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소진 요리사가 게국지에 들어갈 호박을 자르고 있다. 충청도 음식인 호박지(늙은 호박으로 담그는 김치)는 저렇게 납작하고 골이 깊은 호박으로 담근다. 그 지역에서는 저런 호박을 맷돌호박이라고 부른다.
저녁상 코스요리의 본식 중 하나인 게국지는 내 기대하고는 많이 달랐다. 곰삭은 우거지에 능쟁이 게를 겨울 한 철 품고 있던 게국이 섞여 발효취가 코를 찌르는 음식을 기대했는데 생 채소에 꽃게장 국물을 넣고 끓였다. 그래도 잘 우린 소고기육수를 밑국물로 써서 맛은 좋았다.
이건 이북음식이 아니지 않느냐고 물었다.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태안반도 음식이긴 하지만 뿌리는 이북 사람들이라는 얘기를 태안의 나이 많은 어른들에게 들었다. 6.25 때 황해도 피란민들이 태안에 많이 내려왔다. 개성·사리원 분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분들 정착 초기에 보니 태안 사람들이 게장 먹고 남은 간장을 버리더란다. 피란민들은 고향에서 해 먹던 음식이 생각나 게국을 얻어다가 우거지 찌개 끓일 때 넣어 간을 맞췄다. 그걸 본 지역 사람들도 따라 하게 됐다. 그 음식이 게국지로 자리잡았다고 하더라. 충청도식 호박지(늙은 호박으로 담그는 김치)에 게국을 부어 끓인 호박지찌개는 발전된 형태다.”
게국지는 게국·우거지의 합성어다. 게국은 게장을 먹고 남은 간장을 말한다. 요즘 먹는 꽃게 간장게장이 아니다. 능쟁이라는, 서리가 내리면 나타나 갯벌에 기어 다니는 작은 게로 담근 게장이다. 게국지는 TV에 나오듯 꽃게를 잘라 넣고 담근 김치로 찌개를 끓이는 고급음식이 아니었다. 어렵게 사는 사람들의 연명음식이었다. 30년 전 내가 처음 접한 게국지도 마을 모퉁이 납작한 시골집에서 맛을 본 것이다.
실제 태안군에는 황해도촌이 있다. 태안읍 평천리의 한 마을이다. 태안군지(2012년, 5권 292쪽)는 “황해도촌은 평섶의 동남쪽에 형성된 마을로써 한국전쟁 때 피난 온 황해도 사람들이 주로 많이 모여 살아서 붙여진 이름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우리 음식에 대한 탐구가 이만큼 깊은 박씨는 공중파 방송 아침뉴스에 매주 2회 ‘지금이 제철’이라는 식재료 소개 코너에 2년 가까이 고정출연하고 있다. 제철 식재료에 대해 요리 아이디어나 팁을 알려주고 리포트에서 시청자에게 권하는 음식 시연도 한다. 이런 내공으로 매달 새롭게 바꿔갈 메뉴의 ‘9월 제철 밥상’은 이렇다.▷낮밥(한상차림 8000원) 밥, 제육볶음 혹은 오징어보쌈(택일), 쌈채와 콩나물국(또는 김칫국)에 8찬(청귤물김치, 전, 뚱딴지콩범벅, 달걀찜, 제철 나물, 삼채장아찌, 고구마순김치 또는 오이소박이, 오이지 또는 고추무침) ▷낮밥 추가메뉴로 제철 생선구이, 차돌박이 된장찌개(각 7000원), 연잎밥(3000원) ▷계절 특선 요리로 여름엔 초계탕, 겨울엔 가릿국밥(각 1만2000원)이 있다.
▷저녁상(코스요리 1인 2만5000원)은 입맛다심(흑임자죽·부각)-전식차림(제철 채소튀김, 청귤소스 해산물 물회)-본식차림(육회·게국지·밥과 9찬)-입가심과 잡과편(흑미생강식혜) 순서로 나온다. ▷저녁 단품 안주는 간재미회무침(2만5000원), 돼지갈비강정(2만원), 닭튀김(1만8000원)이 있다.개업 날 ‘낮밥’을 먹으러 갔더니 8찬 중 전·뚱딴지콩범벅은 이미 동나고 대타가 나왔다. 뜻밖에도 손님이 많았다. 좌석의 2배가 넘는 손님이 점심 2시간 사이에 몰렸다고 한다. 내가 선택도 안 했는데 제육볶음 한상차림이 나왔다. 9월의 국인 콩나물국을 한 술 뜨고선 놀랐다. 부드럽고 구수하고 감칠맛 나는 게 국 한 대접이면 밥 한 사발 문제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멸치국물과 집간장으로 낸 맛이란다.
씻은 묵은지, 소고기볶음고추장, 단무지로 구성한 쌈채 한 접시. 배추 줄기 속속들이 맛이 든 묵은지에서 과일 향이 스쳤다. 단무지는 색소나 설탕 대신 치자로 색을 내고 유자로 맛을 냈다.
초계탕은 첫술에 비릿하게 닭고기 냄새가 스쳤다. 박소진 요리사는 닭고기이니까 닭 냄새가 안 나면 이상한 거라는 소신을 갖고 있다. 신맛은 막걸리식초, 단맛은 직접 곤 조청으로 냈다.
닭고기로 만들었으니 닭 비린내 나고, 돼지고기 음식에서 돼지 냄새 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그게 재료의 맛 아닌가. 이렇게 말했다가 요리선생님들한테 야단맞았다. 나는 내 생각을 얘기했고, 생각대로 요리한다. 재료의 특색으로서 냄새가 있어야 한다. 음식 맛을 해치면 문제지만 그렇지 않은 범위에서 있는 게 맞는다고 생각한다. 내가 만든 식초와 조청만으로 맛을 내니까 설탕과 빙초산에 길들여진 사람들에겐 싱겁고 밋밋하다. 가오리무침이 메뉴에 있는데 빙초산 전혀 안 쓰니 맛이 밋밋할 거다. 겨자는 많이 넣으니 냉채와 구별이 안 돼 줄였다. 하지만 잘못된 음식에 익숙해져 왜곡된 손님 입맛에 맞추는 음식보다 내 진심을 담아서 제철 재료로 제대로 만든 음식을 상에 낼 계획이다.”
메뉴 중엔 닭튀김도 있다. 의외라는 생각이 들지만 사연이 있다. 박씨는 한때 연봉 1억 조건으로 BBQ 계열사 고문을 맡아 근무한 적이 있다. 그 회사에 500만~1500만원씩 받고 닭튀김 레시피 여러 건을 팔았을 정도로 ‘치킨 고수’다.
그는 페이스북을 열심히 한다. 지난 7월 2일 올린 글을 보니 마지막 문장을 이렇게 썼다. “내가 좋아하는 요리만 모아서 파는 식당 한번 해보고 싶다.” 이번에 연 ‘수작반상’이 그런 음식점이겠다. 그가 말한 ‘좋아하는 음식’이란 ‘잘하는 음식’을 겸손하게 표현한 것이리라.
개업 초라 안정이 덜 된 부분이 있다. 내가 간 첫날 공교롭게도 돈이 5만원짜리밖에 없었다. 잔돈이 없어서 받을 수 없단다. 카드는 된다고 해서 냈더니 5분을 이리 저리 만지다가 안 된다고 했다. 밥값 8000원을 외상으로 달고 나왔다. 대학 졸업하고 외상은 처음이다. 메뉴도 시장 상황에 따라 조금씩 바뀌고 있다.
20평 음식점에 좌석은 25석(4인석-3인석 각 3개, 2인석 2개). 영업시간 11시30분~오후 10시(쉬는 시간 오후 3시~5시/카페는 오전 10시~오후 10시). 매주 월요일 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