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고서화

[숨은 역사 2cm] 조선 '외교분쟁 194년' 단박에 해결…

산야초 2017. 3. 13. 01:08

[숨은 역사 2cm]

조선 '외교분쟁 194년' 단박에 해결…비결은 성매매 거절

송고시간2017/03/10 08:00

(서울=연합뉴스) 황대일 기자 = 중국이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결정에 반발해 보복 수위를 높이고 있다.

세무조사와 위생·소방검사, 반덤핑 카드를 꺼내 한국 기업을 압박한다.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사드 때문에 한반도가 화약통이 됐다. 중국 안보 역량과 의지를 과소평가하지 말라"는 협박도 했다.

관영 신화망은 김장수 주중 대사와 약속한 인터뷰를 맘대로 취소하는 결례도 저질렀다.

   

한국을 얕잡아 보는 중국의 행태는 명청시대에 훨씬 심했다.

명은 태조 이성계 일가의 족보를 고의로 왜곡했다. 고려 말 전횡을 일삼은 이인임이 태조 부친이고, 이들 부자가 고려 왕 4명을 살해했다고 기록한 것이다.

신생 약소국 조선을 길들이고, 태조 일가의 정통성을 훼손하려고 날조한 것이다.



역관 홍순언을 적극적으로 도운 명나라 예부시랑 석성


조선은 사신을 보내 시정을 줄기차게 요구했으나 번번이 무산됐다.

조선은 강대국 횡포에 묘책이 없어 가슴앓이만 했다.

태조 부친 이름을 바로잡는 일은 1588년에 간신히 이뤄졌다.

해결사는 역관(통역관) 홍순언(1530~1598)이었다.

조선왕조실록과 연려실기술, 통문관지 등에 그의 행적이 자세히 적혔다.

중국어에 능한 홍순언은 명을 자주 드나들며 관리들과 친교를 쌓았다.

상당수 역관이 외교 업무는 내팽개치고 밀무역에 혈안이 된 것과 대조를 이룬다. 당시 역관은 은이나 인삼, 비단 등을 밀거래해 떼돈을 벌었다.

꽉 막힌 외교관계는 한 여인의 도움으로 풀렸다.

홍순언이 베이징 청루(요정)에서 만난 기생이다.

이 여인은 처음 보자마자 춤과 노래 대신에 울음을 터트렸다.

까닭을 물으니 "부모가 함께 작고했는데 고향으로 모셔가 장사지낼 돈이 없어서 몸을 팔러왔다"고 답했다.

홍순언은 사연을 듣고 가엽게 여겨 공금으로 준비해간 거액을 선뜻 내줬다.

곧이어 잠자리 요청도 거절한 채 자리를 떴다.




홍순언은 귀국 후 공금횡령이 들통나 투옥됐다가 천신만고 끝에 풀려나 다시 역관으로 파견됐다.

명나라 조정에 실무 책임자 면담을 제안했다가 기적 같은 일을 경험한다.

일개 역관을 예부시랑(외교부 차관) 석성이 반갑게 맞이해준 것이다.

석성은 옛날 청루 기생이 자기 후처라고 소개했다.

그때 부인이 나타나 절을 올리며 "부모님 장례를 치르도록 도운 그 은혜는 잊을 수 없었다"고 말하고서 큰 잔치를 벌였다.

석성 부부는 홍순언을 적극적으로 돕겠다고 약속했다.

두 달 뒤에는 대명회전에 이성계 부자의 잘못된 기록을 고쳤다는 통보를 해왔다. 194년간 풀지 못한 외교분쟁이 마무리되는 순간이었다.

석성의 부인은 정성이 듬뿍 담긴 선물을 잔뜩 했다. 필마다 보은이라는 두 글자를 수놓은 비단도 있었다.

홍순언은 귀국 후 우금위장으로 임명됐고, 당릉군이라는 군호도 하사받았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의 참전을 이끄는데도 큰 역할을 했다. 조선은 개전 20일 만에 수도 한양이 함락될 정도로 패전을 거듭하자 사신을 보냈다.

명은 파병에 난색을 보였다. 잦은 외침을 받아 원병을 보낼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때도 병무상서(국방부장관) 석성이 나서 도움을 줬다.

"명이 이라면 조선은 입술이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는 법이다. 일본이 명 정복을 단언한 만큼 조선을 반드시 도와야 한다"고 설득해 파병을 관철시켰다.

이여송이 이끄는 5만명은 절체절명의 조선을 구하는 데 큰 힘을 보탰다.

여색을 멀리한 조선 통역관의 양심이 외교와 안보 현안을 해결해준 것이다.


임진왜란 때 역관 홍순언(洪純彦)이 명나라에 갔을 때 여인을 도와준 일로 보은단(報恩鍛)이란 글씨를 수놓은 비단을 받았다 하여 보은단골이 고운담골로 변음 되었다고 한다.(사진=한국콘텐츠진흥원)


서울 중구 태평로 1가 롯데호텔 부근에는 '고운담골'이라는 표지석이 있다. 홍순언이 보은단 글자를 수놓은 비단을 받은 사실이 알려져 이 지역을 보은단골이라고 불렸는데 나중에 고운담골로 음이 바뀐 것이다.

hadi@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