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잊으랴. 어찌 우리 그 날을 .. 구덩이에 버려진 시체들..우리들의 정겨운 가족들이 어느 날 공산군의 남침으로 참혹한 피해자들이 되었다.
다리 밑에 응달에 몸을 피해 잠시 쉬고 있는 피난민 가족들.
포격에 가족을 잃고 피난 길에 홀로 남겨진 아이가 누군가 밥한술을 놓고 간 뒤에 홀로 울고 있다. 나뒹구는 시체들. 6.25사변으로 행불처리된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한반도 곳곳에서 죽고 썩어갔다. 아무렇게나 버려진 소년들의 시신들. 전쟁이 얼마나 잔혹한 것인지를 말해주고 있다. 전쟁은 전쟁을 두려워 하며 피하려는 백성에게 찾아오고 기꺼이 惡과 싸워 생명을 바치겠다는 백성에게는 덤벼들지 못한다. 공산주의 앞에 깨어있지 않고 반미친북하는 어리석은 편향적 민족주의 환상은 제 2의 6.25를 부를 수 있다.
완전 폐허가 된 마을 - 1951. 4. 서울근교 공산군에게 학살 당한 시체 가운데 남편을 찾고 있는 부인. 뒷줄엔 처리반원들이 악취로 인하여 코를 막고 있다. 시체가운데 가족을 찾는 생존가족들의 표정이 담담하다. 공산군은 후퇴를 하면서 경찰가족, 공무원가족, 신앙인 등을 무차별 학살한 뒤 식수원도 끊을 겸 우물에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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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다른 표기 언어 Korean War , 六二五戰爭
요약 6·25 사변이라고도 하며, 국제적으로는 한국 전쟁이라 불린다. 소련의 지원으로 군사력을 키운 북한이 38˚선 전역에서 남침하여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였다.
국군은 북한의 앞선 병력과 무기에 밀려 한달만에 낙동강 부근까지 후퇴하였다. 이어 미국 주도로 유엔 안전 보상 이사회가 열려 유엔군이 파병되었다. 유엔군의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의 성공으로 서울을 되찾고 압록강까지 진격하였다. 하지만 북한의 요청으로 중국군이 개입하자 다시 서울을 빼앗겼다.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전투가 계속되었다.
3년 동안의 전쟁으로 인명 피해가 약 450만 명에 달하고, 남한의 43%의 산업 시설과 33%의 주택이 파괴되었다. 남북한은 휴전 상태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목차
6·25사변이라고도 하며, 국제적으로는 한국전쟁이라는 용어가 통용되고 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될 때까지 전투행위가 계속되었다.
배경
개요
6·25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한반도 분단의 결과이며, 한반도의 분단은 급조된 미국의 정책결정 때문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진행중이던 1943년 11월 27일 미국·영국·중국 등 3개국의 정상이 참석한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일본 예속은 부당하다고 인정하고 적절한 시기에 한국을 독립시키기로 합의했으며, 1945년 2월 얄타에서 개최된 미국·영국·소련 등 3개국의 정상회담에서는 일본이 항복한 후 한반도는 미국·영국·중국·소련 등 4개국에 의한 일정 기간의 신탁통치를 거친 후 독립시키기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일본의 군사력을 과대평가한 미국은 일본 본토에 상륙시에 일어날 막대한 인명피해를 우려하여 소련의 조기참전을 요청했다.
그러나 소련은 참전을 계속 지연시켜오다가 미국이 히로시마[廣島]에 사상 최초의 원자폭탄을 투하한 지 2일 후인 1945년 8월 8일 대일선전포고와 더불어 만주일대에서 한반도를 향하여 진격하기 시작했다. 미·소 양측이 우려했던 일본 관동군은 극히 약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소련군은 예상 외의 빠른 속도로 남진할 수 있었다. 당시 미군은 한반도에 제일 가까이 위치하고 있는 부대가 오키나와[沖繩]와 괌 일대에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이 한반도 전역을 점령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북위 38˚선을 미군과 소련군의 경계선으로 정하고 그 북쪽에는 소련군이, 남쪽에는 미군이 진주하여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키기로 제의했다.
소련이 이 제의를 받아들여 한반도는 북위 38˚선을 경계로 미군과 소련군에 분할 점령당하게 되었다(분단국가).
소련군은 1945년 8월 22일 평양에 진주했고, 미군 제24사단은 9월 8일 인천에 상륙하여 2일 후 서울에 진주했다. 분할 점령시 미·소 양측은 한반도의 장래에 대한 분명한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시간이 흐름에 따라 분할 점령하고 있는 양측의 의도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미국은 북위 38˚선을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한 잠정적인 것으로 설정한 반면, 소련은 북위 38˚선을 정치적인 경계선으로 항구화시켜 그 북쪽을 소비에트화하려고 했다.
미군과 소련군은 당면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미소공동위원회(US-USSR Joint Commission)를 구성하고 1946년 3월과 1947년 5월 서울에서 회의를 개최했으나 합의점을 찾지 못함에 따라 한반도문제는 1947년 9월에 국제연합(UN)으로 이관되었다.
UN에서는 한반도 문제를 취급하기 위하여 UN 한국임시위원단(United Nations Temporary Commission on Korea/UNTCOK)을 구성했다. UN은 제2차 총회에서 통일된 한국정부 수립을 위해 1948년 5월 31일까지 한반도 전역에서 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의하고 UNTCOK가 선거감시임무를 맡도록 했다. UNTCOK는 UN 결의에 따라 한반도에서의 선거를 실시하기 위하여 1948년 1월 한반도에 도착했으나 소련군 점령하의 북한지역에는 소련의 거부로 들어가지 못함으로써 UN 총회의 결의는 실현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결국 UN은 감시가 가능한 지역에서의 선거실시를 결의하고, 1948년 5월 31일 미군 점령하의 남한지역에서만 선거를 실시했다. 선거 결과 의회가 구성되고 의회에서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 행정부를 구성하여 1948년 8월 15일 독립을 선포함으로써 대한민국정부가 탄생했다. 북위 38°선 이남에서 UN의 감시하에 대한민국정부가 구성되자 소련은 8월 25일 38˚선 이북지역에서 소련식의 선거를 실시하고 1948년 9월 9일 이른바 조선인민공화국이라는 공산정권 발족을 선포했다. 이로써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목적으로 설정한 북위 38˚선이 제2차 세계대전 후 형성된 냉전체제로 말미암아 최첨단으로 대립하는 가장 긴장된 양극체제의국경선으로 변했다.
북위 38˚선을 경계로 남북한에 2개의 독립된 정부가 들어서면서 남북간의 대립은 더욱 격화되었으며, 이와 같은 대치 상태는 38˚선을 통한 북한 무장공비의 침투사건과 남한 후방지역에서의 공산주의자(빨치산)들에 의한 전복활동으로 나타났다.
정부수립 이전인 1946년 9월 서울에서의 철도파업, 10월 대구폭동, 1948년 제주 4·3사태와 그 후의 한라산 일대에서의 게릴라전 등을 비롯하여, 1948년 10월 20일 여순반란과 지리산·태백산 및 오대산 일대에서의 빨치산 활동 등으로 남한의 치안은 극히 불안한 상태에 있었다. 이에 덧붙여 1948년 11월 17일 오대산 부근으로의 북한군의 침투로부터 시작하여 북한의 남침 전까지 38°선 일대에서도 10여 차례의 북한 공산군에 의한 침투가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무장세력에 의한 전복활동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게 되자 북한의 김일성은 최종적인 수단으로 전면적인 남침으로써 무력에 의한 남북통일을 성취하기로 결심하게 된 것이다.
북한의 전쟁준비
소련은 북한에 진주한 직후부터 조직적으로 북한의 군사력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1945년 10월 모든 사설군사조직을 해체한 소련군은 11월부터 각 도 인민위원회에 보안청을 조직하고 이를 통제하는 보안부를 설치한 것을 시작으로 1946년 1월 철도보안대 창설, 같은 해 8월 보안기간요원훈련소 창설, 1947년 5월 보병 2개 사단과 1개 혼성여단 및 인민군 총사령부 창설을 거쳐 1948년 2월 8일 육군 3개 사단과 해·공군의 기본체제를 바탕으로 조선인민군을 창설했다. 조선인민군 창설 후 남한에 대한 북한의 군사적 우위를 확신한 소련은 1948년 12월 25일까지 북한주둔 소련군의 철수를 발표함과 동시에 미국도 소련과 마찬가지로 남한주둔 미군을 철수시킬 것을 촉구했다.
1948년 후반부터 1949년 8월 사이에 중국공산군 소속 한인 의용군 2만여 명의 편입으로 북한군 규모는 더욱 확대되었고, 1949년 9월부터 남침 전까지 소련으로부터 대대적인 군사원조로 북한은 총 19만 8,380명의 병력과 242대의 T-34전차, 200여 대의 항공기 등을 보유하게 되었다.
한반도의 주변정세
북한이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원조를 받아 그 세력을 급격히 팽창시키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남한을 둘러싼 정치적·외교적 상황은 매우 불리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일본 항복 당시 한반도의 경제상태는 92%의 전력, 71%의 석탄, 83%의 금속제품, 70%의 광석이 북한지역에서 생산되고 있었으며, 1948년 5월 14일을 기하여 북한이 남한에 대한 송전을 중단하자 남한 산업시설의 겨우 5%만이 가동할 수 있었으며 이로 인한 사회의 불안은 더욱 증대되었다. 1949년 9월까지 중국공산군은 중국대륙을 석권하고 국민당군(장제스 휘하의 군대)을 대륙으로부터 축출함으로써 사실상 중국내전을 종결지었다.
북한의 김일성은 1949년 3월 소련을 방문해 조·소경제문화협정을 체결했고, 소련과 중국은 1950년 2월 우호동맹 및 상호원조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북한은 소련과 중국 양 후원국으로부터 원조를 얻을 수 있는 길이 마련되었다. 한편 1948년부터 시작된 미군 철수로 한반도 내의 남북한간의 군사력 균형은 붕괴되기 시작했으며 북한에 결정적으로 유리한 상황이 조성되었다. 군사력 불균형에 못지 않게 북한으로 하여금 남침을 할 수 있도록 자극했던 외교적인 사건이 계속되었다. 즉 1949년 3월 D. 맥아더 장군이 한 영국기자와의 회견에서 한반도가 미국의 방어선 밖에 있음을 암시하는 설명을 한 것과, 1950년 1월 12일 워싱턴의 전국신문기자 클럽(National Press Club)에서 당시 D. 애치슨 미국 국무장관의 연설 가운데 극동에서의 미국 방어선은 한반도를 배제, 대륙으로부터 후퇴를 뜻하는 이른바 '애치슨라인'을 공표함에 따라 미국이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할 경우 개입하지 않을 것임을 선언하는 듯한 징후를 보인 것이다.
또한 1950년 1월 9일 극히 소액의 대한군사원조법안이 미 하원에서 부결된 사건은 미국 국무부뿐만 아니라 미국 국민이 한국 방어에 관심이 없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결국 이와 같이 한반도를 둘러싼 국내외의 정세는 북한이 남침할 경우 미국이 개입하지 않으리라는 판단을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발발
북한이 남침을 감행하자 미국의 반응은 일반적으로 판단할 수 있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북한의 남침 보고를 받은 미 행정부는 이 사건을 UN의 틀 안에서 해결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즉각 UN 안전보장이사회에 침략문제를 제기했다.
1950년 6월 25일 오후 2시(뉴욕 시간) UN 안전보장이사회는 상임이사국의 일원인 소련 대표가 불참한 가운데 북한의 남침을 '평화의 파괴' 행위임과 동시에 '침략행위'로 규정하고 적대행위의 즉각적인 중지와 북한군의 38˚선 이북으로의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어서 6월 27일 북한이 6월 25일의 결의를 무시하고 남침을 계속함에 따라 UN 회원국들은 북한군을 격퇴시키 위해 한국 정부에 가능한 모든 원조를 제공하겠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미국 행정부의 의사결정 과정에서 트루먼 대통령은 한반도 내에서의 분쟁이 타이완이나 기타 지역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미국 제7함대로 하여금 타이완과 중국 본토 간의 전투행위를 차단시키도록 하면서 조심스럽게 한반도의 상황에 대처하려 했다. 트루먼 대통령을 보좌하는 국무부 및 국방부의 참모들은 미국의 참전을 위한 어떠한 의견도 제시하지 못하고 단지 상황만을 보고할 따름이었다.
민·군(軍)의 참모진들로부터 참전을 위한 건의가 없는 상황하에서 트루먼 대통령은 6월 27일 맥아더 장군에게 해·공군만을 제한적으로 사용하여 북한군을 남한에서 격퇴하라는 임무를 부여했다. 맥아더 장군은 6월 29일 한국 전선을 시찰한 후 워싱턴에, 북한군을 격퇴하는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즉각적인 지상군 투입이 불가피하다는 상황 보고를 했다. 맥아더 장군의 보고를 받은 트루먼 대통령은 6월 30일 지상군의 투입을 명령함으로써 지상군 사용에 대한 제한은 해제되고 해·공군도 북한지역에까지 작전지역을 확대했다.
1950년 7월 7일 UN 안전보장이사회는 미국으로 하여금 UN군 사령관을 임명하도록 요구함과 동시에, UN 회원국에는 그들의 파견부대를 미국 장성 가운데 임명한 UN군 사령관의 지휘하에 둘 것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함에 따라 트루먼 대통령은 7월 8일 맥아더 장군을 UN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이로써 역사상 처음으로 UN군이 구성되고 미국, 영국, 프랑스,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뉴질랜드, 남아프리카공화국, 터키, 타이, 그리스, 네덜란드, 콜롬비아, 에티오피아, 필리핀, 벨기에, 룩셈부르크 등 16개국이 육해공군의 병력과 장비를 지원했으며, 단일 지휘체계하에서 국제경찰기능을 수행하게 되었다.
경과
개요
전쟁과정은 다음의 4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제1단계
북한군의 남침이 개시된 1950년 6월 25일부터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개시 이전까지로서 북한군의 공세단계이다.
초기 단계에서 한국군은 전투력의 열세(병력은 2 대 1로 열세했고, 장비면에서 한국군은 대공포·전차·자주포·전투기가 전혀 없었으며 기타 장비들도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열세였음)와 지휘체계의 결함으로 북한군에 완전히 압도되었으며 저항다운 저항을 해보지도 못하고 계속 퇴각했다. 사태의 급박성을 인식한 맥아더 장군은 긴급히 S.B. 스미스 중령이 이끄는 특수임무부대를 공수하여 오산 일대에서 북한 공산군의 남진을 저지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그 뒤를 이어 W.F. 딘 소장이 이끄는 미 제24사단과 그 후속부대로서 W.H. 워커 중장의 미 제8군 휘하부대의 계속적인 투입으로 북한군의 남진속도를 둔화시킨 결과, 1950년 8월경에는 낙동강을 경계로 하는 부산교두보의 방어선을 구축, 체계적인 방어를 할 수 있었다.
제2단계
UN군의 공세단계로서 1950년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의 진두 지휘하에 1개 군단병력이 투입된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함으로써 UN군은 방어에서 공세로 전환했다(인천상륙작전). 9월 28일 서울을 탈환하고 경인지역을 장악한 UN군에 의하여 보급로와 후퇴로를 차단당한 북한군은 남북으로부터의 협공으로 모든 장비를 버리고 투항하거나 산악지대로 도피함으로써 북한군 주력은 거의 궤멸상태에 빠졌으며, UN군은 급속도로 북진을 계속했다.
UN군이 급속히 진격하여 38˚선에 접근하게 되자 미국 합동참모본부는 맥아더 장군에게 북한군을 섬멸하도록 명령한 데 이어 9월 30일 트루먼 대통령은 북한으로의 진격을 승인했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은 10월 1일 한국군만을 38°선 이북으로 진격시키고 기타 UN군은 38˚선에서 대기했다가 10월 7일 UN 총회에서 UN군의 북한 진격을 허용하는 결의안이 통과된 후 북진을 했다. UN군은 10월 20일 평양을 탈환하고 10월 26일 일부 부대가 압록강변에 도달했다.
제3단계
1950년 11월부터 1951년 7월 휴전회담을 개시하기까지의 기간으로 북한군의 붕괴로 UN군에 의한 북한 전지역의 점령이 임박하게 되자 대규모의 중국인민지원군이 개입함으로써 전쟁은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되었다.
중국인민지원군의 '인해전술'에 압도당한 UN군은 북한으로부터 철수해 1951년 1월 4일 서울이 또다시 공산군의 수중에 들어갔으나, 길어진 병참선에 미국 공군의 강렬하고 지속적인 공격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은 중국인민지원군은 공세가 크게 둔화되어 UN군은 서울 남쪽 약 50km 지점의 평택과 원주를 연결하는 방어선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1951년 2월 UN 총회에서는 공식적으로 중국을 침략자로 규정했다. 차량사고로 사망한 워커 장군의 후임으로 미국 제8군사령관에 부임한 M.B. 리지웨이 장군은 UN군의 사기를 회복하고 1월말에는 방어에서 공세로 전환해 서울을 재탈환하고, 3월 31일 중동부전선에서는 38˚선을 횡단하여 북진을 계속했다.
이때 맥아더 장군은 중국인민지원군이 개입한 이상 전장(戰場)을 한반도에 국한할 필요가 없음을 강조하고 중국본토의 전략적인 표적에 대한 공격을 공공연히 주장했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의 이와 같은 행위를 군통수권자인 대통령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한 트루먼 대통령은 1951년 4월 11일 맥아더 장군을 모든 직위에서 전격 해임하고 리지웨이 장군을 그 후임으로 임명했다.
이때부터 UN군측과 공산군측은 전쟁의 제한에 관한 묵시적인 합의하에 상호 대공세를 피함으로써 전선의 이동이 없는 진지전의 형태로 전환되었다.
제4단계
휴전회담으로 인한 소강상태 기간으로 양측의 전선이 지금의 휴전선 부근에 이르렀을 때 미국 행정부는 한반도 내에서의 전력의 낭비는 유럽에서의 소련의 침공을 초래할지도 모른다는 판단 아래 전투 종결을 희망했으며, 이는 전쟁의 염증에 시달리고 있는 북한이나 중국의 의도와도 어느 면에서는 일치하는 것이었다.
1951년 6월 23일 UN 주재 소련 대표 Y.A. 말리크가 미국에서의 라디오 방송을 통해 교전 당사자들이 38˚선을 경계로 전쟁 이전의 위치로 복귀할 것을 제의했다. 미국은 이를 공산군측이 휴전을 희망하는 신호로 받아들이고 신임 UN군 사령관인 리지웨이 장군으로 하여금 1951년 6월 30일 공산군측에 대하여 휴전제의방송을 하도록 했으며, 공산군측이 이를 수락함으로써 7월 10일부터 개성에서 휴전회담이 개시되었으나 일련의 사건 후에 회담장소는 판문점으로 변경되었다.
그러나 휴전에 임하는 양측의 태도는 전적으로 상반된 것이었다. 휴전회담중 가장 논쟁이 심했던 3가지 사항은 첫번째는 모든 외국군은 한반도에서 철수하자는 공산군측의 주장과 이에 반대하는 UN군측의 주장이었다. 2번째의 주요쟁점은 양측의 경계선 문제로서 공산군측은 북위 38˚선으로의 복귀를 주장한 반면 UN군측은 현 전선의 유지를 주장했다.
3번째는 가장 격렬했던 논쟁으로 포로교환 문제로서 공산군측은 모든 포로는 무조건 송환시킨다는 원칙을 주장한 데 반해 UN군측은 희망자만 송환시킨다는 원칙을 제시한 것이다. 이때 UN군이 수용하고 있던 17만 1,000명의 포로 가운데 약 5만 명은 북한이나 중국 등 공산국가로 송환되는 것을 거부했다. 포로송환 문제로 휴전회담은 결렬 직전까지 갔으며 8개월 간 회담이 중단되기도 했으나, 1953년 1월 D.D.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고, 1953년 3월 소련의 지배자 스탈린의 사망으로 새로운 분위기가 조성됨에 따라 회담은 재개되고 포로교환 문제도 합의에 도달했다.
양측은 현재의 군사분계선을 경계로 각각 2km씩의 비무장지대를 설정하고, 1953년 7월 27일 휴전조약에 서명함으로써 전투행위는 종식되었다.
결과
6·25전쟁은 3년 1개월간 계속되었으며 전쟁으로 인한 인명피해는 민간인을 포함하여 약 450만 명에 달한다. 그 가운데 남한의 인명피해는 민간인 약 100만 명을 포함한 약 200만 명이며, 공산진영의 인명피해는 100만 명의 민간인을 포함하여 약 250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군인 전사자는 한국군이 22만 7,748명, 미군이 3만 3,629명, 기타 UN군이 3,194명이며, 중국인민지원군과 북한군의 정확한 전사자수는 아직까지 확인할 수 없는 상태이다. 전쟁기간중 한국은 43%의 산업시설과 33%의 주택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휴전협정 제60조에 의거 1954년 4월 제네바에서 대한민국과 UN 참전 16개국 그리고 북한과 중국 및 소련이 참석한 가운데 한반도 문제의 정치적 해결을 위한 정치회담이 개최되었다.
한국과 UN 참전국측은 UN 감시하에 남북한 토착인구비례에 의한 자유총선거 실시와 그 결과에 따른 민주적인 통일정부수립을 주장한 데 반하여, 공산군측은 오로지 주한 UN군의 철수만을 주장함으로써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같은 해 6월 회담은 결렬되었으며, 남북한은 항구적인 평화가 아닌 휴전상태에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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