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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전서』에 나오는 ‘도야지 슌대’를 기초로 ‘순대실록’에서 재창조한 야채백순대와 선지순대가 함께 나오는 ‘전통슌대’. 이름이 ‘슌대’인 것은 고서에 전거를 두고 있다는 표현이다.
이 집 단골손님인 철학자 도올 김용옥 선생이 책에 희서(喜序)를 써줬다. 첫 머리에 “이 책은 순대를 만들고 연구하고 파는 한 여인이 ‘순대’라는 개념을 화두로 삼아 인류문명사 전반을 헤매고 다닌 문화인류학적 탐색의 보고서이다. 나는 육경희와 이웃하면서, 그가 만든 음식들을 먹으며 그의 인(仁)한 마음과 성실한 삶의 자세에 감복하였고, 또 이날까지 그 음식으로 인하여 강건한 신체를 유지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즐겁게 고백한다”고 상찬했다. 참으로 부럽고 샘 나는 찬사다. 특히 ‘문화인류학적 탐색의 보고서’라는 규정은 책의 요체를 명쾌하게 밝혀준다.이 책은 지금까지 한국 전통음식 명인들의 ‘음식 족보’에도 이름이 없던 순대에 대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이론체계를 세우고 온 나라와 세계의 현장을 발로 누비며 확인해 집대성한 ‘순대학 개론’이다. 저자인 육 사장 말마따나 ‘순대 집 아줌마’가 스스로 제기한 질문에 답을 찾다가 순대 연구자가 되어 책까지 내게 된 것이다.이렇게 열성적이고 집요한 주인이 만드는 순대는 맛이 어떨까. 그건 늘 붐비는 식당의 손님들이 입증한다. 메뉴 하나 하나가 흔한 관행대로 만든 음식이 아니다. 그 중 ‘전통슌대’는 『시의전서』에서 발견한 ‘도야지 슌대’를 복원하다가 개발한 제품이다. 책에는 “돼지의 창자를 깨끗이 씻고 숙주·미나리·무를 데쳐 배추김치와 같이 두부를 섞은 다음 파·마늘·생강을 많이 다져 넣고, 깨소금·기름·고춧가루·후춧가루 각색 양념을 섞어 피와 함께 주물러 창자에 넣고 부리를 동여 삶아 쓴다”고 기록돼 있다. 그대로 ‘슌대’를 복원해봤다. 질척하고 이상한 순대가 나왔다. 맛있지 않았다. 2013년 남양주 국제슬로푸드대회에서 ‘슌대’ 복원 과정을 시연하고 강연도 하면서 선보였지만 판매에 부적절하다는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고서 속 ‘슌대’ 레시피에 양배추·당근 등 현대적 재료 10여 가지를 더해 모두 22가지 재료가 들어가는 새로운 순대를 만들었다. 법고창신(法古創新), 옛 기록의 방법을 약간 변형해 재창조한 것이다. 선지는 10~11% 정도를 넣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것도 수백 번의 시행착오 끝에 알아냈다. 이름을 ‘전통슌대’라고 한 것은 『시의전서』 속 ‘도야지 슌대’의 전통을 이어간다는 뜻을 새기기 위함이다.순대스테이크를 만드는 과정도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육 사장은 자신이 예전에 순대를 좋아하지 않았던 사실을 떠올리며 그런 사람도 거부감 없이 순대를 먹게 하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했다. ‘순대를 구워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직원들은 반발했다.소시지도 아니고 순대는 구울 수 없다고 했다. 무조건 구워오라고 했더니 굽다가 터지기 일쑤였다. 반발하던 조리실장은 가능성을 보았는지 속재료를 바꿔 만들어보겠다고 했다. 수많은 테스트 끝에 견과류가 잔뜩 들어간 순대가 탄생했다. 5개월이 걸렸다. 주방이 아닌 홀에 순대 굽는 전기그릴들을 설치하고 야심 차게 출시했다. 결과는 처참했다. 하루 5~6개밖에 팔리지 않았다. 다른 순대에 비해 비싸고 생소한 메뉴였다. 직원들은 만들기도 어렵고 판매도 안 되는 메뉴를 없애자는 의견을 쏟아냈다.
‘순대 혁신’이라는 역사적 시도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러던 중 방송국에서 ‘이상한 순대’를 취재하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진행자인 일본인 사유리가 칼로 썰어 먹는 순대를 보며 “꼭 스테이크 같다”고 말하는 게 방송에 나간 후 손님들이 ‘순대스테이크’를 조금씩 찾기 시작했다. 이후 여러 미디어에서 앞다퉈 소개하면서 인기 메뉴로 자리 잡았다. 이름도 처음 ‘젊은 순대’에서 ‘순대스테이크’로 바꿨다. 현재는 ‘순대실록’ 대표메뉴이자 효자상품이 됐다.
순대 집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음식은 순대가 아니라 순댓국이다. 음식점을 인수하고 처음 바꾼 것은 국물이었다. 사골을 16시간 고아 먹고 나면 입술이 끈적거릴 정도로 정말 진하게 국물을 뽑으니 맛이 좋았다. ‘이대로 팔자’ 생각하고 MSG 넣지 않고 순댓국을 만들었다.보약 같이 진하게 사골을 끓여냈으나 손님들이 먹을 때는 맛있다고 하지만 다시 오질 않았다. 맛이 없다고 하는 손님도 있었다. 단골들도 국물이 너무 진해 끈적이는 것이 부담스럽다는 이야기를 해줬다. 1주일 만에 백기를 들었다. ‘익숙한 입맛’을 공급자가 한 순간에 거스를 수 없다는 깨달음 하나를 더 얻었다. 진하다고 다 좋아하는 것이 아니었다. 고는 시간을 계절 따라 여름엔 짧게, 겨울엔 길게 14±1시간으로 맞춰 끈적이지 않으면서도 진한 맛의 국물로 바꿨다. 신선한 돼지뼈와 돼지머리로 육수를 끓여내 개운하면서도 깊은 국물 맛을 냈다. 잡내 제거를 위해 일반적으로 넣는 한약재는 빼기로 했다. 힘들고 재료가 많이 들어가지만 재료 자체의 육수만으로 맛을 내고 싶었다. 거기에 건지 양을 이전보다 30% 늘렸다. 질과 양을 높이고 적정한 값을 받자는 현재의 영업 방침은 이때 만들어졌다. ‘순대실록’의 순댓국은 한 그릇에 7000원이다. 다른 곳보다 비싸지만 좋은 재료로 만들어 많이 주기 때문에 적절한 가격이라는 원칙으로 밀고 나간다. 음식만 좋으면 손님들은 조금 비싸도 기꺼이 지갑을 연다.육 사장이 하는 일마다 성공을 한 것은 아니다. 그는 처절할 정도로 호된 실패를 겪고 극단까지 경험한 사람이다. 2003년 5월 대학로에서 매장 120평짜리 아이스크림 가게를 열었다. 첫 사업이다. 한국에서 가장 넓은 아이스크림 가게라는 타이틀을 차지했다. 매장을 여는 데 보증금 5억, 개업 준비에 2억2000만원이 들어갔다. 월세가 한 달에 2500만원, 관리비까지 3000만원이 들어가는데 하루 매출은 30만원밖에 안 됐다. 모두가 경악했다. 월 3000만~4000만원의 적자가 빚으로 쌓여갔다. 누적적자가 3억에 이르던 12월 아이스크림 가게는 냉동고 과열로 화재가 났다.
건물주는 남도 한정식 집을 해보라고 강권했다. 임대계약이 10년으로 돼있었다. 2004년 5월 등 떠밀려서 ‘남도이야기’를 개업했다. 초기에는 손님 앞에서 무릎 꿇고 빈 기억밖에 없다. 건물주가 참견해 메뉴가 너무 많아졌고 주방의 처리 능력을 넘어 음식이 늦어지니까 손님들 불평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조리실장은 호통만 치고 주인을 얕봤다. 손님들 불평을 전하는 직원들에게 도마에 칼을 꽂으며 고래고래 야단쳤다. 개업 20여일 만에 두 달치 월급을 주고 내보냈다. 억지 연명을 하다가 이래서는 안 되겠다, 남도에 가서 답을 찾자 생각하고 3개월을 돌아다니며 식재료를 중심으로 메뉴를 재구성했다. 남대문시장 갈치조림 골목을 열 번도 넘게 찾아가 애걸복걸한 끝에 할머니 비법을 전수했다. 요리의 기초 실전훈련도 계속했다.
2005년 9월 식당을 전면 리셋했다. 그리고 이틀 만에 온몸이 퉁퉁 부으면서 쓰러져 서울대병원에 9일을 입원했다. 과로와 스트레스가 원인이었다. 퉁퉁 부은 모습을 본 직원들은 펑펑 울었다. 이 일을 계기로 모든 직원과 대동단결하게 됐다. 그렇지만 하루 300만원은 팔아야 현상유지가 가능한데 100만원도 쉽지가 않았다.2004년 12월 처음 흑자가 났다. 이때까지 들어간 돈이 20억이었다. 하도 기뻐서 은행에 가서 1만원 신권 1000장을 찾아다가 직원들에게 골고루 나눠줬다.당시 사장 월급은 150만원. 그것도 늦게 퇴근하는 직원 차비도 주고 소소한 체면유지비로 쓰고 나면 집에는 한 푼도 못 가져갔다. 2005년부터 본격적으로 손님이 들었다. 미디어에도 조금씩 기사가 나갔다. 그 해 12월에는 정말 놀랍게도 하루 1200만원의 매출을 올린 날도 있었다.좌석마다. 2시간 단위로 하루 5회전을 돌렸다. 2008년까지 성공가도를 달렸다. 여기 저기 기사도 나가고 해마다 상도 받았다. 사업으로는 아주 성공을 했는데 실속이 없었다. 손에 쥘 돈이 남지 않았다. 돈 벌어서 건물주에게 다 바친 셈이 됐다. 임대료가 월 2500만원이었는데 음식 팔아서 매달 그 돈을 벌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임대료 조정협상을 했으나 합의가 안 돼 잘 되는 음식점을 접었다. 세금·임대료를 밀리지 않고 규정대로 다 지키면 이익을 내기 정말 어려운 게 외식산업이라는 현실을 절감했다.
성공폐업이었지만 벌어 둔 돈은 없었다. 시련 속에서 확실하게 공부는 했다. 대학로는 비싼 음식 팔기 어려운 동네라는 사실을 알았다. ‘단품 박리다매(薄利多賣)’로 사업 방향을 재정립했다. 좋은 재료를 써야 하고 가공 단계가 단순한 음식이 좋다는 원리도 터득했다. 2011년 초 권리금 5억을 주고 순대 집을 인수했다.2002년부터 대학로에서 영업하고 있는 ‘신의주 손 찹쌀순대’였다. 요즘 상호에 ‘신의주’가 들어가는 순대 집의 원조 격이다. 이 집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나가서 상표등록이 안 돼 있는 이름을 퍼트린 거다. 출퇴근 길목에 있어 그 집 앞을 지나다니며 6년간 노리던 집이다. 권리금(5억), 보증금(1억)에 개업비용까지 7억 정도의 돈이 들었다. 돈을 구하다 구하다 못해 제3금융권 돈까지 썼다.오래 꿈꾸던 순대 집을 그렇게 어렵게 열었다.
2013년 9월 어느 정도 자신의 음식점으로 자리가 잡혔다는 생각이 들자 상호를 바꿨다. 개성 있는 이름이 없을까 생각했다. 2004년부터 5년 동안 갖은 고생을 하며 성공 스토리를 일궜던 한정식집 ‘남도이야기’를 잇는 ‘순대이야기’와 역사성을 강조한 ‘순대실록’을 놓고 1년 넘게 저울질했다. 순대의 역사를 다시 쓰겠다는 다짐을 담아 ‘순대실록’으로 정했다. 육 사장은 “이름을 그렇게 짓고 보니 음식문화에 대한 책임감이 더 분명해졌다”고 말했다. 간판을 바꿔 달자 첫 반응은 “무겁다”는 것이었다. “실록이 무슨 말이냐”고 묻는 명문대 학생도 있었다. “조선왕조실록 모르냐”고 물으니 “모른다” 하던 웃지 못할 대답을 들었다. 그렇지만 낯설어서 오히려 특징이 되고 대학로를 오가는 사람들에게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름이 된 듯하다. 간판과 책의 제자(題字)로 쓴 글씨는 캘리그라피 작가 강병인씨가 썼다.육 사장은 어려웠을 때를 회상하면 이런 말을 했다. “돈 한 푼 없고 더 잃을 것도 없을 때, 결국 무(無)로 돌아가는구나 생각하니 두려운 것이 없더라. 죽음도 생각했다. 모든 걸 내려놓으니까 생각이 달라졌다. 이제 잃을 것은 없고 얻을 것만 있다고. 무모할 정도의 용기가 샘솟았다. 하지만 음식 공부 열심히 하고 사업도 본궤도에 올라 안정되면서 직원들이 늘어나니까 다시 두려움이 생겼다. 저 사람들 삶을 내가 지켜줘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이다. 예전엔 일을 저지르면서 시작했는데 이제는 책임감이 앞선다. 사업 제안이 많이 들어오지만 두려워서 못 한다.”
그의 회사 (주)희스토리푸드는 현재 매장 7곳, 유통회사·순대제조회사 각 1곳을 운영하고 있다. 충남 당진에 식재료 조달을 위한 농장도 가꾼다. 전체 정규직원 89명, 알바생이 30~40명. 단순한 음식점이 아니다.회사 모토를 ‘함께 여는 새 날’로 정한 그가 꿈꾸는 미래는 외식산업 종사자가 존중 받고 좋은 외식 음식점을 운영하는 것이다. “오래 남는 외식기업, 100년 기업으로 이어가는 꿈이 있어요. 순대는 시대를 반영하고 문화가 녹아 든 음식이라고 생각해요. 순대를 통해 음식문화의 한 가닥을 정리하고 세계로 확산하는 데 중심 역할을 하고 싶어요.“장기구상에 따라 그는 새해 특별한 계획을 세웠다.
자신의 책에서 소개한 고서 속 순대를 복원하는 작업을 순차적으로 진행할 예정이다. 『주방문(1600년대 말)』의 팽우육법(烹牛肉法), 『소문사설(1740년께)』의 어장증(魚腸蒸/대구 창자), 『증보산림경제(1766년)』와 『규합총서(1809)』의 우장증방(牛腸蒸方), 『임원경제지(1800년대 초)』의 관장방(양 창자), 『농정회요(1830년』의 도저장과 양두자(돼지 위), 『시의전서』의 어교(민어 부레)순대 등이다.
‘순대실록’에 어떤 순대가 새롭게 기록될지 벌써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