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박 대통령, 재발 방지 문제 막히자 “철수하세요”

산야초 2015. 8. 26. 12:35

박 대통령, 재발 방지 문제 막히자 “철수하세요”

[중앙일보] 입력 2015.08.26 01:35

북 벼랑끝 전술 넘은 ‘원칙주의’
협상 지켜보다 두 차례나 지시
북, 협상 깨질 분위기에 당혹
지뢰 도발에 대북방송 재개
북한이 대화 원하게 만들어
미·중 공조, 여론 지지도 한몫      

이번 남북 고위급 접촉에 응하는 북한은 어느 때보다 엉덩이가 무거웠다. 남측뿐 아니라 북측도 22일부터 25일 새벽까지 나흘간이나 참을성 있게 협상을 계속했다. 자신들에게 유리한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회담장을 박차고 나가면서 판을 깨겠다고 위협했던 예전의 북한 대표단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북한은 언제나 그랬듯이 ‘벼랑 끝 전술’을 썼다. 군사분계선(MDL) 지뢰 도발 이후에도 서부전선 포격을 감행하면서 위기 국면을 조성한 뒤 협상에 나섰다. 상황을 벼랑 끝으로 몰고가 주도권을 장악한 뒤 이익을 챙기는 전략을 여전히 쓰는 듯했다.

 하지만 이번 고위급 접촉에선 그런 벼랑 끝 전술이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박근혜 대통령의 ‘원칙주의’가 먹혀들었다. 때론 박 대통령이 북한을 압박했다. 박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협상을 지켜보다 두 차례나 “철수하라고 하세요”라고 지시했다고 여권 핵심 관계자가 전했다. 지뢰 도발 같은 사태의 재발방지 문제가 벽에 막힐 때였다고 한다. 이병기 대통령 비서실장 등의 만류로 실제로 협상팀이 철수하진 않았지만 협상이 깨져도 좋다는 식의 남측 대응에 북측은 당혹스러워했다. 박 대통령은 남북 고위급 접촉이 분수령을 맞았던 24일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이번 회담은 도발에 대한 사과와 재발 방지가 가장 중요한 사안”이라며 “북한이 도발 상황을 극대화해도 결코 물러설 일이 아니다”고 말했다. 북한이 사과나 재발 방지 약속을 하지 않으면 “그에 상응하는 조치와 확성기 방송도 계속 유지할 것”이라고도 했다.

 유성옥 국가안보전략연구원장은 “남북 접촉을 하는 동안 북한에서도 우리 뉴스를 실시간으로 보게 된다”며 “김정은 등 북한 지도부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한 박 대통령의 발언을 보고 한국 정부가 물러나지 않겠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 적지 않은 도움이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과 협상팀이 뚝심 있게 ‘원칙주의’를 협상전략으로 택한 게 주효한 데는 몇 가지 환경 요인도 있었다는 분석이다.

 정부는 북한의 지뢰 도발 후 대북 확성기 방송을 시작했다. 한 대북소식통은 “한국이 천안함 사태 등 더 심한 도발에서도 꺼내지 않았던 대북 방송을 재개하자 북한 수뇌부 입장에선 당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며 “북쪽 국경에는 한국 문화가 담긴 DVD가 유통되고 남쪽 국경에서 대북 방송이 계속되면 북한은 견딜 수 없기 때문에 북한이 협상을 더 원하는 상황이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한반도 주변 상황도 유리하게 작용했다. 전승절 행사를 앞둔 중국이 북한에 압박을 가했다. 미국도 B-52 전략폭격기, F-22 랩터 스텔스 전투기 등 전략무기 투입을 검토하겠다며 북한을 압박했다.

 고려대 국제대학원 김성한 교수는 “그동안 벼랑 끝 전술이 북한의 전유물인 것처럼 인식돼 왔지만 이번엔 한국이 쓰는 것처럼 보였다”며 “미국과 중국 등 주요국과의 공조, 또 정부의 단호하고 원칙적인 대응을 지지하는 국민 여론이 성립할 때 한국도 벼랑 끝 전술을 얼마든지 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고 말했다.

통일준비위원회 민간위원인 이화여대 박인휘(국제관계학) 교수는 “이번 협상에선 ‘사과와 재발방지 약속’이라는 원칙론은 고수하면서도 지금 상황에 맞는 수준의 유연성을 보였다”고 분석했다.

유지혜·안효성 기자 hyoza@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