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발 4,600m 에메랄드빛 풍경에 반해 홀로 야영
우아스카란Huascarán(6,768m)은 페루 최고봉이다. 단순히 높기만 한 것이 아니라 세계문화유산과 유네스코 생물권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을 정도로 자연적 가치를 인정받은 산이다. 안데스 서부에 위치한 페루 ‘코르디예라 블랑카Cordillera Blanca’에 있다.
우아스카란을 중심으로 그 일대가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이곳에는 400개 이상의 호수가 있다. 호수의 기원은 이곳의 고산들이다. 고산을 뒤덮은 빙하가 녹아내리면서, 수목한계선을 넘나들며 곳곳에 에메랄드빛 호수를 만들어 놓았다.
나는 정처 없이 세계 곳곳을 떠돌아다녔으나 6개월이나 페루에 묶여 있었다. 이곳의 아름다움도 페루에 머무는 데 한몫했다. 코르디예라 블랑카의 크고 작은 트레일은 작은 도시 와라즈Huaraz에 있었고, 등산 마니아인 나에게 이곳은 노다지나 다름없었다.
우아스카란국립공원의 많은 호수 중 여행객들이 반드시 거치는 대표적인 명소가 69호수Laguna69이다. 69호수는 챠크라라후Chacraraju(6,112m)를 등지고 해발 4,600m에 생성된 호수다. 1975년 우아스카란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을 때, 이름 없는 호수에 번호를 매기면서 69호수라 표기된 것이 이름의 유래다. 내가 담당자였다면 이렇게 아름다운 호수를 고작 번호로 이름 짓지는 않았을 것이다.
에메랄드빛 69호수
와라즈의 한 호스텔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알게 된 현지 가이드들과 친구가 되었고, 이들은 이곳 트레일을 혼자 갈 수 있을 만큼 세세하게 알려 주었다. 엄청난 비에 페루의 수도 리마와 와라즈를 잇는 도로가 끊기면서 호스텔이 한산해져, 휴가를 떠날 수 있었다.
이른 아침 배낭을 꾸려 융가이Yungay행 콜렉티보를 탔다. 콜렉티보는 남미의 주요 교통수단인 미니버스다. 40분을 달려 도착한 융가이터미널에는 콜렉티보 몇 대가 시동을 걸고 대기 중이었다. 69호수로 향하는 콜렉티보 안은 옛날 우리네 시골 풍경과 닮아 있었다. 닭을 품은 현지인과 아기를 품은 엄마, 토끼장에 토끼를 넣어가는 할머니까지, 외지인은 나뿐이었다.
이방인이 익숙한 듯 말을 거는 마을 사람들에게 몇 마디 익힌 스페인어를 구사하는 동안, 콜렉티보는 점점 고도를 높이는가 싶더니 매표소에서 멈춰 섰다. 가이드 친구에게 받은 입장권을 보여 주고 그대로 통과했다.
먼지를 날리며 달리는 차는 구불구불한 산길에서도 속도를 줄일 기미가 없었다. 다들 익숙한 듯 태연했지만, 나 혼자 차 위에 올려놓은 배낭이 굴러 떨어질까봐 노심초사였다. 69호수의 들머리인 세보야팜파Cebolla Pampa에 도착하자 배낭은 무사히 내 손 위로 내려왔다.
세보야팜파는 ‘양파 밭’이란 뜻으로 그 지역에 양파를 많이 심어 지어진 이름이다. 배낭을 메고 가파른 바위 계단을 내려오자 평평한 들판을 유유히 가로지르는 강물 소리는 감성에 사로잡히게 만들었다. 물소리를 들으며 최면에 걸린 듯 걷다 보니 강줄기를 벗어나 오르막이 나타났다.
지그재그로 이어진 오르막길을 마주한 순간, 왜 트레커들에게 그토록 힘겨운 곳으로 소문났는지 이해가 됐다. 걷고 또 걸어도 끝날 기미가 없는 이 길의 지루함은 어깨를 짓누르는 배낭만큼이나 곤혹스러웠다. 중간부터 지그재그를 가로지르는 샛길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완만하게 오래 걷는 것보다는 가파르더라도 짧게 치고 올라가는 걸 더 선호하는 나는 샛길을 따라 스틱을 찍으며 올랐다.
그 길 끝에 올라섰을 때, 숨을 고르며 뒤돌아봤다. 우아스카란 봉우리가 보였더라면 극적이었겠지만, 어림없다는 듯 비구름이 모든 걸 감춰 버렸다. 대신 하산할 때는 뭔가 볼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며 걸음을 옮겼다.
커다란 바위가 나타나고 극강의 경사가 다시 앞을 가로막았다. 몸을 잡아끄는 배낭을 버티며 바위를 기어올랐다. 야영하며 먹을 요량으로 재래시장의 저렴하고 싱싱한 과일을 배낭에 잔뜩 넣은 탓이었다.
에메랄드빛 호수를 기대하며 올라섰으나, 눈앞에 보이는 건 작은 진녹색 호수였다. 호수 너머엔 원점으로 돌아온 듯 드넓은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 ‘여기도 양파 밭이었던 건가?’하는 생각이 자동으로 들었다. 물이 흥건한 초원 위에 는 한가로이 풀을 뜯는 소떼뿐이었다. 기대에 못미치는 경치였다.
실망과 함께 이른 아침부터 움직인 탓에 피로까지 몰려왔다. 질척거리는 진흙 길 위로 징검다리처럼 돌이 놓여 있었다. 곡예하듯 폴짝폴짝 뛰며 한참을 걸었다. 평원의 끝에 다다르자 멀리서 봤을 때 작은 언덕 같았던 산은 거대한 장벽으로 내 앞을 가로 막았다. 웅장한 장벽 옆으로 난 지그재그 너덜 길에 주눅 들었지만, 다시금 바삐 걸음을 내디뎠다.
바위와 돌이 섞여 만들어진 길을 걸을 때마다 느껴지는 충격은 고스란히 온 몸 구석구석으로 전달되었다. 여기가 바로 많은 트레커들이 너무 힘들어 뒤돌아서 하산한다는 ‘울고 넘는 69고개’였다.
배낭 무게가 어깨를 더 세게 짓누르는 것 같았다. 고통을 줄이기 위해 허리를 굽혔다. ‘맨몸으로 와도 힘들다는 이곳을, 왜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백패킹을 하겠다고 사서 고생하는 걸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렇게 힘들게 왔는데, 이틀 내내 구름 속이라 아무 경치도 볼 수 없다면 너무 억울할 것 같았다.
속에서 올라오는 의문과 불안을 꾸역꾸역 누르며, 볼거리도 없는 길을 무미건조하게 걷기만 했다. 빨리 오르막이 끝나기만 바랄 뿐이었다. 길의 끝에는 구름에 둘러싸인 챠크라라후산에서 부서져 나온 화강암 덩어리들로 가득했다.
바위를 넘어서자 드디어 호수가 나타났다. 명성에 걸맞게 에메랄드 보석을 녹인 듯 맑고 청명했다. 배낭을 벗어던지고 땀으로 흥건한 몸을 당장 저 깨끗한 물속에 던지고 싶었지만, 참았다. 챠크라라후가 가장 잘 보이면서 호수에서 멀지 않은 곳을 골라 텐트를 쳤다. 아무도 없었다. 이 멋진 곳을 나 혼자 독점한다는 게 꿈만 같았다.
짐을 풀고, 호숫가에서 땀을 씻었다. 청량감을 느끼자 물속에 들어가고 싶어졌다. 신발을 벗고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그리고 한 발을 더 내딛자 다리가 얼어붙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되돌아 나와야 했지만, 프리다이빙 30m 잠수 경험과 국제자격증이 있다는 자신감에 물속으로 몸을 던졌다. 마음은 돌고래처럼 호수를 가르며 헤엄치고 싶었지만, 현실은 유턴해 재빠르게 물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스스로가 너무 우스꽝스러웠지만 나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텐트에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움직이는 건 흘러가는 구름을 좇는 눈동자와 차가운 공기를 받아들이는 폐의 운동뿐이었다. 더 이상의 움직임은 필요 없었다. 완벽한 풍경과 완벽한 고요함, 최고의 순간이었다.
1박2일 일정이 2박3일로 바뀐 까닭
밤사이 텐트에 닿는 눈소리를 세느라 잠을 설쳤다. 해발 4,600m에서 비는 눈으로 바뀌어 사뿐히 내려앉았다. 여명이 밝아 텐트 문을 열자 동쪽 설산 위로 노란 꽃봉오리가 피어나듯 아침 햇살을 머금은 구름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구름 뒤에 숨어 있던 챠크라라후가 또렷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아침식사를 하기 전 산책할 겸 전망대로 향했다. 바위를 기어오르자 내가 전날 걸어왔던 길 끝 너머에 하늘을 찌를 듯 솟은 쵸피칼키Chopicalqui가 위용을 드러냈다.
쵸피칼키와 나란히 하고 있는 우아스카란을 보기 위해 조금 더 올랐다. 빙하 근처에 다다르자 쌍둥이 우아스카란(남쪽과 북쪽의 봉우리)이 쵸피칼키와 대화라도 나누듯 마주하고 있었다. 아래에서 볼 땐 거대한 얼음덩어리에 불과했던 챠크라라후의 빙하를 가까이에서 보니 잘라놓은 페스트리 빵처럼 얼기설기 겹쳐 있었다. 이렇게 보면 마냥 신기해 보이지만 볼리비아 우와이나 포토시를 등반할 때 크레바스에 빠지는 아찔한 경험을 했기에 더 이상 올라가지 않았다.
잠시 산책 겸 나온 터라 허기진 배를 진정시키며 다시 하산했다. 챠크라라후는 모처럼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당당하게 호수를 지키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됐지만 여전히 아무도 오지 않았다. 하산해야 하는데 차마 이 꿀맛 같은 경치를 두고 떠날 자신이 없었다. 어차피 내가 가진 건 건강한 몸과 시간뿐이었다. 그대로 누운 채 풍경을 바라보다 잠들었다. 의식 저편에서 나지막한 소리가 들려왔다. 나른한 햇살을 받으며 눈을 떴을 때 새 한 마리가 텐트 앞에서 쫑알대고 있었다.
1년 넘게 홀로 세계여행을 하며 지친 면이 없지 않았는데, 그 마음을 달래주듯 한참을 머물다 떠났다. 해가 지고 다시 어둠이 찾아왔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보람된 하루를 보내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다만 이 즐거움을 함께 느낄 누군가를 소환하고 싶었다. 완벽했으나 2% 부족한 것은 고독함이었다. 정적과 함께 밤을 보내고 두 번째 아침이 찾아왔다. 구름이 약간 있었지만 하늘은 여전히 맑음이었다. 배낭을 꾸리고 설산과 에메랄드빛 호수를 실컷 눈에 담았다. 언젠가 다시 찾아오겠다 고 기약하며 발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