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19.03.24 16:04
나리분지~말잔등~성인봉~나리분지로 원점회귀 13km 걸어
“이번 울릉도 겨울은 눈이 참 많이 내리지 않아서 걱정이에요.”
깊은 눈에 허리까지 빠져 옴짝달싹 못 하고 탈진해 있자 울릉산악회 한 대원이 구해 주며 말을 건넸다. 야속한 눈길로 올려다보지만 사뭇 진지한 표정에 그만 입을 다물었다. 정상 능선부에 3m가 넘는 눈이 쌓여 있었지만 평년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설국’이라 불리는 겨울 울릉도의 위엄이다.
순간 힘이 빠져버려 포근한 하얀 홑이불 같은 눈에 편안히 몸을 묻고 고개를 돌리자 푸른 수평선과 하얗게 물든 마루금의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여름 울릉도였다면 원시림에 갇혀 볼 수 없었을 울릉도 곳곳의 속살들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황홀한 겨울 울릉도에 매료되는 순간이었다.
여태껏 성인봉 등산은 대개 저동이나 도동 방면을 들머리로 올라 나리분지로 내려서거나 다시 되돌아갔다. 저동과 도동에 숙박 및 편의시설이 밀집해 있고, 나리분지의 교통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현재는 일주도로 완전 개통으로 나리분지가 차로 20분 거리가 됐다. 앞으로 나리분지를 들머리로 한 산행도 얼마든지 가능해진 것이다.
이에 따라 이번 취재는 대한산악구조협회와 동행해 나리분지 원점회귀 코스를 걸었다. 나리분지에서 나리장재에 오른 뒤, 능선을 따라 말잔등과 성인봉을 경유한 뒤 원시림 골짜기를 따라 나리분지로 회귀했다. 훈련을 위해 울릉군청과 사전 협의를 거쳐 일부 정규등산로가 아닌 구간도 운행할 수 있었다.
훈련 첫 날, 전국 17개 시군구에서 모인 300여 명의 구조대원들과 취재팀은 3시간여의 출항 지연 끝에 저동항에 도착했다. 섭외한 차량에 타고 일주도로를 따라 베이스캠프인 나리분지로 이동했다.
20분 만에 갈 수 있는 나리분지
“원래 나리분지는 섬을 반대로 돌아서 가야 됐기 때문에 (차를 타고) 1시간 30분이나 걸렸어요. 그런데 이젠 20분이면 갈 수 있죠. 관광객뿐만 아니라 주민들도 무척 편리해졌어요.”
나리분지는 울릉도 유일의 평지다. 화구의 일종인 칼데라가 함몰돼 생성됐다. 섬말나리가 많아 이름이 유래됐다는데 많은 눈에 덮여 있어 찾기 어려웠다. 나리분지 주민들은 고로쇠수액 채취로 분주했다. 해발 500m 이상 고지에서 생산된 ‘우산고로쇠’는 전국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현지 주민은 “눈이 많이 와야 고로쇠가 많이 나는데 올해는 눈이 평년의 3분의 1 수준으로 내려 생산량이 적다”고 울상을 지었다.
지금은 거주하는 주민들 수가 적지만 조선 후기에 나리분지는 울릉도 개척민들이 가장 큰 군락을 이뤘던 곳이다. 조선 후기 이규원 검찰사의 <울릉도검찰일기>에도 “나리동을 행정 및 군사 시설의 중심으로 삼아야 한다”고 고종에게 진언한 구절이 남아 있다. 현재도 투막집과 너와집 등 개척민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문화재들이 남아 있다.
순례의 길, 나리장재길
이튿날 이른 아침, 동계훈련 개회식을 마치고 각 대별 훈련지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취재팀은 성인봉 능선에서 훈련하는 울산, 경기, 경북 구조대 86명과 동행했다. 울릉산악구조대의 최종술 대원이 안내했다.
마을길을 따라 나리촌식당 방면으로 나아갔다. 길 양옆으로 밭이 펼쳐져 있다. 나리분지의 토양은 화산재로 구성돼 있어 물을 가둬놓기 어려워 논농사를 짓기 어렵다고 한다. 시멘트 도로가 끝나고 임도가 시작될 무렵 최 대원이 훈련 코스를 안내했다.
“지금 들머리로 잡은 길은 나리마을과 저동마을을 잇는 옛길입니다. 원래는 어느 정도 등산로가 정비돼 있는데 지금은 안 보이죠. 겨울에는 말잔등 위에 있는 공군 레이더기지로 이어진 전봇대를 참고로 해서 능선과 골짜기를 따라 길을 잡으면 됩니다.”
고개를 들어보니 정면에 위치한 산 능선 위에 군사시설의 모습이 또렷하다. 임도 끝에 위치한 주황색 기둥의 출렁다리를 건너면 본격적인 산길로 접어든다.
산 아래에는 거의 쌓여 있지 않던 눈이 고도를 높일수록 점차 두터워진다. 섬단풍나무, 섬피나무로 가득한 골짜기와 능선을 지그재그로 오가며 꾸준히 고도를 높인다. 선두를 교대해 가며 꾸준히 러셀과 휴식을 병행한다. 구조대원들은 훈련 및 비박 장비를 가득 짊어지고도 급경사를 거침없이 오르는 철인 같은 체력을 자랑했다. GPS상 등산로를 버리고 눈이 적게 쌓인 능선으로 우회하기도 했다.
2시간 30분 남짓 악을 써가며 오르자 눈 속에 묻힌 나리장재 안내판이 나타났다. 해발 798m의 위치한 이 고개는 나리마을 사람들이 나무 장작을 도동지역에 팔고 장을 본 뒤 돌아오는 지름길로 사용됐다고 한다. 울릉도 개척이 시작된 1880년대부터 일주도로가 개설되기 시작한 1980년대까지 약 100년 동안 사용된 길이다.
“이곳은 1944년 12월 12일, 일본의 기독교 탄압을 피해 온 주낙서 목사, 오우석 조사, 백만술 영수가 순교한 곳입니다. 이들은 현포에서 예배를 마치고 이 길을 통해 저동으로 돌아가려다가 폭설을 만나 동사했어요. 13일 만에 발견된 주 목사의 시신은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말잔등이 본래 이름
나리장재에 닿으면 힘겨웠던 오르막은 끝난다. 하지만 이젠 사람 키보다 높게 쌓인 눈을 헤치는 일이 문제다. 완만한 능선을 따라 겹겹이 쌓인 눈을 뚫고 오른다. 능선 끝 정상부에 군부대 건물이 얼핏 보인다. 말잔등 레이더기지는 사진 촬영이 금지돼 있다. 지도를 보니 간두산, 천두산, 말잔등 세 개의 지명이 한 데 모여 있다.
“저 레이더기지가 위치한 정상이 말잔등입니다. 정상부가 말 등처럼 평평해서 붙여진 이름이죠. 지도에 따라 천두산千頭山이나 간두산干頭山이라고도 되어 있는데 울릉도 사람들은 처음 듣는 이름이에요. 국토지리정보원에 항의해도 ‘바로 처리하기 어렵다’고 하고 말더라고요.”
레이더기지를 지나자 비로소 우뚝 솟은 성인봉이 보인다. 성인봉과 말잔등 사이에는 두 개의 안부가 있는 능선으로, 이곳이 울릉도 최대 적설지다. 거대한 눈처마 위를 걷다 보면 대부분 무릎, 깊게는 허리까지 푹푹 빠진다.
20분쯤 눈 속을 헤엄쳐 올라 성인봉에 닿자 노력을 보상해 주듯 환상적인 설경이 펼쳐진다. 남쪽 방향의 조망은 봉우리에 막혀 있으나, 북쪽 나리분지를 둘러싸고 장쾌하게 뻗어 있는 외륜봉의 능선들이 시원하다. 미륵산, 형제봉으로 이어져 능선의 마침표로 뾰족 솟아 있는 송곳산이 절경이다.
“울릉도 봉우리 중 미륵산, 송곳산처럼 ‘산’으로 끝나는 명칭들은 수정이 필요해 보입니다. 백두산처럼 울릉도도 전체를 하나의 산으로 봐야 되기 때문이지요. 최고봉도 성인산이 아니라 성인봉인걸요. 19세기 말 이규원 검찰사가 그린 것으로 알려진 <울릉도 내도>에도 봉우리 이름이 전부 추봉, 항봉 등 봉峰자로 되어 있어요. 한번 논의해 볼 문제입니다.”
성인봉에서 나리분지로 난 정규 등산로가 서쪽에 뻗어 있으나 설동 구축 훈련 취재로 시간이 지연돼 울릉군청 및 울릉산악회 소속의 최종술 대원의 인솔을 따라 비법정 탐방로를 이용해 하산했다. 성인봉과 천두산 사이의 가파른 골짜기였다. 눈이 허리까지 쌓여 있는데다 경사가 급해 아예 드러누워 미끄럼을 타듯 엉덩이 썰매로 수십 미터씩 미끄러져 내려왔다.
나리분지로 내려서자 정규 등산로인 임도를 만난다. 신령스러운 성인봉에서 내려와 신령수라 이름 붙은 약수터에서 시원한 물 한바가지를 마시고 꾸준히 임도를 따라간다. 이 임도는 나리분지 숲길로 너도밤나무와 마가목, 고로쇠나무 등이 자생하는 원시림(천연기념물 189호)을 거닐 수 있는 길이다. 이제 눈이 녹으면 생명으로 자욱하게 차오를 테다.
산행길잡이
산행은 대원사 코스나 KBS울릉중계소를 들머리로 해 나리분지로 종주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두 코스 모두 한 시간 정도 오르면 팔각정에서 길이 합쳐진다. 성인봉을 지나 나리분지까지 내려서는 길은 급경사지만 데크 정비가 잘된 편이다. 총 8.2km, 6시간 정도 소요된다. 워낙 경사가 급하기 때문에 체력 분배를 잘해야 한다.
나리분지에서 산행을 시작할 수도 있다. 나리장재에서 말잔등 방향으로 능선 숲길을 따르면 되며, 말잔등에서 남쪽 방향 울릉읍 쪽으로 내려가는 길 외에는 헷갈릴 일이 없다. 약 10km, 6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숙식(지역번호 054)
나리분지는 나리촌식당(791-6082)의 산채정식(2만 원)과 씨껍데기술(1만 원)이 유명하다. 나리분지의 야영은 금지돼 있다. 대신 민박을 겸한 식당들이 많다. 산마을식당(791-4643), 뿌리깊은나무민박(791-6117) 등이다.
사동, 저동, 도동 방면에는 숙박과 편의 시설이 밀집해 있다. 울릉도 숙소 중 가장 규모가 큰 대아리조트(791-8800)도 이곳에 있다. 등산인들이 즐겨 찾는 숙소는 KBS울릉중계소 앞에 위치한 울릉콘도(016-508-9962)와 울릉농협저동지점 바로 옆에 위치한 어택캠프게스트하우스(010-5276-0428)가 있다. 울릉콘도의 최희찬씨, 어택캠프의 이소민씨 모두 울릉도 산행 정보에 정통한 산악인이다.
교통(지역번호 054)
겨울엔 포항에서만 울릉도행 배를 운항한다. 현재 2월 28일 강릉, 3월 15일 후포, 3월 22일 묵호 순으로 운항이 재개됐다. 기상 상황에 따라 운항 여부 및 시간은 매우 유동적이다. 운항 여부 확인과 예약은 각 선사 홈페이지나 전화로 하면 된다. 울릉군 문화관광(www.ulleung.go.kr/tour) 홈페이지에서 배 시간 및 요금, 각 선사 홈페이지 및 전화번호를 확인할 수 있다.
일주도로 개통으로 버스 노선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도동에서 출발해 서면 방면인 시계방향으로 도는 노선과 반대로 북면 방면인 반시계방향으로 도는 노선이 생긴 것. 하루 13회(06:10~18:20) 운행하며 운행여건에 따라 변경될 수 있다.
문의 무릉교통(054-791-8000).
택시를 이용한다면 개인택시 울릉지부(791-2612), 울릉택시(791-2315)에 문의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