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 일본인들이 명성황후 시해한 장소 침실이 아니고 마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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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진(李泰鎭)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12일, 일본 외무성 부설 외교사료관에서 최근 찾아낸 기밀 문건 ‘한국 왕비 살해 일건(一件) 제2권’에 수록된 보고서 사본을 공개했다.
당시 일본의 경성 주재 일등영사 우치다 사다쓰지(內田定槌)가 작성한 이 보고서는 을미사변 직후 직접 현장을 조사한 뒤 사건 발생 후 석 달이 채 안된 1895년 12월 21일 본국에 진상을 보고한 내용으로, 신빙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보인다.
보고서는 1895년 10월 8일 새벽 경복궁에 난입한 일본인들이 고종과 명성황후의 침소가 있던 건청궁(乾淸宮)에 침입한 경로와 황후 시해 지점, 황후의 시신을 잠시 안치했던 장소와 시신을 불태운 지점을 표시했다.
경복궁 내부의 세밀한 평면도에 표시된 침입 경로에 따르면 일본인들은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으로 침입, 경회루 왼쪽을 지나 북쪽으로 계속 올라가 건청궁으로 들어갔다.
보고서는 당시 건청궁 내 장안당(長安堂)에는 고종이, 곤령합(坤寧閤)에는 명성황후가 거처하고 있었으며, 이중 어딘지 확인되지 않는 장소로부터 명성황후를 찾아냈다고 기록했다.
이어 일본인들은 장안당과 곤령합 사이 뜰로 황후를 끌고와 시해했으며, 황후의 시신을 곤령합의 일부인 동쪽 건물(옥호루·玉壺樓)의 방 안으로 잠시 옮겨 놓았다가 건청궁 동쪽의 인공산인 녹산(鹿山) 남쪽에서 시신을 불태웠다고 기록돼 있다.
학계에선 그동안 폭도의 일원이었던 일본인과 목격자 등의 수기와 증언을 근거로 명성황후가 옥호루 실내에서 시해된 것으로 여겨 왔으며, 이를 토대로 광복 이후 정부에선 옥호루 근처에 ‘명성황후 조난지지비(遭難之地碑)’를 세우기도 했다.
이태진 교수는 “실내가 아닌 궁궐 마당에서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시해됐다는 것은 당시의 상황이 자객에 의한 암살이 아니라 군사작전과 다름없는 궁성 점령 사건이었음을 의미한다”며 “일본이 살해장소를 오랫동안 은폐했다는 점에서 그들 스스로 이 사건이 움직일 수 없는 만행이었다는 것을 인정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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