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못 건드리는 중국, 김정은 통과 중월국경에 이유 있다
[중앙일보] 입력 2019.02.27 06:00 수정 2019.02.27 09:02
26일 오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통과한 중국·베트남 사이 국경지대는 딱 40년 전 중국이 베트남을 결코 함부로 대할 수 없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 벌어진 땅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이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을 침공한 1979년 2~3월의 중국·베트남 전쟁이 바로 그 사건이다. 김 위원장이 열차에서 내린 랑선(諒山) 성 까오록(高祿) 현 동당(同登) 진의 동당 역은 당시 화약 냄새가 가득한 격전지였다.
26일 김정은 환영행사 동당 부근 흑역사
중-베트남 사이좋던 65년 '우의관' 으로
40년 전 79년 2월17일 중-베트남 전쟁
인민해방군, 우의관 지나 베트남 침공
베트남, 친중정책 거부하자 무력 동원
중국, 20만~60만 동원해 베트남 공격
베트남, 강력한 항전의지로 결사 저항
철수한 중국, 베트남 만만하게 못 대해
공산국가 간 민족과 국경 분쟁 현장
1979년 2~3월 중국의 침공으로 벌어진 중국-베트남 전쟁 당시 소총을 든 베트남 민병대원(왼쪽)이 포로로 잡은 중국 인민해방군 군인들을 감시하고 있다.당시 베트남은 민병대원까지 그러모아 필사적으로 대항했으며 해방군은 27일 만에 국경 밖으로 물러났다. [중앙포토]
━
사이 좋을 땐 우의관, 틀어지자 침략 경로
베트남을 '절대 건드릴 수 없는 이웃'으로 각인시킨 중국·베트남 전쟁은 동당 역에서 지척인 국경 관문 우의관(友誼關)에서 시작됐다. 2000년 이상 베트남과 중국의 경계였던 이 관문에 '우호'란 이름이 붙은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난 23일 오후 5시 전용 열차로 평양에서 출발한 김 원장이 그날 저녁 중국에 들어가면서 건넌 북한과 중국 사이 국경 다리에도 '우호'라는 명칭이 붙어있기 때문이다. 김 위원장은 압록강을 가로지르는 조중우의교(朝中友誼橋)를 건너 중국 땅으로 들어가 4500㎞를 달렸다. 북·중과 중월 국경을 이루는 두 시설물 모두에 우의(友誼)라는 단어가 붙었다는 사실에 눈길이 갈 수밖에 없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열차로 지나간 중국-베트남 국경지대의 관문인 우의관. 2000년 전인 중국 한나라 시절부터 중국과 베트남 경계이던 곳이다. 1965년 양국이 합의해 우의관으로 불리고 있다. 중국은 40년 전인 1979년 2월 우정을 상징하는 이 관문 등을 통해 베트남을 침공했다가 패퇴했다. [위키피디아]
우의관은 원래 중국 전한(前漢, 또는 西漢, 기원전 206~기원후 8년) 시절에 처음 설치돼 계릉관(鶏陵關)으로 불렸다. 명(明,1368~1662년) 초기인 1407년 ‘오랑캐를 누르다’는 의미의 진이관(鎭夷關)으로 불렸다가 명 말기에 ‘남쪽을 지키다’ ‘남쪽을 누르다’는 뜻의 진남관(鎭南關)으로 바뀌었다. 중화 제국주의적인 냄새를 풍기는 이름이다.
북중 국경의 조중우의교에서 중국-베트남 국경의 우의관에 이르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이동 경로.[그래픽=박경민 기자]
중국과 북베트남이 공산국가가 된 다음인 1953년 ‘남쪽과 화목하게 지낸다’는 목남관(睦南關)으로 변경됐는데 중국이 베트남전을 치르던 북베트남을 지원하는 등 양국 사이가 한창 좋던 1965년 ‘친구 사이의 정’이라는 뜻의 우의를 붙여 우의관이 됐다. 북중 국경의 압록강을 가로지르는 우의교는 원래 이름이 ‘압록강철교(鴨綠江鐵橋)’였는데 1990년 양국 합의로 이름이 바뀌었다. 공산국가 간의 정치적·군사적·경제적 결합과 우정을 상징하는 뜻에서 이런 이름을 붙였을 것이다.
1979년 2월 중국-베트남 전쟁 당시 중국 인민해방군이 장갑차를 앞세워 베트남을 침공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하지만 베트남과 중국 국경에 위치한 우의관은 피의 역사 현장이 됐다. 중국이 1979년 2월 17일 20만(중국 주장)~60만(베트남 주장)의 병력으로 베트남을 침공하면서 우의관을 침공로로 이용했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은 왜 같은 공산권인 베트남을 침공했을까. 1949년 공산 정권을 수립한 중국은 1976년 통일국가로 재출발한 공산 베트남이 고분고분하지 않은 데 불만이 많았다. 1975년 남베트남을 무력 점령하고 1976년 통일 공산국가인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을 수립한 베트남은 중국의 영향권에 들어가는 대신 친소련 노선을 걸었다. 베트남은 1978년 소련 주도의 공산권 경제협력기구인 코메콘(COMECON·경제상호원조회의)에 가입하고 소련과 상호우호협력조약을 체결했다.
소련과 이념투쟁과 국경분쟁을 벌이고 공산권 세계의 패권을 둘러싼 경쟁을 벌이면서 사이가 멀어진 중국은 베트남의 친소 노선을 거북하게 여겼다. 베트남을 ‘동양의 쿠바’로 부르면서 소련의 군사동맹국으로 간주했다. 베트남이 개인 토지와 재산을 압류하는 공산화 정책을 펼치면서 그전까지 경제권을 쥐고 있던 약 120만의 화교가 졸지에 재산을 잃고 보트피플이 되거나 이웃 중국으로 탈출하게 된 상황도 중국을 자극했다. 공산주의 이상과 거리가 먼 민족주의적 감정이다.
1979년 중국-베트남 전쟁 당시 베트남군이 포격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더욱 직접적인 문제는 베트남이 1978년 12월 25일 이웃 공산국가인 캄보디아를 침공해 점령한 것이다. 베트남과 이웃한 캄보디아에선 친중파인 폴 포트(1928~1998년)가 이끄는 공산 게릴라 조직인 크메르루주가 1975년 집권했다. 이들은 급속한 탈도시화와 농업 집단화를 추구하면서 나라를 ‘킬링필드’로 만들었다. 크메르루주는 약 800만의 국민 중 약 130만을 처형했으며 굶어 죽은 사람을 포함하면 170만~250만의 희생자를 낸 것으로 추정된다.
크메르루주는 이 과정에서 베트남에서 훈련받았다는 이유로 일부 캄보디아 군인도 처형했으며 베트남과 국경선을 둘러싸고 분쟁을 벌였다.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은 이런 배경에서 벌어졌다. 일종의 동남아시아 공산권 주도권 다툼이다.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으로 크메르루주는 태국 국경 쪽 밀림으로 들어가 다시 게릴라전에 나섰다. 베트남이 크메르루주를 권력에서 밀어낸 덕분에 캄보디아는 킬링필드에서 벗어나는 ‘부수적인 효과’를 얻었다.
1978년 12월 15일 친중국가 캄보디아를 침공한 베트남군이 이듬해 1월 초 프놈펜에 진입하고 있다.[위키피디아]
━
베트남의 친중 캄보디아 점령에 중국 군사보복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것이 ‘중국의 내 편 감싸기’다. 중국은 친중 성향의 크메르루주를 몰아낸 베트남에 분노했다. 같은 공산권 국가에 연대의식을 느낀 게 아니라 ‘친중’과 ‘친소’로 편을 나눠 서로 다르게 취급한 것이다. 친중이 아니라면 마음대로 군대를 보내도 된다고 여겼다. 이러한 편 갈이는 증오를 낳았고, 증오는 유혈극으로 이어졌다. 중국은 베트남이 1978년 후반에만 700차례 이상 국경 충돌을 일으켜 3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났다고 비난했으며, 베트남은 중국의 영토 침입으로 1978년에만 2175건의 충돌이 벌어졌다고 주장했다.
그 뒤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점령하자 중국은 베트남 침공을 계획했다. 공산 세계의 패권을 노리던 중국은 동남아시아, 특히 인도차이나 지역 공산권의 맹주를 꿈꾸는 베트남과의 유혈 충돌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념 동질성은 중국의 군사 공격을 예방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문제는 이념이 아니라 헤게모니와 국익, 그리고 민족 감정을 둘러싼 서로 다른 욕심이었다.
1979년 1월 1일 미중 국교 정상화를 계기로 중국 지도자 덩샤오핑(왼쪽)이 1월 18일부터 9일간 미국을 방문했다. 덩이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을 만나고 있다. 덩은 당시 '조그만한 친구가 말을 듣지 않아 엉덩이를 떼려야겠다"며 베트남 침공을 암시했다. [중앙포토]
당시 중국의 실질적인 지도자였던 덩샤오핑(鄧小平·1904~1997년)은 단계적으로 외교 절차부터 밟았다. 1979년 1월 1일 미국과 수교하게 되자 그해 1월 28일부터 9일간 미국을 방문하며 지미 카터(95세·1977~1981년 재임) 대통령과 다섯 차례 회담했다. 그는 카터에게 베트남과 관련해 이렇게 말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조그마한 친구가 말을 듣지 않아 엉덩이를 때려야겠다(小朋友不聽話 該打打屁股了).” 중화 제국주의적 발상이라고 비난을 받아도 아무런 할 말이 없는 발언이다. 그런 발언이 공산주의자의 입에서 거침없이 나왔다.
덩이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중국 인민해방군은 국경지대에서 전격적으로 베트남 공격을 시작했다. 중국의 베트남 침공이 덩샤오핑의 방미 직후 이뤄졌다는 점은 충격적이다. 중국 인민해방군은 우의(友誼)라는 글씨가 선명한 우의관을 지나 베트남에 쳐들어갔다. 우의는 필요할 때만 내미는 외교적 수사에 지나지 않았다.
우의관을 포함한 26군데를 거쳐 베트남으로 쏟아져 들어간 중국 인민해방군은 27일간 싸우면서 막대한 피해를 보았다. 당시 주력군이 캄보디아에 가 있던 베트남은 남아 있던 7만~10만 명의 정규군으로는 병력이 부족하자 15만 명 정도의 민병대까지 동원해 필사적으로 대항했다. 중국과의 국경에서 수도 하노이까지 불과 160㎞ 남짓 떨어져 있었다. 주력이 남쪽 캄보디아에 원정을 간 사이 수도를 중국에 함락당하면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기에 베트남군의 저항은 처절했다. 게다가 베트남군은 25년간 미국과 싸우면서 단련된 군인이었다.
험악한 산악 지형, 습한 열대 기후, 지하화한 통로와 군사기지, 익숙하지 못한 현지 지리도 해방군을 괴롭혔다. 해방군은 1953년 6·25전쟁이 끝난 뒤 전투를 경험하지 못했다. 게다가 중국은 1966~1976년 10년간 이념적 대소란인 문화대혁명을 겪으면서 사회와 경제가 피폐해졌으며 군 전력도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과잉 이념이 나라를 망치는 것은 중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전쟁 과정에서 쌍방이 막대한 인명 손해를 입었다. 중국 주장에 따르면 해방군 6954~8531명이 숨지고 1만4800~2만1000명이 부상했으며 238명이 포로로 잡혔다. 베트남 측은 해방군이 사망자 2만6000명을 포함해 6만2000명의 사상자를 냈다고 주장했다. 서방 정보기관은 약 2만6000명의 해방군이 목숨을 잃고 3만7000명이 부상한 것으로 추산한다.
베트남은 자국의 피해 규모를 밝히지 않았다. 중국은 베트남 정규군 3만~5만7000명과 민병대 7만 명이 숨졌으며 1636명이 포로가 됐다고 주장한다. 서방측은 베트남군 약 3만 명이 숨지고 3만2000명이 부상했다고 본다. 전쟁에서 피해 규모는 중요하지만, 이것만으론 승패를 확정할 수 없다. 전쟁 목적이 달성됐는지도 살펴야 한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6일 열차에서 내린 베트남 국경 기차역인 동당역 입구에 레드카펫이 깔려있다. 이곳은 1979년 2월 발발한 중국-베트남 전쟁 당시 중국 이민해방군의 침공로였다. [사진 영상캡처]
베트남을 침공한 해방군은 3월 초 국경에 접한 랑선 성의 성도 랑선 시를 점령하고 초토화한 뒤 3월 16일 베트남에서 철수했다. 이 랑선 성은 김 위원장이 베트남에 도착한 동당 역이 속한 지역이다.
그 뒤 중국과 베트남 양측 모두 자국의 승리를 주장했다. 하지만 베트남에 본때를 보여주기 위해 쳐들어갔던 중국 인민해방군이 아무런 이득도 얻지 못한 채 철군했다는 것은 전쟁 결과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베트남군은 자국을 침략했던 외국 군대를 다시 한번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20세기 들어 프랑스군과 미군에 이어 중국 인민해방군이 세 번째다.
그런데도 베트남은 캄보디아를 점령한 자국군을 철수하지 않았다. 캄보디아에서 베트남 군대를 철수시켜 친중 크메르루주를 구하겠다는 중국의 베트남 침공 목적은 달성되지 않았다. 베트남을 친소 국가에서 친중 국가로 바꾸지도 못했다.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중국의 의지는 실현되지 못했다. 대신 중국은 미국과 적극적으로 협력해 경제 발전에 박차를 가하면서 사실상 '반소련 블록'을 형성했다.
베트남은 1989년이 되어서야 캄보디아에서 군대를 철수했으며 소련이 무너진 1991년에야 중국과 관계를 정상화했다. 베트남은 1992년 한국과, 1995년 미국과 각각 국교를 맺고 본격적으로 경제 건설에 나섰다.
중국의 침략 앞에 고슴도치처럼 필사적으로 자신을 방어하는 의지와 신념의 베트남 군대를 본 때문일까. 그 뒤 중국은 베트남을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다. 최근 양국 사이에 해상 국경분쟁이 벌어지고 있지만, 중국은 베트남을 조심해서 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쉽게 굴복시킬 수 없는 나라라는 사실을 아픈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지도부에 새겨진 선 굵은 집단 기억이다. 이는 베트남의 국가 자산이 됐다.
베트남도 이 전쟁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당시 베트남과 우호조약을 맺은 소련의 존재가 전쟁을 막아주지 못한 것은 물론 전쟁이 벌어진 다음에도 중국에 별다른 물리적 압박을 가하지 못했다. 우방을 돕지 못하는 우호조약이나 외교적 약속은 휴짓조각일 뿐이며 한 나라의 생존은 어디까지나 국민의 의지와 용기로만 얻을 수 있다는 뼈아픈 가르침을 얻었다. 이런 교훈이 어디 베트남에만 해당할까.
40년 전 베트남·중국 전쟁은 우호의 이름 아래 줄서기나 굴욕을 강요하는 세력, 힘으로 주변국을 압박하는 나라, 주권을 침해하려는 이웃에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잘 보여준다. 김정은 위원장이 시대착오적인 열차를 타고 지나간 베트남·중국 국경의 흑역사를 보면서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하고 교훈을 얻어야 할까.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출처: 중앙일보] 베트남 못 건드리는 중국, 김정은 통과 중월국경에 이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