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19.03.29 15:08
울릉도 옛 입구는 태하·학포, 역사 느낄 수 있게 벽화 그려 명소로 떠올라
‘강원 감사 임한수林翰洙의 장계를 보니 울릉도鬱陵島 수토관搜討官의 보고를 일일이 들면서 말하기를 일본 선박이 요사이 대중없이 오가며 이 섬을 눈독 들이고 있다고 합니다. 봉산封山은 원래 중요한 땅이고 조사하는 것도 정해진 규칙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본 사람들이 남몰래 나무를 베어서 가만히 실어가는 것은 변방의 금법에 관계되므로 엄격하게 방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을 서계書契를 지어 동래부의 왜관에 내려 보내 외무성에 전달하게 하소서.
다만 생각건대, 이 섬은 망망대해 가운데 있는데 그대로 텅 비워 두는 것은 대단히 허술한 일입니다. 그 형세가 요충지가 될 만한가, 방어를 빈틈없이 할 수 있는가를 응당 두루 돌아보고 처리해야 할 것입니다.
본 아문에서 천거한 사람인 부호군 이규원李奎遠을 울릉도 검찰사檢察使로 임명하여 가까운 시일 내로 달려가서 철저히 헤아려 보고 의견서를 작성하여 보고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고종은)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 <승정원일기 고종 18년(1881년)>
이처럼 고종의 명을 받은 검찰사 이규원(1833~1901)은 이듬해인 1882년 4월 7일 울릉도 시찰에 나선다. 구산포(경북 울진군 기성면 구산동)에서 순풍을 기다린 그는 4월 29일 순풍을 얻어 3척의 배를 이끌고 울릉도로 항해했다. 다음날인 4월 30일 아침 8시, 울릉도 서쪽 해변에 위치한 포구에 배를 댄다. 이곳의 당시 지명은 소황토구미小黃土邱尾, 현재의 학포다.
검찰사 이규원의 행적은 검찰 후 저술한 <울릉도 검찰일기儉察日記>에 구체적으로 적혀 있다. 꼼꼼하게 울릉도를 조사한 후 서울로 돌아간 이규원은 일본인들이 송도松島라 푯말을 세워 놓고 나무를 베고 있다고 분노하며 고종에게 개척을 건의한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고종은 “(울릉도를) 한시라도 버려두어서는 안 되며 한 뼘의 땅이라도 포기해서는 안 될 것이다”고 개척령을 내린다.
수려한 경관 자랑하는 태하해안
현재는 도동과 저동을 통해 울릉도로 들어가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예로부터 울릉도의 입구 노릇을 한 건 태하와 학포였다. 이규원뿐만 아니라 2~3년마다 파견된 수토관(조선 조정은 1693년 안용복과 일본 어부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자 울릉도에 민간인 거주를 금지시켰다. 수토관은 이를 확인하기 위해 파견된 관리)들도 이곳을 통해 입도해 임무를 수행했다.
태하항에서 오른쪽으로 따라 들어가면 태하향목관광모노레일이 나온다. 이 모노레일을 타고 오르면 현포 방면의 해안 절벽과 대풍감을 바라볼 수 있는 향목전망대로 이어진다. 모노레일 옆에 해안산책로로 오르는 경관 교량이 있다. 지난해 4월 신축된 이 교량은 노약자를 위해 계단 없이 지그재그의 슬로프로 만들어졌다. 벽에는 태하와 학포에 전해 내려오는 수토 및 개척시대의 역사를 그림으로 그려 넣어 울릉도의 역사를 느낄 수 있게 했다.
경관교량의 바로 옆에는 황토굴이 있다. 태하의 옛 이름은 큰황토구미로, 개척민들이 와서 보니 바닷가 산에 황토를 파낸 흔적이 남아 있어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수토관들이 울릉도에 오면 태하의 황토와 향나무를 가져가 진상했다는 기록도 있다.
교량 끝에서 5분 정도 걸어가 모퉁이를 돌면 널찍한 해안선이 펼쳐진다. 울릉도 특유의 복잡하고 거친 해안 굴곡에 파도가 시원하게 부딪치고 포말을 일으키며 부서진다. 태하 해안산책로는 울릉도의 대표 지질명소 중 하나다. 대부분 조면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파도와 바람에 의해 특이하게 침식된 지형이 발달해 수려한 해안절경을 자랑한다.
5분 정도 걸어가면 매바위가 나온다. 침식과 풍화작용으로 매의 머리처럼 생겼다. 지나가는 탐방객의 머리를 쪼아댈 냥 부리를 길 위로 들이밀고 있다. 15분 정도 나아가면 가재굴이 나온다. ‘가재’는 ‘물개’의 울릉도 방언이다. 옛날에 이곳에 물개가 많이 살았다고 해서 가재굴로 불리지만, 현재는 물개가 서식하지 않는다.
가재굴은 전형적인 해식동굴로 하부절리가 파도에 의해 침식을 많이 받아 형성됐다고 한다. 해안산책로 끝에서 우거진 소나무 사이의 오솔길을 따라 오르면 태하등대까지 갈 수 있다. 모노레일을 타고 올라 해안산책로로 내려오는 것도 좋다. 돌아오며 바라보는 태하마을 전경도 압권이다.
해안산책로를 되짚어 돌아와 마을로 진입한 뒤 울릉수토역사전시관을 지나 150m쯤 걸으면 자그마한 절이 보인다. 천태종 사찰 삼도사 왼편이 학포 옛길 들머리다. 어택캠프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는 이소민 문화해설사의 딸인 조안나씨가 길 안내를 맡았다.
학포옛길, 이규원이 처음 걸은 길일까?
학포옛길은 갈림길 없는 외길로 전체 길이는 약 1.3km에 편도로 한 시간이면 넉넉하다. 이 길은 검찰사 일행이 울릉도에서 최초로 걸은 숲길일 수도 있다. <울릉도 검찰일기>에 따르면 학포에 도착한 이규원 검찰사의 첫 일정이 ‘산길을 따라 태하로 이동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불단 왼쪽으로 접어들면 이정표가 나온다. 돌아보니 남양초등학교 태하분교장이 보인다. 옛 태하초등학교다. 현재 태하분교장은 해병대 제1사단 신속대응부대의 전지훈련 숙영지로 사용되고 있다. 취재 당일에도 건물을 드나드는 군인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학포는 원래 엄청 큰 마을이었습니다. 옛날 개척민들이 전부 학포로 들어왔기 때문이죠. 태하는 옛 군청소재지였고요. 예전에는 학포분교에서 초등학교 3학년까지 다니고, 4학년이 되면 이 옛길을 따라 태하초등학교로 등교했다고 해요. 가장 많을 때는 태하초등학교 재학생이 400여 명이나 됐었다고 합니다. 학포분교는 1999년, 태하초등학교는 2012년부로 폐교됐죠.”
길 입구에 흑염소 한 마리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다. 울릉도 흑염소는 약초를 먹고 자라기 때문에 맛과 약효가 좋기로 소문이 자자하다. 아직 봄이 완연하지 않았는데도 길 양 옆으로 다양한 풀들이 조금씩 자라고 있었다. 빠듯하게 이어지는 오르막 곳곳에 축대가 건설돼 있다. 조씨는 “아마도 일제강점기 시기 일제의 폭압을 피해 울릉도로 이주한 사람들이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새싹을 틔우고 있는 말오줌대, 빨갛게 피어 있는 동백꽃들을 지나 고개에 오르면 시야가 터지면서 학포해안 전경이 펼쳐진다. 멀리 보이는 해안절벽은 마치 보살들이 줄지어 서 있는 듯 천태만상이다.
“옛날엔 학포에서도 황토가 나오지만 태하보다는 적게 나와 작은 황토구미라 불렸다고 합니다. 학포鶴圃란 이름은 마을 뒤편에 학이 앉아 있는 듯한 모습의 바위가 있어 붙었다고 하고요. 안타깝게도 1958년 태풍 때문에 부리 부분이 바람에 떨어져 몸통밖에 남지 않았어요.”
오솔길을 마저 내려서면 도로 끝에 닿는다. 도로를 따라 마저 내려가면 캠핑장이 나온다. 캠핑장 내에는 이규원 검찰사 묘비석이 있다. 경기도 김포시 외곽에 있던 것을 2006년 김포 신시가지 도로확장 공사 때 철거돼 옮겨졌다고 한다.
마을 안쪽에는 검찰사 일행이 남긴 ‘임오명각석문壬午銘刻石文’이 있다. 바위 이곳저곳에 울릉도라는 도명과 본인의 직함인 검찰사 이규원, 임오 오월이라는 연월과 동행인 유연호, 고종팔, 서상학, 심의완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울릉도의 역사가 생생히 살아 있는 길이다.
주변 명소
수토역사전시관
수토의 역사는 조선이 지속적으로 울릉도와 독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했다는 증거다. 태하에 있는 울릉수토역사전시관에선 200여 년간 이어진 수토의 역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수토사 33인의 이름과 수토군의 편성, 기록 속의 수토, 수토사가 남긴 자료 등 수토에 관련된 다양한 유물과 해석을 한데 모았다.
본관 전시관 1층은 기억의 순환, 사무실, 회의실, 체험실, 2층 수토에서 개척까지, 대풍헌·대풍령 영상관, 미래의 수토사, 2~3층은 수토의 흐름, 3층 전시 울릉, 역사적 획을 긋다, 주제영상관-수토란 무엇인가 등으로 짜여졌다. 본관 건물 앞 광장에 복원된 거대한 수토선搜討船도 볼거리다. 과거 삼척시 등 육지에서 파견된 수토사들이 타고 온 배다. 수토선은 총 3층으로 되어 있으며 직접 올라 볼 수 있다. 수토 수군 체험, 수토사 복식체험 등도 해볼 수 있다.
문의 054-791-9960. 관람시간 오전 9시~오후 6시. 월요일 및 명절 당일 휴관. 관람요금 성인 3,000원. 청소년 2,500원. 어린이 2,000원.
수토사 각석문
원래 태하마을의 좌우 해안에는 수토사들의 방문 기록이 수없이 많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근현대에 새마을운동 등 마을 개발 및 개량 사업이 이어지면서 많은 수가 사라지거나 훼손됐다. 현재 대표적 각석문으로는 태하의 수토사 각석문, 학포에 이규원 각석문이 남아 있다.
태하 수토사 각석문은 수토역사전시관에서 절벽을 따라 해안 방향으로 3분 정도 거리에 위치해 있다. 안내판이 붙어 있는 데크 바로 앞에 있다.
1801년 삼척영장을 지낸 김최환, 1804~1805년까지 삼척영장을 지낸 이보국의 각석문이다. 이 주변으로 방파제 뒤쪽까지 암벽 하단에 다양한 각석문이 존재했지만 항만공사 과정에서 대부분 없어졌다고 한다. 각석문에는 수토사뿐 아니라 동행했던 군관, 왜학, 사령 등의 관직명이 새겨져 있어 울릉도 수토관과 그 수행원들의 명단 및 구성을 살펴볼 수 있다. 조선시대 울릉도 수토 사실을 증명해 주는 역사적 사료다.
성하신당
울릉도 검찰일기를 보면 거의 매일 신당에 제사를 올렸다는 기록이 나온다. 성하신당은 울릉도의 대표 성황당으로 울릉도 전체의 성황신당 지위를 지니고 있다. 예로부터 울릉도에서 크고 작은 배를 만들면 선주들이 가장 먼저 이곳에 배를 타고 와서 제사를 지낸 후 조업을 시작한다고 한다.
신당 안에는 동남동녀童男童女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성하지남신위聖霞之男神位와 성하지여신위聖霞之女神位다. 이는 조선 태종 때 임명된 안무사 김인우에 얽힌 전설에서 유래했다.
“울릉도에 살던 백성들을 본토로 데리러 온 김인우 안무사按撫使가 섬을 다 살피고 돌아오려니 거센 풍랑이 일어 발이 묶였다. 그러다 어느 날 밤 어린 남녀 2명을 섬에 남겨두고 가라는 꿈을 꾸게 됐다. 일행 중 동남동녀 2명에게 벼루와 먹을 놓고 왔다고 거짓말해 찾으러 가게 하고 몰래 출항하자 파도가 멎고 동풍이 불었다. 동남동녀는 뒤늦게 이를 알고 울부짖다 죽고 말았다. 죄책감에 시달리던 김인우는 8년 후 다시 울릉도에 와 수색했으나 두 동남동녀는 꼭 껴안은 채 죽어 백골이 되어 있었다. 두 사람의 혼을 달래기 위해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냈는데, 이게 바로 성하신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