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을 연주대로, 바위를 차일암이라 불러… 다른 이름은 영주대·염주대로도 전해
‘연주대는 구름 속까지 우뚝 솟아 있는데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니 천하 만물 중에서 감히 높이를 함께 다툴 만한 것이 없었다. 사방의 봉우리들은 자그마해서 이루 헤아릴 수도 없었고, 오직 서쪽에 기운이 쌓여 흐릿한데 마치 하늘과 바다가 이어져 있는 듯했다. 그러나 하늘에서 보자면 바다고 바다에서 보자면 하늘처럼 보일 것이니, 하늘과 바다를 또한 누가 분간할 수 있겠는가? 한양의 도성이 밥상을 대한 듯이 바라보였다. 일단 소나무와 전나무가 빽빽하게 둘러싼 곳이 경복궁 옛터임을 알 수 있었다. 양녕대군이 배회하며 군주를 그리워함을 비록 수백 년이 지난 지금에서도 상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국역유산기> (국립수목원 편저) 인용
체제공蔡濟恭(1720~1799)은 소론계가 득세하자 관직생활을 접고 은거생활을 하던 1786년 4월 13일 관악산冠岳山(632m)을 유람한다. 이후 1788년 우의정에 발탁됐고, 1793년에는 영의정에 임명됐다. 그의 유람 목적은 유산기에 잘 나타나 있다.
‘나는 예전에 미수 허선생(허목)께서 83세에 관악산 연주대에 오를 때 걸음걸이가 나는 듯하여 우러러보길 신선처럼 했다는 것을 들었다. 저 관악산은 경기 내에 있는 신령한 산이자 선현들께서 예전부터 노닐던 곳으로 한 번 그 정상에 올라 마음과 눈을 상쾌하게 하고 산을 앙모하는 마음을 기르고자 했으나 계속 생각만 했을 뿐 일에 얽매어 갈 수 없었다. 4월 13일 남쪽 이웃에 사는 이숙현과 약속을 하고 말 타고 길을 나섰고 아이들과 종조 4~5명 따랐다.’
이처럼 체재공은 허목이 83세에 관악산에 오른 것을 부러워하면서 자신도 67세의 나이에 유산을 작정하고 결행한다.
그보다 먼저 관악산을 유람하고 기록을 남긴 학자는 조선 초기 성간成侃(1427~1456)으로 알려져 있다. 정확한 연도는 알 수 없지만 그가 관악사를 답사하고 남긴 관악산 첫 유산기인 <유관악산북암기遊冠岳山北岩記>가 전한다. 이어 1704년 이익이 관악산에 올라 <유관악산기遊冠岳山記>를 남겼다. 그 기록에는 관악사, 원각사, 영주암 등이 나온다. 이로 미뤄볼 때 당시까지 관악사는 존재했던 절로 추정된다. 지금 연주대戀主臺는 영주대靈珠臺로 소개한다. 그리고 영주암은 폐사되어 영주암 터로 소개되고 있다. 관악사는 연주대 위의 작은 절, 영주암은 지금의 연주암으로 보인다. 그리고 채제공이 1786년 기록을 남겼다. 여기서는 절에 대한 기록은 없고, 연주대와 차일암에 대한 내용만 소개하고 있다.
또 <조선왕조실록> 정조 13년(1789)에 채제공이 우의정으로서 정조에게 올린 기록이 전한다.
‘관악산 제1봉에서는 경복궁이 바라다보입니다. 양녕대군도 필시 여기에 올라 바라보았기에 아직도 차일을 쳤던 흔적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염주대念主臺라고 합니다.’
허목이 83세 오른 기록 보고 체재공도 67세 올라
이로 볼 때 체제공은 관악산에 대한 관심은 있었으나 정확한 지명에 대해선 몰랐지 않았나 추정된다. 그의 유산기에는 연주대라 하고, 왕조실록에는 염주대라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보다 앞선 이익의 유산록에는 영주암과 영주대로 나온다. 같은 지명을 두고 제각각이다.
<서울지명유래>에는 ‘연주대는 관악산 정상 봉우리다. 의상대·연주봉·영주대·염지봉·연지봉이라고도 한다’고 소개한다. 역사서나 지리지에 등장하는 지명을 전부 모아놓은 듯하다.
그런데 <고려사>에는 관악산은 몇 군데 등장하지만 연주대나 염주대·영주대는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이 지명들은 조선시대 들어 등장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연주대의 지명유래를 보면 그 가능성에 이해가 간다. ‘戀主臺’는 말 그대로 주군은 사모하는 평평한 바위라는 뜻이다.
연주대의 두 가지 지명 유래가 전한다. 첫째는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바뀔 때 조선 건국에 참여하지 않은 두문동 72현 가운데 강득룡·서견·남을진 등이 관악산 의상대에 올라 개경을 바라보고 통곡하며 고려왕조를 생각했다고 해서 의상대를 연주대라 부르게 됐다는 설이다. 둘째는 조선 초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이 충녕대군이었던 세종에게 왕세자 자리를 물려준 뒤, 효령대군이 이곳에 올라 임금인 세종을 그리워했다는 데서 유래한 설이 있다.
다시 체제공을 따라 관악산으로 올라간다.
‘10리쯤 가서 자하동紫霞洞으로 들어가 한 칸 정도 되는 정자 위에서 쉬었다. 정자는 신씨의 별장이다. 계곡 물은 산골짜기에서 흘러나오는데 숲의 그늘이 뒤덮고 있어서 그 근원을 알 수 없다. 물길은 정자 아래 이르러 바위를 만나게 되는데, 날리는 것은 포말이 되고 고이는 곳은 푸른빛을 이루었다. 마침내 다시 넘실넘실 흘러가서 골짜기 입구를 한 번 휘감아 돌고 멀리까지 흘러가니 마치 옷감을 펴놓은 것 같았다.’
그는 자하동 방향으로 관악산에 들어갔다. 그런데 자하동이 현재 어디인가? 서울 관악구청 숲해설사인 임정현씨는 “자하동은 관악산 동서남북 전부 다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여기저기 전부 자하동이란 말이다. 여러 자료와 인터넷을 검색한 결과 자하는 조선시대 3대 묵죽화가로 꼽히는 신위申緯(1769~1845)의 호이며, 관악산 주변에서 여생을 보낸 그의 호에서 따온 지명이라는 설명이다.
그래서 관악산이 품은 계곡을 자하동천紫霞洞天이라 한다. 계곡 방향을 따라 삼성산 아래 안양 쪽 계곡은 남자하동, 연주대 아래 과천 쪽 계곡은 동자하동, 서울대 방향 신림동으로 이어지는 계곡은 북자하동이라 했다고 한다. 지금은 다 없어지고 과천 동자하동만이 자하동천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올라가는 길에 석각으로 보이는 ‘백운산인 자하동천白雲山人 紫霞洞天’이 신위의 글씨라고 전한다.
1786년 체재공이 관악산에 올랐을 당시 신위의 나이는 10대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의 호에서 지명이 유래했다는 사실은 시기적으로 맞지 않다. 원래 자하동이란 지명이 있었을 가능성을 두고 찾아보지만 쉽지 않다.
자하동이란 정확한 위치 찾기 쉽지 않아
현재 관악산 자하능선이 있고, 자하동천이란 석각이 있는 과천에서 오르기로 한다. 이쪽으로 방향을 잡은 또 다른 이유는 과천향교가 계곡 바로 옆에 있기 때문이다. 과천향교는 1690년부터 지금의 자리에 있었다고 하니, 체제공 정도 되는 선비는 그곳을 반드시 거쳐 가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에서다.
과천향교 앞이 바로 자하동천 계곡이다. 제대로 찾은 것 같다. 지금도 계곡에 피서를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계곡이 흐르는 분위기로 봐서는 체제공이 이 길로 간 게 맞다. 그런데 그 다음부터 영 다르다.
‘정자를 거쳐 10리쯤 갔다. 길이 험해 말을 탈 수 없어 여기서부터는 말과 마부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걸어가 넝쿨을 잡고 골짜기를 건넜다. 앞에 인도하던 자가 절이 있는 곳을 잃어버려 방향을 분별할 수 없었다.’
조금 지나 말과 마부를 돌려보낸 뒤부터 길을 헤매기 시작한다. 상당 시간 헤맨 뒤 승려가 나타나서 길을 인도한다. 도착한 절은 불성사(암)다. 그리고 체재공 일행은 자하동으로 들어가서 10리, 길을 헤매다 승려 인도로 4~5리쯤, 총 6km 이상 올랐거나 이동했다. 불성사에서 연주대까지 다시 10리쯤 된다고 한다. 체제공이 자하동 정자, 즉 출발지에서 연주대까지 총 10km 이상 된다. 지금 과천향교에서 연주대까지 대략 4km 거리다. 그러면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체재공의 집은 노량진이라고 유산기에 밝히고 있다. 당시 길 상황으로 노량진에서 과천으로 갔을까, 안양으로 갔을까? 과천 바로 위 남태령이 조선 8대로 중의 하나였으니 과천으로 지나가지 않았을까.
불성사에서 승려는 체제공에게 “연주대는 여기서 10리쯤 떨어져 있는데 길이 아주 험난해 나무꾼이나 중들이라 해도 쉽게 넘어갈 수 없으니 기력이 미치지 못할까 염려됩니다”라고 말한다. 이에 체재공은 “천하의 모든 일은 마음에 달렸을 뿐이네. 마음은 장수요, 기운은 졸개이니, 장수가 가는데 졸개가 어찌 가지 않겠는가”라고 답한다.
과천향교 초입 분위기와 상황으로 봐서는 분명 유산기와 맞는데, 거리상으로는 전혀 맞지 않다. 현재 불성사는 안양 방향 관악산에 있다. 과천에서 출발해서 헤매다가 안양으로 가서 연주대로 올라갔다면 체제공이 묵었던 불성사와 거리상으로는 대략 맞아떨어진다. 지금 있는 불성사가 같은 절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마침내 절 뒤편의 가파른 벼랑길을 넘어갔는데, 간혹 가다가 끊어진 길과 깎아지른 벼랑을 만나기도 했다. 그 아래가 천 길이라 몸을 돌려서 절벽에 바짝 붙고 손으로 오래된 나무뿌리를 바꿔 잡으면서 조금씩, 조금씩 발걸음을 옮겼는데 현기증이 나서 감히 곁눈질도 못 했다. 간혹 큰 바위가 길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곳을 만나게 되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바지가 걸려 찢어져도 근심할 틈이 없었다. 이와 같은 곳을 여러 번 만난 뒤에야 비로소 연주대 아래 이르렀다.’
<고려사>엔 관악산만 등장, 연주대 관련 없어
노선비의 엄살인지, 실제 당시 길이 이렇게 험했는지 알 수 없지만 경기 5악으로서 관악산의 면모를 유감없이 표현한 것 같다. 경기5악은 개성 송악산, 파주 감악산, 포천 운악산, 가평 화악산과 과천 관악산이 해당한다. 지금 면면으로 봐도 험한 악산들이다.
‘먼저 올라간 자들이 만 길이나 되는 절벽 위에 서서 몸을 굽혀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흔들흔들 마치 떨어질 듯 보고 있으면 머리털이 모두 삐쭉삐쭉 솟아올라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나도 마음과 기력을 다해 엉금엉금 기어서 마침내 정상에 이르렀다. 정상에는 널찍한 바위가 있어 수십 명이 앉을 만했다. 이름을 차일암遮日巖이라 했다.
예전 양녕대군이 왕위를 피해 관악산에 와서 거주하실 때 가끔 이곳에 올라와 궁궐을 바라보았는데, 햇살이 뜨거워 오래 머물 수 없어 작은 장막을 치고 앉아 있었다. 바위 모퉁이에 구멍을 파서 제법 오목한 것이 4개인데, 장막의 기둥을 고정시킨 것으로 그 구멍이 지금까지 뚜렷하게 남아 있다. 대 이름을 연주대라 하고 바위를 차일암이라 하는 것이 이 때문이다.’
연주대와 차일암에 대한 유래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체재공은 정조에게 올린 실록에는 염주대로 전하고 있어 유래의 진위여부는 알 수 없다. 물론 사관史官이 연주대를 염주대로 잘못 듣고 기록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반면 차일암은 지금 아는 사람이 없는 듯했다. 연주대에 아슬아슬하게 있는 암자의 보살에게 “여기 차일암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런 암자는 여기 없다”고 했다. “암자가 아닌 바위”라고 했더니 “모르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푹푹 찌는 더위에 관악산 정상에서 아이스크림을 팔고 있는 상인에게도 물어보았다. 그는 “여기에 그런 바위는 없다”고 했다.
그런데 연주대가 있는 관악산과 관악사, 연주암의 유래와 관계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앞에서 언급했다 시피 <고려사>까지는 관악산만 등장한다. 관악사는 지금 연주대 아래 있던 작은 절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절에 대해 <연주암지戀主庵誌>는 ‘677년(신라 문무왕 17) 의상조사가 한강 남쪽에 유화하다가 관악산의 수려함에 끌려 산정에 올라 평평한 정상 부위를 의상대라 하고 그 아래 관악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연주대는 원래 의상대이고, 그 아래 지금 연주암 자리에 관악사가 있었다는 얘기다. 이 의상대가 연주대로 불리게 된 사연은 앞에서 두 가지를 언급했다. 그리고 관악산의 유래는 그 이름에서 찾을 수 있다. 정상 부위가 영락없는 ‘갓冠’같이 생겼기 때문이다. 산 이름 유래는 여러 갈래에서 찾을 수 있으며, 생긴 형태는 그중의 하나다. 그렇게 보면 관악산이란 지명은 수천 년간 지속돼 왔다고 볼 수 있다.
연주대는 의상대, 연주암은 관악사인 듯
관악산 정상, 연주대에서 체재공은 일행과 함께 대화를 나눈다.
‘임금을 그리워하는 것은 인륜이니, 진실로 고금에 차이가 없다네. 다만 생각해 봤을 때 내 나이 67세로 미수(허목) 어른께서 이 산을 오를 때 나이에 비교하면 16세나 미치지 못하네. 그런데 미수 어른의 걸음걸이는 나는 듯했고, 나는 기력이 쇠진하고 숨이 차서 모든 것이 괴롭다네. 도학과 문장에 고금의 사람이 서로 다른 것은 진실로 괴이할 것이 없지만, 근력이 옛사람에 미치지 못한 것은 어찌 이리 차이가 나는가? 천지신명의 힘을 입어 내가 만약 83세에 비록 남에게 업혀온다 하더라도 반드시 이 연주대에 다시 올라 옛사람의 발자취를 이를 것이니, 그대는 이를 기억해 주시게.’
서로 즐겁게 대화를 주고받으며, 불성암으로 다시 내려와 하룻밤 묵고 노량진 집으로 돌아갔다고 유산기는 끝내고 있다. 불성암에서 다시 하룻밤을 지낸 것으로 봐서는 올라갔던 길로 그대로 내려왔을 가능성이 높다.
끝으로 연주암에서 정상 가는 길 왼쪽에 효령각이란 조그만 암자가 하나 있다. 보통의 절이나 암자엔 산신각이나 산령각이 있는 자리다. 이곳은 효령대군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이는 의상의 관악사를 연주암으로 부르게 된 사연과 관련 있다. 의상대가 두문동 선비들로 인해 연주대로 바뀌고, 조선 들어와서는 충녕대군이 세종으로 왕위를 물려받자 평소 불교에 심취해 있던 충녕의 형 효령대군이 유랑길에 나섰다가 관악사를 찾아 수행하면서 크게 중창시켜 연주암으로 부르게 됐다고 전한다. 그래서 산신각 대신 효령각이라 부르게 됐고, 그의 영정을 모셔두고 있다. 그런데 체재공의 유산기 어느 곳에도 연주암에 대한 언급은 없다. 당시 사찰 규모는 컸을 텐데. 왜일까? 역사적 사실은 기록이 없으면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