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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역사 2cm] '국론분열' 한양 환도 동전 던지기로 결정했다

산야초 2017. 3. 19. 10:17

[숨은 역사 2cm] '국론분열' 한양 환도 동전 던지기로 결정했다

송고시간2017/03/08 11:38


(서울=연합뉴스) 황대일 기자 = 한일 위안부 합의, 사드 배치 등을 놓고 사회적 갈등과 대립이 끊이지 않는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찬성 또는 반대 세력은 주말마다 서울 도심에 모여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을 연출한다.

 



온 겨레가 하나로 뭉쳐 독립만세를 외친 3·1 운동 기념일에도 광장에서는 국론이 극명하게 갈렸다.

우리나라 사회갈등지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5번째이고, 관리능력은 바닥권이다.

사회갈등으로 인한 경제적 비용은 최대 246조원으로 추정된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의 약 27%를 갈등 해소 비용으로 쓴다는 뜻이다


국민통합에 앞장서야 할 정치권이 분열을 되레 부추기기도 한다. 대화와 타협보다 힘으로 밀어붙이기를 선호한다. 집단사고와 진영논리에 휩싸여 죽기 살기로 싸운 조선 사색당파와 닮았다.



도읍 환도 문제 때문에 즉위 직후부터 깊은 고민에 빠졌던 태종 이방원


강력한 왕권으로 조선왕조 500년 기틀을 다진 태종 이방원 통치에서도 흔하지 않은 모습이다.


태종은 1400년 즉위 직후부터 깊은 고민에 빠진다. 불과 1년 전에 개경(개성)으로 옮긴 도읍의 환도 문제 때문이었다.


태조 이성계는 고려 도읍지인 개경을 버리고 건국 후 2년 만인 1394년에 한양을 수도로 정했다. 도읍은 얼마 가지 않아 다시 개경으로 옮겨졌다. 2대 정종이 골육상쟁 등을 이유로 한양을 극도로 싫어한 탓이다.


천도 문제가 공론화하자 하륜은 풍수지리설을 근거로 무악 천도를 요청했다.

하륜은 제1차 왕자의 난과 정도전 제거를 주도한 태종의 핵심 측근이다.


무악은 경기도 파주와 서울 서대문구, 은평구 일대를 아우르는 곳이다.

무악을 탐탁지 않게 생각한 태종은 신료들을 불러 최적지를 논의하도록 했다


개경 잔류와 한양 또는 무악 천도 등을 놓고 열띤 토론을 했으나 의견 접근에는 실패했다.

개경 도읍을 유지하되 종묘와 사직은 한양에 두자는 태종의 절충안도 무위로 그쳤다.


당시 개경 잔류나 무악 천도 의견이 대세였고 한양 환도는 태종이 주장했다. 종묘사직과 아버지 이성계의 희망을 고려한 판단이었다.

논쟁이 거듭될수록 무악 쪽으로 분위기가 기울자 태종은 1404년 어느 날 새벽 종묘 문밖에서 기상천외한 제안을 했다.

개경과 한양, 무악을 종묘에 고하고, 길흉을 점쳐 길한 쪽에 도읍을 정하겠다고 공표한 것이다.




길흉 점을 치는 데는 엽전을 사용했다.

태종은 여러 신하와 함께 종묘에 예를 올렸다.

이어 묘당에 들어가 향을 피우고 꿇어앉아 밥상 위에 엽전을 던지도록 했다. 국가 중대사를 엽전 던지기에 맡긴 것이다.

엽전이 허공을 갈랐다가 떨어지기를 9차례 반복하고서 결판이 났다.


한양이 2길(吉) 1흉(凶)이었고 송도와 무악은 각각 2흉(凶) 1길(吉)이었다.

태종은 곧바로 한양 환도를 선언하고서 재론을 엄격히 금지했다.

종묘에서 엽전 던지기(척전)로 천도를 결정한 것은 왕실 조상의 권위를 빌려 갈등을 봉합하려는 고육지책으로 판단된다.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 지도자들이 국가 중대사를 결정할 때 찾던 델포이 신전 전경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 지도자들이 국가 중대사를 결정할 때 델포이 신탁을 구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델포이 입구에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경고문이 쓰여 있다. 이성을 과신한 인간의 오만과 집착을 경계하는 문구다.

국론분열에 미국과 중국 등의 공격까지 가해지는데도 진흙탕 싸움을 벌이는 우리나라 정치권이 새겨들어야 금언이기도 하다.

hadi@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