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고서화

쫓겨난 임금의 비애…비닐로 대충 덮인 '광해군 탯줄'

산야초 2018. 10. 2. 23:44

쫓겨난 임금의 비애…비닐로 대충 덮인 '광해군 탯줄'

 
대구 북구 연경동 태봉 중턱에 부서진 채 방치되고 있는 광해군 태실. 푸른색 비닐막으로 수년째 덮여 있다. 대구=김정석기자

대구 북구 연경동 태봉 중턱에 부서진 채 방치되고 있는 광해군 태실. 푸른색 비닐막으로 수년째 덮여 있다. 대구=김정석기자

 
지난달 30일 대구 북구 연경동. 7900여 세대 2만여 명이 살 수 있는 연경공공주택지구 건설 공사가 한창이었다. 곳곳에서 중장비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하고 하늘 높이 솟은 크레인들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허허벌판이었던 150만㎡ 공간에 조금씩 건물들이 세워지고 있었다.
 
수년 뒤면 아파트 숲으로 변할 이곳에 조선의 15대 왕인 광해군(1575~1641)의 태실이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공사판 한가운데 위치한 야트막한 구릉인 '태봉'에 광해군 태실이 있다. 
 
태실(胎室)은 옛 왕실에서 자손을 출산하면 그 태를 봉안하고 표석을 세운 곳을 말한다. 과거엔 출산하면 태는 깨끗이 씻은 후 내항아리에 봉안하고, 이 항아리를 붉은색 끈으로 밀봉한 뒤 다시 큰 외항아리에 담아 보관했다. 왕세자나 왕세손 등 다음 보위를 이어받을 사람의 태는 석실을 만들어 보관했다. 
 
지난 6월 26일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국립고궁박물관과 장서각이 공동개최한 '조선왕실 아기씨의 탄생-나라의 복을 담은 태항아리' 특별전을 찾은 관람객이 전시장을 둘러보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6월 26일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국립고궁박물관과 장서각이 공동개최한 '조선왕실 아기씨의 탄생-나라의 복을 담은 태항아리' 특별전을 찾은 관람객이 전시장을 둘러보고 있다. [연합뉴스]

 
대표적인 조선 왕의 태실이 바로 충남 서산시에 위치한 명종대왕 태실(보물 제1976호)이다. 조선 13대 왕인 명종이 태어난 1538년 건립된 명종대왕 태실은 받침돌과 몸돌 위에 태항아리를 올리고 위에 개첨석을 덮은 형태다. 그 주변을 8각형의 난간석이 둘러싸고 있다. 태실 앞에는 태비(胎碑)가 세워져 있다. 다른 태실들이 일제강점기에 훼손·변형된 반면 명종대왕 태실은 원형이 잘 보존돼 있다.
 
하지만 광해군 태실은 원래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파괴돼 야산 중턱에 흩어져 있다. 산 입구에 세워진 '연경동 태실' 안내판과 태실 파편 곁에 문화재청이 게재해 둔 안내문만이 이곳에 광해군 태실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줄 뿐이다. 안내판에는 '현 위치에서 산 정상 방향으로 200m 정도 올라가면 조선 15대 왕인 광해군의 태를 묻었다는 태실의 흔적이 있다'고 적혀 있다. 


대구 북구 연경동 태봉 중턱에 부서진 채 방치되고 있는 광해군 태실. 푸른색 비닐막으로 수년째 덮여 있다. 대구=김정석기자

대구 북구 연경동 태봉 중턱에 부서진 채 방치되고 있는 광해군 태실. 푸른색 비닐막으로 수년째 덮여 있다. 대구=김정석기자

대구 북구 연경동 태봉 앞에 설치돼 있는 안내판. 이곳에 광해군 태실이 위치해 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대구=김정석기자

대구 북구 연경동 태봉 앞에 설치돼 있는 안내판. 이곳에 광해군 태실이 위치해 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대구=김정석기자

 
대구에 위치한 조선 왕의 태실은 광해군이 유일하다. 광해군의 태가 대구로 오게 된 연유는 알 수 없다. 다만 왕실 자손의 태를 묻을 때 '태실도감'이라는 임시 관서를 만들어 전국 각지의 길지를 찾았다는 점으로 미뤄 연경동 태봉이 명당으로 꼽혔던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 영남지역은 풍수상 길지가 많아 여러 왕의 태가 묻혔다. 경북 성주군의 세종대왕자 태실지를 비롯해 예천군 문종태실, 영천시 인종태실이 그 예다.
 
부서져 흩어진 광해군 태실은 현재 임시방편으로 푸른색 비닐막을 덮어둔 상태다. 2013년 12월 발굴조사가 시작된 이후 줄곧 이 모습이다. 당시 광해군 태실이 사람들의 관심을 받을 때만 해도 발굴조사사업은 금세 이뤄질 분위기였다. 북구는 예산 2000만원을 들여 한 달간 경북문화재연구원에 의뢰해 지표조사를 하기도 했다.
 
대구 북구 연경동 태봉 중턱에 부서진 채 방치되고 있는 광해군 태실. 푸른색 비닐막으로 수년째 덮여 있다. 대구=김정석기자

대구 북구 연경동 태봉 중턱에 부서진 채 방치되고 있는 광해군 태실. 푸른색 비닐막으로 수년째 덮여 있다. 대구=김정석기자

대구 북구 연경동 태봉 앞에 설치돼 있는 안내판. 문화재 발굴 조사 사업이 이뤄지고 있어 출입을 금지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대구=김정석기자

대구 북구 연경동 태봉 앞에 설치돼 있는 안내판. 문화재 발굴 조사 사업이 이뤄지고 있어 출입을 금지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대구=김정석기자

대구 북구 연경동 태봉 중턱에 부서진 채 방치되고 있는 광해군 태실. 푸른색 비닐막으로 수년째 덮여 있다. 대구=김정석기자

대구 북구 연경동 태봉 중턱에 부서진 채 방치되고 있는 광해군 태실. 푸른색 비닐막으로 수년째 덮여 있다. 대구=김정석기자

 
당시 조사 결과 광해군 태실은 대부분의 유물이 도굴되고 지상구조가 거의 파괴돼 있었다. 태항아리도 도굴된 상태였다. 하지만 부서진 태실의 조각들이 남아 있고 지하구조가 일부 잔존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의견이 나왔다. 태실이 파괴된 이유에 대해선 주장이 다양하다.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1623년 폐위된 뒤 반대 세력들이 태실을 파괴했을 것이라는 주장, 일제가 태실과 석물들을 훼손했을 것이란 주장, 과거 이곳에 살던 주민들이 고의적으로 광해군 태실을 없애려고 했다는 주장이 있다.
 
그 후 북구는 발굴 작업을 위해 문화재청 발굴조사 지원사업에 신청했지만 탈락했다. 그 후 5년간 발굴사업은 전혀 진척이 없다 최근 문화재청의 '2018년 매장문화재 긴급발굴조사 지원사업'에 선정됐다. 대구 북구는 이른 시일 내 국비 예산 1억원을 활용해 광해군 태실 정밀 발굴조사와 복원사업을 진행하기로 했다.
 
충남 서산시에 있는 명종대왕 태실. 조선시대 왕들의 태실 원형이 잘 보존돼 있다. [연합뉴스]

충남 서산시에 있는 명종대왕 태실. 조선시대 왕들의 태실 원형이 잘 보존돼 있다. [연합뉴스]

 
이정웅 팔거역사문화연구회장은 "광해군은 '폭군'으로 알려져 왔지만 최근 뛰어난 외교 능력 등이 부각되고 영화 '광해'가 1000만 관객을 동원하는 등 그에 대한 재해석이 이뤄지고 있다"며 "대구의 유일한 태실인 광해군 태실의 역사학적 가치를 생각한다면 이렇게 비닐막으로 덮어두고 방치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태실을 속히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구=김정석 기자
kim.jungseok@joongang.co.kr 
 
광해군 태실 위치. [자료 네이버지도]

광해군 태실 위치. [자료 네이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