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2년 임오군란 터지자
대원군 8년 만에 권력 복귀
중국, 대규모 군사 개입
한반도의 종주권 복원시켜
압송한 조선 최고권력자를
북양대신 이홍장이 국문
‘대원군 유폐 역사’를 알아야
오늘의 중국외교 알 수 있어

중국으로 납치·압송된 뒤의 흥선대원군. 톈진에서 임오군란 주모자로 심문과 판결(바오딩 유폐)을 받은 후 촬영한 것으로 추정(1882년 양력 9월 말). 탕건에 흰 평상복 차림으로 손을 가슴선까지 올려 책을 든 자세는 연출된 듯하다. 구치소에 수용될 때 기록용 사진의 느낌을 준다.
다음 단계는 대규모 군대 파견과 신속 결행. 광동수사제독 오장경(吳長慶)은 경군 3000명을 동원했다. 덩저우에서 출발(북양함대 군함 4척)→한반도 남양만 마산포(화성시 송산면 고포리) 상륙→8월 25일 한성(한양) 진출이다. 오장경 휘하에 23세의 원세개(袁世凱·위안스카이)가 있었다. 8월 26일 오전, 사령관 오장경과 일행은 운현궁에서 대원군을 만났다. “군무에 상의할 일이 있다”고 답방을 요청했다. 오후에 대원군은 소수 병력만 대동했다. 남대문 밖 청군 진영을 찾았다.
대원군은 오판했다. 청나라가 조선·일본의 갈등을 중재해 줄 것으로 착각했다. 그때 일본은 공사관 습격자의 처벌·배상을 요구했다. 필담이 오갔다. 청군 마건충의 기습은 충격적이었다. “남양만을 건너 황제의 유지(諭旨)를 받음이 어떠냐.” 대원군은 황당했다. 청군은 그를 강제로 가마에 태웠다. 남양만으로 압송했다. 유인·납치작전은 성공했다. 조선 최고권력자의 몰락은 허무했다. 재집권 33일 만이다.

신 청하도서에 걸린 안내판.’대원군은 중국정부군 도움(幇助·방조)으로 중국에 왔다“고 납치 사실을 은폐·왜곡.
이홍장은 직접 조사에 나선다. 속방(屬邦)의 중죄인를 다스리는 국문(鞫問)이다. 대원군 일기에 기록돼 있다. “이홍장=난의 괴수는 누구냐. 대원군=모른다./ 이홍장=말을 꾸며대니 형부로 넘기겠다. 대원군=기름가마솥 앞에 있다 하더라도 사대부가 죽으면 죽었지 모르는 사실을 함부로 지껄이겠는가./ 이홍장=합하(閤下, 대원군 호칭)가 군졸을 사주한 것을 목격한 사람이 있다고 한다. 대원군=그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대질해 달라./ 이홍장=합하가 난괴(亂魁)를 모른다는 말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대원군=이것이 춘추의 필법이다. 내게 불궤지심(不軌至心, 반역)이 있다면 그럴 것이나, 나는 그렇지 않다.”

대원군이 억류된 구(舊)청하도서는 헐림. 같은 형태의 신청하도서(복원공사중)의 담과 표지석.
우리는 현존하는 신 청하도서(흥화로)를 찾아갔다. 작은 궁궐 형태다. 자료엔 건축면적 1840㎡, 건물 18채, 길이 160m다. 2018년 현재 3년째 보수공사 중이다. 건물은 2013년 전국 문화재로 승격했다. 그때 역사 안내판이 세워졌다. 안내문이 거슬린다. “··· 대원군 이하응은 패해 중국 정부군의 도움으로 중국에 왔다(大院君李昰應敗陣, 在中國政府軍的幇助下, 來到中國).” 그것은 진실을 뒤튼 왜곡이다. 이하응은 강제 피랍됐다. 청군의 도움이 아니다.

바오딩 직례총독서(박물관)에 전시된 이홍장과 일본공사 모리의 밀랍인형. 동격의 자리 배치다.
그곳에서 나는 그의 사진을 꺼내보았다. 유배 판결을 받은 뒤 톈진 영무처에서 찍은 듯하다(9월 말 양력). “평상복 차림의 대원군 표정은 온화하나 연출 사진인 듯 자세는 어색하며 경직돼 있다”(김정숙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예술 세계』). 대원군 생활은 감시와 통제다. ‘간수(看守) 규정 8개항’도 만들었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一草一木)’도 허락 없이 반입 금지였다. 그는 내당 두 채에 묵었다. 자책과 회한, 병고(황달)와 불안감이 이어졌다. 그는 난(蘭)을 쳤다. 그것으로 고통을 다스렸다. 김정숙 박사는 "괴석을 한쪽에 두고 아래위에 난을 배치한 석란도가 그 기간에 주종을 이루었다”고 했다. 대원군 호는 석파(石坡). 석파란은 중국에서 유명해졌다.
직례총독서(박물관)로 발걸음을 옮겼다. 밀랍인형이 눈에 들어온다. 청나라 관복의 이홍장과 청국 주재 일본공사 모리 아리노리(森有禮)다. 설명문은 이렇다. "1876년 9월 두 사람은 조선 문제를 의논했다.” 좌석 배치가 동격이다. 이홍장은 일본 외교관을 예우했다. 조선 실력자를 함부로 다뤘다. 분노와 허탈감이 내게 스며든다. 박상은 전 의원은 신 청하도서(2001년)를 방문했다. 그는 "중국인 마음에는 한국은 자신들의 종속국이란 역사의식이 있다. 대원군 유폐의 역사를 알아야 21세기 중국의 내심을 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