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고서화

의안대군(義安大君) 이화(李和) 사당

산야초 2017. 6. 9. 23:11

[향토 문화유적 답사] 의안대군(義安大君) 이화(李和) 사당

입력 : 2017.06.05 09:11

의안(義安) 대군 이화(李和)(1348~1408)는 태조 이성계의 이복동생으로 태조 이성계를 도와 위화도 회군과 조선건국에 기여하였으며, 왕자의 난을 일으켜 집권한 조카 태종 이방원을 적극 도와서 영의정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손자 대에 이르러 단종 복위사건에 연루되면서 후손들이 한꺼번에 화를 입어 가문이 흩어지고 묘소도 실전되었다가 숙종 대에 이르러 이를 회복하였으며, 현재 남양주시 평내동에 사당과 묘소가 있어 이를 답사하였다.


의안대군 사당(남양주시 향토유적 제4호, 남양주시 평내동)

경춘선 평내호평역 바로 옆에 의안대군 사당이 있다. 시내 한가운데 있는 셈인데 도로변 개폐식 출입문은 커다란 표시석을 세워놓은 채 늘 잠겨있어 반대편으로 돌아가 관리하는 사람이 사는 듯한 살림집 앞마당을 가로질러 들어가야 한다.

보아하니 종가(宗家)로 볼 특징적인 사항들이 없어 현재 종손이 사는 것 같지는 않고 아마도 문중에서 누군가가 관리 임무를 띠고 사는 듯했는데 대문도 없고 누구도 내다보거나 제지하지도 않아 그냥 들어갈 수 있었다.

평내호평역 도로변 입구에 커다란 표시석이 있지만 늘 잠겨있다. 평내 '슬로우 소풍 9경'중 1경으로 꼽힌다.
반대쪽으로 돌아가 살림집을 지나면 사당으로 갈 수 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며 앞쪽으로 1칸은 퇴칸을 내어 지은 구조로 사당에는 의안대군 이화, 그리고 아들과 손자 3대의 위패를 모셨는데 6·25전쟁으로 파손되어 1958년 다시 세웠다.
사당 옆으로는 근래에 세운 듯한 대형 신도비가 비각 안에 세워져 있어 해당 문중이 여전히 번창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으며, 그 옆으로는 신도비의 내용을 풀어쓴 비석을 따로 세웠다.
오른쪽 끝에는 오래된 비석 하나를 두꺼운 유리벽으로 보호각을 둘러놓았는데 아마도 의안대군 묘비로 보이지만 구태여 이곳으로 옮겨 유리벽을 둘러치고 있는 까닭을 알지 못하겠다. 더구나 이와 관련한 아무런 설명이 없어 더욱 궁금한데 아마 묘소를 새로이 꾸미면서 옛 비석을 옮겨와 오래 보존하려는 것이 아닐까 추측해볼 뿐이다.

이성계의 이복동생, 김씨 소생 의안대군 이화는 이성계가 세자로 지목하였다가 방원에게 죽임을 당한 신덕왕후 강씨 소생 의안(宜安)대군과 같은 호칭이지만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잘 모르는 사람이 많지만, 태조 이성계가 의안대군에게 내린 개국공신녹권(開國功臣錄券)이 국보 제232호로 지정되는 등 역사적 비중이 큰 인물이다.

조선왕조에서는 처음으로 발급된 녹권이며 개국공신녹권으로는 최초로 발견된 것으로 조선 태조의 건국 이유와 그 주역들의 공적을 파악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그 개국공신녹권이 왜 전북 정읍에 있다는 것이며 이렇게 번성하는 의안대군 후손들이 있는데 문화재청에서는 이화의 후손이 없어 그의 이복형인 이원계의 가문에 의해 보관되어 오고 있다는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문화재청 자료 참조

조선의 개국공신이자 태조 이성계의 이복동생으로 위세가 대단했던 의안대군이 어느 날 일과가 끝난 후 궁궐을 들어가려고 하였으나 임금의 허락이 없으면 누구도 들일 수 없다며 문을 열어주지 않고 버티는 문지기를 발로 차고 때렸다. 하지만 끝내 궁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일화가 있는데 다음 날 그 이야기를 들은 태조 이성계는 의안대군을 나무라고 문지기를 크게 칭찬 후 정4품 호군으로 승급시켜 임금을 근접 경호하게 하였다고 한다. 그가 조선의 궁궐 중건과 도성 수축, 왕릉 공사 등에 재능을 보여 공조판서를 역임하고 의정부 참찬에 까지 이르른 미천한 출신의 박자청이라는 사람과의 재미있는 일화도 있다.


의안대군 묘

의안대군 사당을 둘러보고 나오니 큰길 건너편에 의안대군 묘 표지판이 서 있는데 500m라고 씌어 있어 10분쯤이면 가겠구나 하고 그 방향으로 길을 나섰다가 큰 고생만 하고 낭패를 보았다.

그 길로 올라가니 곧 분위기가 이상해지면서 마치 실미도 영화 세트장 같은 건물들이 이어지면서 어떤 건물은 비어있고 어떤 건물은 공장으로 돌아가고 있었는데 전체적으로 낡고 피폐하며 우중충한 느낌이 썩 좋은 기분이 아니다. 게다가 곳곳에 '사진 촬영 금지' 같은 문구가 씌어 있고 폐가처럼 창문들이 깨어진 곳이 다수인데다가 시내 한가운데 이런 집단 건물들이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아무튼 그래도 최초 화살표 방향으로 올라가면서 미로 같은 길을 헤매고 어찌어찌 물어물어 찾아가니 그 건물 단지 끝을 지나 길도 없는 배수로를 따라가니 도로 아래 소위 말하는 토끼굴이 있는데 그곳을 지나 오르니 의안대군 묘소라고 새긴 표석이 나온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길은 누구도 혼자는 찾아올 수 없는 경로이며, 도로변에 세워 둔 표지판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

사당 건너편 도로변에 서 있는 의안대군 묘 안내간판. 평범하게 500m라고 씌어 있는데 도저히 찾을 수 없다.
20분 이상 헤매다가 겨우 찾아낸 묘소 입구에는 근사한 표지석이 있었는데 안내 역할보다는 자기만족 작품으로 보인다.
묘역 입구는 굳게 잠겨있고 의안대군파 종중 땅에 무단출입 시에는 민·형사상 책임을 묻겠다는 간판을 보고는 들어갈 수가 없어서 돌아 나왔다. 300m 안쪽으로 의안대군과 그 후손들 묘역이 있다고 하는데 개인적인 탐방객은 반기지 않는듯하다.

돌아나오면서 가만히 살펴보니 수석-호평 고속도로(2011년 7월 개통)가 지나면서 묘역과 평내동 지역을 갈라놓은 형국인바 아마도 도로 개설하면서 종중 땅이 포함되니 이를 매입하게 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예전 통행로는 없어지고 만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도로 아래로 토끼굴은 내었는데 그 아래 집단 공장들 사이로 오는 길은 연결되지 않거나 도저히 찾기 어려운 실정이다.

왼쪽이 평내로 나오는 길, 오른쪽은 고속도로 들어가는 들머리인데 가운데가 묘역까지 연결된 공간이다.

다만 도로공사 시 묘역으로 가는 역주행차선을 하나 내어놓은 듯하게 평내로 나가는 진출로 옆 공간에 알 수 없는 여백이 있고, 그 입구는 평내에서 고속도로 연결되는 들머리에서 조금 열려있는 모양새를 갖추고 있는데 저 멀리부터 사람의 보행은 금지된 구간인지라 이 길로 탐방객이 찾아가기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사당 건너편 묘역 안내 간판은 철거하거나 다시 고쳐 세우는 것이 좋겠으며, 부연하여 '개인 탐방이나 답사는 할 수 없습니다'라고 써 놓은 것이 맞을듯하다.


자료제공=남양주 시민문화포럼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