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20.02.24 17:19
입춘 바람이 동해 물살에 밀려오는 듯 정상에서
코끝이 찡해져 여운 남겨
도둑 산행을 했다. 2005년 여름밤, 이룬 것 하나 없이 맨 주먹으로, 미시령 큰 바람 앞에 흩날리고 있었다. 자칫하면 갈 곳 잃은 마음이 바람에 날려갈 것 같았지만, 신선봉을 넘고 대간을 넘었다. 비법정 코스인 걸 알았지만, 어둠을 틈타 산을 훔쳤다. 산이라도 훔쳐 양식인양 쌓으면 가난이 지워질 것 같았다. 뒤에서 누군가 쫓아오는 느낌이었지만 나를 품에 안고 헐떡이느라 신경 쓸 겨를 없었다.
마산봉 바람은 왜 그리 서글피 우는지, 무심히 펼쳐진 세상은 왜 이리 아름다운지, 토악질 같은 숨을 뱉어내는 사이 목매고 싶었던 마음이 툭 튀어나와, 살아보겠다고 차가운 땅에서 펄떡이고 있었다. 마산봉은 흔들리던 나를 무심히 읽어 주었다. 한 번도 삶 앞에 초연한 적 없었지만 초연한 산이 내게 스며드는 것이 좋았다. 백두대간 한계선인 진부령에서 등산객을 모두 스쳐 보내고도 산을 떠날 수 없었다.
19명이 줄지어 오르는 잔칫집 산행
다시 진부령이다. 왁자지껄해서 찬 공기가 후끈 달아오르는 것만 같다. 백두대간 마지막 취재산행을 위해 전국에서 17명의 블랙야크 셰르파와 산꾼이 모였다. 그동안 취재 효율성을 위해 한정된 신청자만 받았지만, 마지막을 기념하려 잔칫집 분위기를 내기로 했다. 김승환, 권태도, 허영섭, 변재수, 유영열, 최용원, 김윤희, 이정윤, 임명식, 박춘영, 김재효, 이선호 셰르파와 김찬일, 최경순, 문승영, 성예진, 이재승씨가 함께했다.
비법정길과 산불방지 출입금지 구간을 덜어내니, 마산봉만 남았다. 합법한 산행을 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듬성듬성 대간을 타는 셈이라 아쉽다. 손을 모아 우렁차게 “백두대간! 파이팅!”을 외치고 오른다. 아니 도로를 따른다. 갔던 길을 되돌아오는 코스이니, 갈 땐 차도를 따르기로 한다. 19명이 줄지어 걷는다. 취재산행이 아니라 산악회 산행 같다.
오늘은 입춘이다. 쨍하게 햇볕이 쏟아져 내리며, 봄의 시작을 알린다. 폐허로 남은 알프스리조트에는 여전히 동장군의 부대가 진을 치고 있다. 텅 빈 건물 주변을 흰 눈이 메웠다. 마산봉은 알프스스키장으로도 유명했다. 눈이 많이 오는 이곳은 국내 스키장 중 자연설 비율이 가장 높은 곳이었다. 용평리조트에 이어 한국에서 두 번째로 1976년에 문을 열었으나 2006년 경영악화로 문을 닫았다. 2008년 재개장 시도가 있었으나 시공사 부도로 지금까지 폐허로 남아 있다. 거대한 리조트 건물이 눈밭에 유물처럼 덩그러니 서 있다. 깊은 상념에 잠긴 듯 고요한 것이, 잃어버린 시절을 추억하는 듯하다.
마산봉馬山峰(1,052m)은 말과 관련 있다. 미시령과 진부령길이 없던 시절, 대간령大間嶺(새이령)은 산세가 험하기로 유명한 신선봉과 마산봉 사이를 넘는 가장 쉽고 짧은 지름길이었다. 통행하는 사람과 물자가 많아 고성과 속초의 마부들은 이 길을 통해 수산물을 날랐고, 마장터란 이름도 마방과 장터가 있었다고 하여 유래한다. 말 ‘마馬’자를 쓰는 마산봉도 여기서 이름이 왔을 가능성이 높다.
스패츠와 아이젠을 차고 눈부신 설산으로 든다. 흰 풍경이 시야에 들어온다. 눈 덮인 낙엽송 숲길이 도시의 예민해진 마음의 결을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숲을 걷는 것만으로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차갑지만 순백의 싱싱함으로 가득하다.
된비알이 떠들썩했던 분위기를 진중하게 바꿔 놓는다. 들뜬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며, 1,000m 넘는 큰 산의 내공을 발바닥에 각인시킨다. 정직한 걸음의 힘을 아는 산꾼들이 열기를 뿜어내며 산에 몰입한다.
러셀이 되어 있으나 산길에서 한 발짝만 벗어나면 쑥 빠진다. 이상 기온으로 눈 구경하기 어려운 때임을 감안하면, 축복 받은 산행이다. 한숨 돌릴라 치면 눈밭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일행들의 웃음이 울려 퍼진다. 얼마만의 여유인가. 백두대간 특성상 쫓기듯 종일 걸어도 야간산행 했던 날이 많았는데, 가야만 하는 먼 산줄기가 없다는 것이 홀가분하면서 아쉽다.
드라마틱한 풍경 반기는 마산봉 정상
야윈 신갈나무와 쇠물푸레 덕분에 고도를 높이는 족족 경치로 발품을 갚는다. 흰 이불을 덮고 잠 자는 것만 같은 진부리와 흘리 일대가 나무 사이로 드러난다. 그렇게 보면 마산봉은 간성읍 흘리가 꾸는 꿈이다. 가파른 오르막은 달콤한 잠처럼 길지 않다. 꿈결 같은 설경이 마산봉 정상에서 드라마틱하게 펼쳐진다.
정상다운 너른 터가 2년을 끌어온 백두대간 종주의 마침표를 찍기에 제격이다. 입춘이 무색하게 강원도에는 한파주의보가 내렸으나, 바다처럼 파란 하늘이 빛으로 대간을 구석구석 비춘다. 벼랑 끝 정상에 올라서자 온 몸을 와락 끌어안는 바람. 잘 지냈냐고 묻는 것만 같은 산. 그 꼭대기에서 10초쯤 실눈을 뜨고 머무르자, 동해의 봄물살이 바람을 타고 밀려오는 것 같은 기분 좋은 착각이 든다. 눈을 뜨자, 갈 수 없는 금강산 향로봉 산줄기가 야성미 넘치는 백호 무늬마냥 멋있게 뻗었다.
이제야 대간 종주가 끝났다는 것이 실감난다. 골산 특유의 힘이 느껴지는 병풍바위봉과 신선봉 너머 설악산이 미인의 눈썹처럼 흘러가고, 감격보다 먼저 허기가 찾아온다.
식은 도시락을 먹으며 산꾼들과 못 다한 안부를 전한다. 화기애애한 잔칫집 분위기 속에서 점심을 흡입하듯 먹고, 절제된 동양화 같은 풍경 속으로 뛰어든다. 왔던 길 대신 임도를 따라 둘러서 하산한다. 완만하게 흘러내린 임도를 따라 내려서는 길, 부드러운 숨결 속에서 일행들의 대화가 삼삼오오 피어오른다. 부드러운 눈길이 딱딱한 등산화를 푹신하게 받쳐 준다. 2년 동안의 구간종주를 끝내는 걸음이 아쉽지만, 내리막길은 금방 알프스리조트 지나 진부령 표지석 앞으로 인도한다.
진부령 표지석 앞에서 단체사진을 찍는 것으로 백두대간 종주를 끝낸다. 저 산줄기는 이상한 힘이 있어, 끝인데 끝이 아닌 것만 같다. 저 징그럽게 고통스런 산줄기가 너무 그리워서 견딜 수 없을 것만 같다.
마산봉 구간 종주가이드
마등령에서 미시령, 미시령에서 대간령까지 비법정 구간이다. 대간령에서 병풍바위봉 넘어 마산봉까지는 원래 산행 가능하지만 봄철 산불조심기간(2.1~5.15)에는 산행이 통제된다. 알프스리조트에서 마산봉 정상을 다녀오는 것이 합법적인 에코트레일이다. 다만 온 길 그대로 내려오는 것을 피하기 위해 정상에서 직진해 임도로 둘러 내려오는 코스를 많이 이용한다.
진부령에서 알프스리조트까지는 산길로 가는 방법과 도로를 따르는 방법 두 가지가 있다. 약식으로 구간 종주를 마무리하는 이들은 알프스리조트에서 산행을 시작했다가 끝낸 후, 진부령까지 차로 이동해 표지석 앞에서 인증사진을 찍는다. 진부령에서 마산봉 정상까지 5.5㎞이며, 임도로 하산할 경우 총 12.5㎞이다. 전반적으로 산행은 쉽지만 알프스리조트에서 정상까지 2.2㎞ 구간이 가팔라 1~2시간 정도 헐떡일 각오를 해야 한다.
교통
동서울터미널에서 진부령을 거쳐 대진 혹은 간성으로 가는 버스가 1일 6회(07:20, 08:20, 09:40, 13:00, 15:00, 19:15) 운행하며 2시간 20분에서 최대 2시간 50분 걸린다. 요금 1만7,700원. 다른 지역에서는 인제군 북면 원통터미널에서 진부령 가는 버스(1일 9회 운행, 07:00~18:40)를 탈 수 있다. 요금 3,800원. 40분 소요. 하산 후에는 진부령에서 원통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타고 원통터미널로 이동해서 고속버스를 갈아타야 한다. 원통에서는 동서울행 버스가 20~30분 간격으로 운행하며 막차는 19시 30분.
맛집(지역번호 033)
진부령 부근 용대리는 황태식당이 즐비하다. 국내 황태 생산의 7할을 차지하는 전국 제일의 황태생산지다. 산골황태3대식당(462-9361) 황태삼합(1만5,000원)이 별미다. 황태, 더덕, 삼겹살에 파채, 팽이버섯, 양파가 매콤하게 고추장양념이 되어 나온다. 2인분 이상 주문 가능하다. 이밖에 황태구이정식(1만2,000원), 황태국밥(8,000원), 황태청국장(9,000원), 황태강정(2만 원) 등이 인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