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고서화

"조선 독립 기세 멎지 않을 것"…한용운의 옥중 독립선언문 100년 만에 공개

산야초 2019. 2. 26. 22:33

"조선 독립 기세 멎지 않을 것"…한용운의 옥중 독립선언문 100년 만에 공개

                                        

이지영 기자                    

 
     
100년 만에 공개된 한용운의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 친필 초고본.  [사진 예술의전당]

100년 만에 공개된 한용운의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 친필 초고본. [사진 예술의전당]

 
만해 한용운 선생이 1919년 옥중에서 작성한 독립선언서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 친필 초고본이 26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공개됐다. 선생이 1919년 7월 10일 서대문형무소에서 하룻 동안 일필휘지로 작성한 지 꼭 100년 만이다. 일반 공개는 3월 1일부터 4월 21일까지 열리는 서예박물관에서 열리는  3ㆍ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서화미술특별전 ‘자화상-나를 보다’에서 진행된다.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는 1919년 3ㆍ1 만세운동으로 투옥된 선생이 일본인 검사의 심문에 대한 답으로 적은 글이다.  부록으로 옥중 감회를 담은 시 두 편도 실었다. 선생은 “자유는 만유의 생명이요 평화는 인생의 행복이라”로 시작하는 글을 통해 조선독립선언의 동기와 이유를 밝히면서 일본의 군국주의ㆍ침략주의를 비판했다. 또 “조선의 독립은 산 위에서 굴러 내리는 둥근 돌과 같이 목적지에 이르지 않으면 그 기세가 멎지 않을 것”이라며 조국의 독립을 자신했다. 1919년 당시 마흔 살이었던 만해는 22.0×15.7㎝ 크기의 괘선이 그어진 종이에 3ㆍ1정신의 정수를 국한문 혼용으로 적어넣었다. 총 34쪽 분량에 글씨체는 해서와 행서가 섞여있다.   
 
글의 내용은 중국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발행한 독립신문 1919년 11월 4일자 3면과 4면에 전문 게재되면서 알려졌다. 서대문형무소로 면회를 갔던 춘성스님이 만해로부터 이 글의 정서본을 받아 옷 사이에 숨겨나온 뒤 조선불교청년회 발기인 김상호 등을 통해 임시정부에 전달한 것이다. 이후 같은 내용이『조선 독립의 서』란 제목의 책으로도 출간됐지만, 원본인 정서본의 행방은 아직도 묘연하다. 만해가 보관했던 초고본은 1944년 선생 타계 이후 유족들이 서울 성북동 심우장에서 발견했고, 현재 서울 거주 개인이 소장하고 있다.   
 
이동국 서예박물관 수석큐레이터는 “정서화(正書化) 되기 이전의 초고본의 글씨 속에는 사람의 정신과 성정ㆍ기질이 그대로 다 박혀있다”며 “‘인간 자의식 표출’이 예술의 본질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망국기 독립정신을 드러낸 만해의 친필이야말로 최정점의 예술”이라고 말했다.  
 
한용운이 1919년 서대문형무소에서 독립운동가들의 시를 모아 쓴 '제위재옥중음'. [사진 예술의전당]

한용운이 1919년 서대문형무소에서 독립운동가들의 시를 모아 쓴 '제위재옥중음'. [사진 예술의전당]


이날 서예박물관은 만해가 1919년 적은 시 모음글 ‘제위재옥중음(諸位在獄中吟ㆍ여러분들이 옥중에서 읊음)’과 1948년 김구 선생이 사저 경교장에서 남긴 글씨 ‘한운야학(閒雲野鶴)’도 최초로 공개했다.  
 
이번에 처음으로 존재가 밝혀진 ‘제위재옥중음’은 3ㆍ1 운동 전후 수감된 민족지사 30여 명의 한시를 만해가 옮겨 적은 것이다. 시의 작가는 김병준ㆍ길선주ㆍ최남선ㆍ한용운ㆍ김선두 등으로 3ㆍ1 독립만세운동 민족대표들이 다수 포함돼 있다. 만해는 ‘제위재옥중음’ 끝 부분에  “이상준씨가 출옥하여 (옥중에 있는 나를) 방문한 뒤 (초고를) 열람할 수 있어서 베껴 적었으니 기미년 10월 4일이다”라고 적어넣었다.

이 기록을 통해 만해가 옥중에서 독립운동가 이상준이 면회왔을 때 건네준 초고를  다시 필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수록된 시 중에는 민족대표 33인 중 최연소자였던 이갑성의 칠언절구도 있다. “장의맹기적아무(杖義猛起敵我無ㆍ의리 잡고 사납게 일어남에 적과 나가 없으니)/막작세간부용유(莫作世間腐傭儒ㆍ세간에 썩고 용렬한 선비 되지 말게나)/ 청소적적추월야(淸宵寂寂秋月夜ㆍ맑은 밤 고요하고 가을 달 밝은 밤에)/신재옥중독립부(身在獄中獨立夫ㆍ몸은 옥중에 있지만 독립 운동한 장부라네)”에서 서른 살 기개가 읽힌다.  
 
백범 김구가 1948년 쓴 친필 유묵 '한운야학'.   [사진 예술의전당]

백범 김구가 1948년 쓴 친필 유묵 '한운야학'. [사진 예술의전당]


백범의 친필 유묵  ‘한운야학’은 김구 선생의 주치의이자 미술 컬렉터였던 수정 박병래 선생이 보관하고 있던 것을 성베네딕도 수도원이 이어받아 이번 전시 때 처음으로 공개한다. ‘한운야학’은 ‘한가로운 구름 속의 들판 위의 학’이란 뜻이다. 남북 통합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했던 김구의 뜻이 좌절된 순간, 자신을 한 마리의 학으로 표현했던 애달픈 심정이 글씨를 통해 전해진다.  
 
이봉창 의사의 선언문.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겠다"고 천명했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이봉창 의사의 선언문.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겠다"고 천명했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서도 선열들의 필체에 담긴 애국애족 정신을 볼 수 있다. 28일부터 9월 15일까지 열리는 테마전시회 ‘황제의 나라에서 국민의 나라로’에서다.  “나는 참된 정성으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서하나이다”라고 천명한 이봉창 의사의 선언문(1932)과 1948년 백범 김구가 월북 독립운동가 김두봉에게 “형이여 우리가 우리의 몸을 반쪽에 낼지언정 허리가 끊어진 조국을 어찌 차마 보겠습니까”라고 적어 보낸 편지 등의 원본이 전시된다. 3ㆍ1 운동 당시 부른 독립운동가의 가사가 적힌 종이도 공개된다. “터졌구나 터졌구나 대한독립소리/ 십년을 참고 참아 이제 터졌네”고 시작해 “피도 대한 뼈도 대한 이 내 한 몸을/ 살아 대한 죽어 대한, 대한 것일세/ 만세 만세 독립만세 대한독립만만세”로 마무리되는 장엄한 독립정신이 단정한 국한문 해서체 속에서 생생하게 드러난다.  

이지영 기자 jylee@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