를 달거나, 2층 창문 밖으로 간판을 내어 달은 모습 등을 볼 수 있다. 또한 숭례문 주변에 설치된 원형 석축 위에는 가로등이 설치되었고, 일제 강점기 중에 숭례문의 단청은 조선 후기와 다른 모습으로 변하였다.
[조선박람회기념사진첩] 중 1929년(왼쪽)과 1930년(오른쪽) 박람회장으로 사용된 모습.
6.25로 크게 훼손, 1953년 긴급 보수 진행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한 한국 전쟁으로 인하여 숭례문은 크게 훼손된다. 당시 서울 전역에 걸쳐 대규모의 공습이 감행된 것에 비하면 숭례문을 비롯한 궁궐의 피해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숭례문을 중심으로 총격전이 벌어졌고, 숭례문의 남쪽면에 박격포 공격이 감행되어, 문루 2층에 2곳, 문루 1층 중앙에 3곳, 문루를 받치고 있는 육축 왼편에 1곳 등이 크게 훼손되었다.
다행히 전체 건물이 붕괴되지는 않았으며, 1953년 4월부터 9월에 걸쳐 긴급 보수가 진행되었다. 이 때에는 전체 건물을 해체하지 않고, 손상된 부재만을 새로 만들어 넣음으로써 수리를 마쳤다. 이어 1954년 8월부터 11월까지 경국사 주지였던 김보현에 의해서 단청이 진행되었고, 1959년 11월에는 홍예문에 대한 수리가 진행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 직후 피해를 입은 부분을 임시로 보강시켜 놓은 모습. <사진: 개인소장> | 1959년 홍예문 수리 광경 <사진: 개인소장> |
이로서 긴급한 수리는 마쳤으나, 전체적으로 숭례문의 구조 자체에 가해진 충격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서까래가 뒤틀리고, 지붕 처마의 선이 휘어지면서 숭례문에 대한 근본적인 해체 수리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쟁 후의 사회적 여건은 매우 불안하였고, 전체적인 수리에 필요한 재원 마련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다가 1961년에 숭례문의 해체수리가 시작되었고, 한국 전쟁 중에 피해를 입었던 육축 까지도 부분적으로 해체되어 수리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각 분야를 대표하는 전문가들이 모여 숭례문 해체수리에 참여하였는데, 공사 감독관은 임천이 맡았고, 목공사에는 조선 궁궐 목수의 계보를 잇는 조원재가 참여하였으며, 석공사에는 드잡이로 유명했던 김천석이 참여하였다. 전체 공사는 1961년부터 1963년까지 진행되었으며, 이 때의 공사 기록은 1966년에 [서울 남대문 수리보고서]로 간행되었다.
1960년 수리 전 숭례문 및 주변 전경 사진 <국가기록원 소장> | 1963년 숭례문 해체수리 후 준공식 사진 <국가기록원 소장> |
이후 계속된 보수 작업들
공사가 완료되고 나서 채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다시 숭례문에 대한 수리가 진행되었다. 주된 원인은 1963년 해체 수리 때 사용한 천연 안료가 공해로 인하여 채색이 변하였기 때문인데, 이 때 다시 단청을 하였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까지 서울의 대기 오염은 매우 심하였으며, 천연 안료의 주된 성분인 철(Fe)은 대기 오염 물질과 결합되어 단청의 색채를 변화시키는 주된 원인이 되었다.
따라서 3년이 지나지 않아 1973년에 다시 단청을 하였는데, 이 때부터 인공 안료를 사용하였다. 현재 문화재 보수에 사용하는 인공 안료는 이 때를 계기로 하여 사용되기 시작했는데, 당시 문화재관리국 소속 문화재연구소에서 연구를 진행하여 채색의 변화가 없고 오래 유지될 수 있는 안료를 선정하였다.
1970년 단청 <서울시사편찬위원회 소장> | 1973년 단청 <개인소장> |
이후 부분적으로 작은 수리와 지붕 기와의 교체 등이 진행되었으며, 주변 원형 석축에 철책을 설치하거나 지면을 정비하는 소규모 정비가 진행되었다. 1988년에 올림픽을 개최하면서 새로운 단청 문양이 채색되었으며, 1998년에 지붕에 대한 해체수리가 진행되었다. 숭례문의 홍예를 비롯한 일곽은 이 때 까지도 일반에 공개되지 않았었으며, 숭례문 남쪽에 광장을 설치하는 공사가 진행된 이후 2006년에 일반에 공개되었다.
이후 2008년 2월 10일 밤 8시 43분에, 숭례문은 개인적인 토지 보상에 불만을 품은 사람이 방화하여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1978년 숭례문 주변 전경<국가기록원 소장> | 2007년 숭례문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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