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고서화

선화공주 로맨스 뒤흔든 미륵사지 사리봉영기

산야초 2018. 8. 2. 23:37

[이한상의 발굴 이야기] [4]

선화공주 로맨스 뒤흔든 미륵사지 사리봉영기

  •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입력 : 2017.07.26 03:10

    2009년 1월 14일. 미륵사지 석탑 해체 현장에 사람들이 모였다. 얼마 전 석탑 중앙의 심주(心柱)에 대한 레이저 물리 탐사 중 발견된 동공(洞空)의 흔적이 사리공(舍利孔)인지 확인할 참이었다.

    현장 책임을 진 국립문화재연구소 배병선 실장은 조바심이 났다. 석탑 해체 작업을 시작한 지 7년 3개월이 지났지만 속도는 더뎠고 큰 성과는 없었다. 1층은 해체하지 말고 그대로 활용하자는 의견까지 나왔으나 전면 해체라는 원안을 고수한 그였기에 부담은 더욱 컸다.

    금제사리봉영기(앞면), 가로 15.3㎝, 국립미륵사지유물전시관.
    금제사리봉영기(앞면), 가로 15.3㎝, 국립미륵사지유물전시관.
    오후 3시. 준비를 마치고 육중한 심주 윗돌을 들어 올리자 번쩍 빛이 났다. 아랫돌 한가운데에 네모난 사리공이 숨겨져 있었고 그 속에서 금빛 찬란한 유물들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숨죽이며 지켜보던 사람들은 모두 환호했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어떤 연유로 불사리를 모셨는지 기록한 봉영기(奉迎記)였다. 빼곡히 새겨진 글귀 가운데 '우리 백제의 왕후께서는 좌평 사택적덕의 따님' '재물을 희사하여 가람을 세우고'라는 표현이 눈에 띄었다. 금판을 수습해 뒷면을 보니 '대왕폐하'라는 네 글자가 선명했다. 대왕은 백제 무왕이었다. 639년 기해년 정월 29일에 사리를 봉영했다는 내용도 있었다. 사택왕후의 발원으로 이 석탑을 만들었음이 밝혀짐에 따라 서동과 결혼한 신라 선화공주가 백제 왕비가 되어 미륵사 창건을 발원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문을 갖게 됐다.

    발굴은 쉽지 않았다. 사리공이 가로세로 각 25㎝, 깊이 26.5㎝밖에 되지 않는 좁은 공간이었고 그 속에 크고 작은 유물이 가득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유물을 수습하고 발굴을 끝낸 것은 30시간이 지난 이튿날 저녁 9시. 출토된 유물은 무려 72건 9947점에 달했다.

    석탑 1층을 그대로 두고 복원하자는 의견을 따랐다면 사리공 속 유물들은 지금도 여전히 미지의 공간 속 타임캡슐로 남아있었을 것이다. 이 발굴을 통해 우리는 미륵사지 석탑의 탄생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지만 '세기의 로맨스' 여주인공, 선화공주를 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