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고서화

南江이 피로 물들던 날, 선조는 도주 중이었다

산야초 2017. 5. 31. 23:10

[박종인의 땅의 歷史] 南江이 피로 물들던 날, 선조는 도주 중이었다

    입력 : 2017.05.17 03:05 | 수정 : 2017.05.17 17:23

    [80] 태평회맹도의 비밀과 진주성 전투

    임진왜란 발발 보름 뒤 선조는 압록강까지 야반도주
    그해 10월… 4천 진주성 의병-관군, 3만 일본군에 대승
    이듬해 6월 도요토미 복수극… 10만 일본군이 진주성민 학살
    도피 중이던 선조는 한글로 교서 내려 '부역 자수하면 벼슬 준다'
    전후 공신 책훈한 선조, 피란길에 자신 수행한 문신들 대거 포상
    의병장은 단 한 명도 없어
    류성룡 등 이에 반발해 축하연에 불참… 史官 "구차하지 않은가"

    "임금이 이른다. 너희가 처음에 왜에게 잡혀서 다니는 것은 너의 본마음이 아니라 죽을까 여기며 편들었던 것임을 안다. 서로 권하여 다 나오면 죄 주지 아니할 뿐 아니라 벼슬도 줄 것이다."

    서기 1593년 음력 9월 선조 임금이 백성에게 친필로 글을 내린다. 임진왜란이 터지고 해를 넘겨 찾아온 두 번째 가을이었다. 교서는 한문 모르는 백성을 위해 언문으로 작성됐다. 부역자에게 처벌은커녕 벼슬을 내리겠다니, 선조는 성군(聖君)이었다. 결론부를 읽어본다. 뉘앙스가 다르다. "나라가 평정된 뒤면 너희들인들 아니 뉘우치겠는가. (곧 명과 조선군이) 왜 나라에 들어가 분탕할 것이니, 그때면 너희들조차 휩쓸려 죽을 것이다. 그러니 서로 일러 그전에 얼른 나오라." 자수하면 광명이요 이적행위를 계속하면 죽음밖에 없다는, 협박이다. 이 선조국문교서는 보물 제951호다.

    1593년 9월 의주 도피 중 선조가 백성에게 내린 교서 복제본(왼쪽)과 전후 1604년 공신들의 잔치를 그린 태평회맹도(부분). 교서에는 ‘부역한 자는 투항하라’는 내용이, 회맹도 그림에는 전쟁 때 싸운 직업군인보다 의주까지 수행한 문신을 편파대우하는 내용이 나온다.
    1593년 9월 의주 도피 중 선조가 백성에게 내린 교서 복제본(왼쪽)과 전후 1604년 공신들의 잔치를 그린 태평회맹도(부분). 교서에는 ‘부역한 자는 투항하라’는 내용이, 회맹도 그림에는 전쟁 때 싸운 직업군인보다 의주까지 수행한 문신을 편파대우하는 내용이 나온다. /국립진주박물관 소장

    때는 임진왜란이 터지고 1년 7개월 뒤였다. 위로와 협박을 뒤섞은 글을 발표한 선조는 1년 반째 도피행각을 벌이는 중이었다. 이 선조국문교서는 전쟁 발발 보름 만에 국민을 팽개치고 야반도주한 국가 지도자가, 한 달도 아니고 일 년도 아니고 일 년하고도 여섯 달 만에 그 도피처에서 내놓은 시국 담화문이다. 나는 도주했어도 너희들은 기어나오라? 졸렬하다. 이제 경상남도 진주 땅에서 최고의 경지에 이른 졸렬함을 구경해본다.

    1592년 4월 30일 선조 달아나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군이 부산에 상륙했다. 4월 14일 오전 8시 대마도 오우라항을 떠난 지 9시간 만이다. 그날 부산진 첨사 정발이 전사했다. '전사자 속출' '함락' 소식이 속속 조정으로 올라왔다. 보름 뒤 선조가 서울 모래재를 넘어 평안도 의주로 향했다. 임금이 탄 가마가 지나갈 때 많은 한양 시민이 통곡했다. 그 뒷모습을 보고 있던 많은 시민이 경복궁으로 난입해 전각을 불태웠다. 이틀 뒤 몇 시간 시차를 두고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 부대가 동대문과 남대문을 통해 한양에 입성했다. 한양은 비어 있었다.

    1592년 10월 6일 진주대첩

    경남 진주 지도

    조선 팔도가 쑥대밭으로 변했지만 호남은 안전했다. 곡창지대 호남을 조선은 반드시 지켜야 했고 일본은 반드시 빼앗아야 했다. 바다로 호남에 진입하려던 일본 해군은 군신(軍神) 이순신에 의해 물귀신이 됐다. 일본은 육로로 호남 진출 작전을 세웠다. 그 선봉장 나가오카 다다오키(長岡忠興)는 경상우도 핵심지 진주성 공격을 결정했다. 진주만 함락시키면 호남은 금방이었다.

    그리하여 개전 6개월 만에 진주성 전투가 벌어졌다. 일본군 병력은 3만, 조선군 병력은 3800명. 10대1 싸움에서 조선군이 승리했다. 조총과 활이라는 개인 화기는 열세였지만 천자총통을 비롯한 중화기는 조선이 앞섰다. 진주목사 김시민과 전라의병장 최경회, 경상의병장 곽재우의 성 내외 연합작전에 일본군은 혼란에 빠지고, 결국 조선이 승리했다. 신출귀몰하고 지략이 뛰어난 목사 김시민을 일본군은 이름도 모르고 '모쿠소'라 부르며 증오하며 도주했다. 임란 전세는 조선 쪽으로 역전됐다. 선조는 일찌감치 의주에 도착해 명나라로 망명을 타진 중이었다. 목사 김시민은, 죽었다.

    1593년 6월 21일 2차 진주성전투

    그해 6월 명나라 칙사 심유경이 선조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풍신)수길이 반드시 전년에 패전한 원한을 갚고자 하여 장차 군사를 연합해서 진주를 공파한 연후에 바다를 건너겠다 합니다.'

    2차 진주성 전투는 예고된 전투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에 주둔한 병력의 절반을 진주에 집합시켰다. 가토, 고니시, 구로다 같은 명장(名將)이 지휘하는 10만 대군이 진주성을 포위했다. 당시 조선에 출병한 병력이 20만이었으니, 절반이 동원됐다. 그 어떤 기록을 봐도 조선군은 1만 명이 되지 않았다. 날카롭게 조련된 10만 일본군에게 진주성에 있는 조선군과 민간인 6만명이 학살됐다. 모두가 죽을 각오로 전투에 임했다. 신임 목사 서예원은 달랐다. 두려움에 도망갈 궁리만 하는 서예원을 대신해 의병장 김천일이 전투를 이끌었다.

    6월 29일 폭우 속 성문이 뚫렸다. 크게 다친 김천일과 최경회, 고종후는 북쪽으로 두 번 절하고 물에 뛰어들었다. 김해 부사 이종인은 일본군 두 명을 두 팔로 끼고서 "김해 부사 이종인이 여기에서 죽는다"고 외치며 남강에 투신했다. 패배했으되 장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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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흰 구름이 퍼져나가는 하늘 아래, 촉석루가 장엄하다. 남강은 푸르다. 만인(萬人)이 진주성에서 목숨을 걸던 1593년 임진왜란, 국가 지도자 선조는 북쪽 평안도 남포에 숨어 있었다. 전후 행각은 더욱 어이가 없다. /박종인 기자

    겁쟁이 목사 서예원은 성을 벗어나 숲속에 숨었다. 목숨 몇 시간 더 부지하다 잔인하게 죽임을 당했다. 일본군은 서예원의 목을 잘라 가져갔다. '모쿠소' 김시민으로 착각한 것이다. 실록은 이리 기록했다. '왜변(倭變)이 있은 이래 참혹하게 무너지고 의열(義烈)이 장엄하게 드러난 것으로 진주성 같은 예가 없었다.'(선조수정실록)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풍신수길이 원(怨)을 푸는 전쟁'이라고 했다.

    그때 선조는 평안도 남포 강서현에 있었다. 실록에 따르면, 6월 21일 선조가 탄 가마 행렬을 푸대접한 강서현령 한여숙을 치죄하겠다고 사헌부가 보고했다. 며칠을 무시하던 선조가 이리 명했다. '추고(推考)하라.'(선조실록) 죄를 엄중 조사하라는 뜻이다. 바로 그날 진주에서는 일본군이 진주성을 에워싼 해자를 완전히 메꿨다. 본격적인 공성전 준비가 끝났다는 뜻이다.

    의기(義妓) 논개

    전투가 끝나고 의병장 최경회의 첩은 일본군 장교들이 촉석루에서 승전 파티를 벌일 때 게야무라라는 젊은 장교를 끌어안고 남강에 뛰어들었다. 훗날 기록들에는 그녀 이름이 논개라고 나온다. 그녀가 뛰어내린 바위는 의암(義巖)이라 이름이 붙었고 훗날 논개는 의기(義妓)로 추앙받는 여자가 되었다.

    그 '훗날'이 매우 오래 걸렸다. 전쟁 직후 '동국신속삼강행실도'라는 위인전을 관찬할 때 진주에서 논개를 추천했으나 유림에서는 거부했다. 이유는 하나였다. '천한 기생 주제에.' 147년 세월이 흘러 1740년 영조 때에야 그녀를 기리는 사당 의기사(義妓祠)가 진주성에 세워졌다.

    논개가 뛰어내린 촉석루 아래 의암.
    논개가 뛰어내린 촉석루 아래 의암.
    또 아주 훗날 많은 사람이 논개는 천민이 아니라 주씨(朱氏) 성을 가진 불우한 양반 규수라고 했다. 태어난 곳도 찾아내 전라도 장수에 사당을 세웠다. 대한민국 시대 새로 편찬된 최경회 문중 족보에 이름도 올렸고, 최경회의 고향 화순에는 2003년 최경회 사당 경내에 따로 영각을 만들어 그녀 영정을 모셨다. 장수에서, 화순에서 사람들은 '논개님'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신분 고하가 무슨 상관인가.

    2017년 5월 진주성과 태평회맹도

    평화를 되찾은 진주성은 아름답다. 남강은 푸르고 하늘도 푸르다. 임진왜란의 기억을 모아놓은 진주박물관은 진주성 안에 있다. 박물관 수장고에는 '태평회맹도'라는 병풍이 있다. 임진왜란, 정유재란이 끝나고 1604년 10월 27일 밤 선조가 전쟁통에 공을 세운 벼슬아치들을 불러 '공신회맹제'(功臣會盟祭)라는 잔치를 벌이고 만든 그림이다. 잔치장은 지금 청와대 구내다. 훗날 참가자들에게 기념사진 격으로 나눠준 병풍에는 참석자 명단과 잔칫날 풍경이 보인다. 보물 제668호다.

    자, 졸렬함의 극치를 보자.

    초청 대상은 그때까지 살아 있는 역대 공신 63명. 실제 참석자는 58명. 불참자는 5명으로 류성룡, 정탁, 이운룡과 이산해, 남절이다. 3대첩을 이끈 지도자 이순신과 권율과 김시민을 천거했던 류성룡이고, 옥에 갇혔던 이순신을 변호했던 정탁이고, 이순신 아래 전투를 이끌었던 이운룡이다. '늙어서' '아파서' '상중(喪中)이라'고 변명했다. 류성룡은 자기가 받은 공신 책훈을 취소해달라고까지 했다.

    임진, 정유 두 전쟁 후 전쟁과 관련해 선조가 책훈한 공신은 호성공신과 선무공신 두 가지였다. 호성공신은 자신을 의주까지 무사히 수행한 공신이다. 선무공신은 전쟁터에 나가서 승리한 공신이다. 그런데 호성공신은 86명, 선무공신은 18명이다. 호성공신에는 마구간지기와 내시와 심부름꾼도 포함돼 있다. 태평회맹도 오른쪽 아래 귀퉁이에 엎드리고 있는 세 명이 바로 마구간지기다.

    목숨 걸고 싸운 의병장들은 그 누구도 선무공신에 선정되지 않았다. 오히려 전라 의병장 김덕령은 전쟁 와중에 벌어진 이몽학의 난에 연루됐다며 죽여버렸다. 홍의장군 곽재우는 초야에 숨어버렸다.

    호성공신 1등공신에 책훈된 영의정 이항복은 "장수들이 전쟁터에서 세운 공에 비해 무척 부끄럽다"며 공을 취소해달라고 요구했다. 이덕형은 이렇게 말하며 공신을 고사했다. "의병을 일으키고 절개를 지키다 죽은 사람들이 있는데 무슨 마음으로 내가 끼는가." 결국 선조는 자기 몸 살펴준 사람들 앞가림에 급급했고, 나라를 도탄에 빠뜨린 무능함을 숨기기 위해 직업군인, 의병장들의 공은 지워버린 것이다.

    공신 명단이 발표되던 날, 사관은 이렇게 썼다. '훈장 제도를 만든 이유가 어찌 이처럼 구차한 데 쓰려고 한 것이겠는가(丹書鐵券之設初豈若此之苟也)!'(선조실록 선조 37년 6월 25일)

    남강에 흐르는 두려움

    여기까지가 남강변 진주성에서 투명하게 드러난 지도자 선조의 졸렬함이다. 논개의 신분이 무엇이든 개의치 않는다. 남강을 적신 피가 그 누구 영혼에서 흘러나왔는지 개의치 않는다. 다만 심하게 개의하는 바가 있다. 자기는 도망이나 다니는 주제에 국민들에게 자수 권유 '삐라'나 날려대고 훗날 편협한 논공행상이나 하는 그런 지도자, 그런 인물이 가면을 쓰고 21세기 대한민국 땅을 활보하고 있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다. 그 두려움이 평화로운 남강에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