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상의 발굴 이야기] [4]
선화공주 로맨스 뒤흔든 미륵사지 사리봉영기
입력 : 2017.07.26 03:10
2009년 1월 14일. 미륵사지 석탑 해체 현장에 사람들이 모였다. 얼마 전 석탑 중앙의 심주(心柱)에 대한 레이저 물리 탐사 중 발견된 동공(洞空)의 흔적이 사리공(舍利孔)인지 확인할 참이었다.
현장 책임을 진 국립문화재연구소 배병선 실장은 조바심이 났다. 석탑 해체 작업을 시작한 지 7년 3개월이 지났지만 속도는 더뎠고 큰 성과는 없었다. 1층은 해체하지 말고 그대로 활용하자는 의견까지 나왔으나 전면 해체라는 원안을 고수한 그였기에 부담은 더욱 컸다.
현장 책임을 진 국립문화재연구소 배병선 실장은 조바심이 났다. 석탑 해체 작업을 시작한 지 7년 3개월이 지났지만 속도는 더뎠고 큰 성과는 없었다. 1층은 해체하지 말고 그대로 활용하자는 의견까지 나왔으나 전면 해체라는 원안을 고수한 그였기에 부담은 더욱 컸다.
오후 3시. 준비를 마치고 육중한 심주 윗돌을 들어 올리자 번쩍 빛이 났다. 아랫돌 한가운데에 네모난 사리공이 숨겨져 있었고 그 속에서 금빛 찬란한 유물들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숨죽이며 지켜보던 사람들은 모두 환호했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어떤 연유로 불사리를 모셨는지 기록한 봉영기(奉迎記)였다. 빼곡히 새겨진 글귀 가운데 '우리 백제의 왕후께서는 좌평 사택적덕의 따님' '재물을 희사하여 가람을 세우고'라는 표현이 눈에 띄었다. 금판을 수습해 뒷면을 보니 '대왕폐하'라는 네 글자가 선명했다. 대왕은 백제 무왕이었다. 639년 기해년 정월 29일에 사리를 봉영했다는 내용도 있었다. 사택왕후의 발원으로 이 석탑을 만들었음이 밝혀짐에 따라 서동과 결혼한 신라 선화공주가 백제 왕비가 되어 미륵사 창건을 발원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문을 갖게 됐다.
발굴은 쉽지 않았다. 사리공이 가로세로 각 25㎝, 깊이 26.5㎝밖에 되지 않는 좁은 공간이었고 그 속에 크고 작은 유물이 가득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유물을 수습하고 발굴을 끝낸 것은 30시간이 지난 이튿날 저녁 9시. 출토된 유물은 무려 72건 9947점에 달했다.
석탑 1층을 그대로 두고 복원하자는 의견을 따랐다면 사리공 속 유물들은 지금도 여전히 미지의 공간 속 타임캡슐로 남아있었을 것이다. 이 발굴을 통해 우리는 미륵사지 석탑의 탄생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지만 '세기의 로맨스' 여주인공, 선화공주를 잃고 말았다.
발굴은 쉽지 않았다. 사리공이 가로세로 각 25㎝, 깊이 26.5㎝밖에 되지 않는 좁은 공간이었고 그 속에 크고 작은 유물이 가득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유물을 수습하고 발굴을 끝낸 것은 30시간이 지난 이튿날 저녁 9시. 출토된 유물은 무려 72건 9947점에 달했다.
석탑 1층을 그대로 두고 복원하자는 의견을 따랐다면 사리공 속 유물들은 지금도 여전히 미지의 공간 속 타임캡슐로 남아있었을 것이다. 이 발굴을 통해 우리는 미륵사지 석탑의 탄생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지만 '세기의 로맨스' 여주인공, 선화공주를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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