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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까지 고소한 재래돼지 뼈등심… 품종 알고 먹을수록 사랑스러워

산야초 2021. 1. 2. 12:54

[정동현의 Pick] 지방까지 고소한 재래돼지 뼈등심… 품종 알고 먹을수록 사랑스러워

[아무튼, 주말] 돼지고기

정동현 음식칼럼니스트

입력 2021.01.02 03:00

서울 홍은동 '어라우즈'의 재래돼지 뼈등심 스테이크(앞)와 자숙멸치 타르타르./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국사 선생님은 늘 두루마기를 입고 학교에 왔다. 머리가 반쯤 벗겨진 그 선생님은 한민족의 우수성 설명하기를 좋아했다. “돼지를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심지어 창자까지 다 먹는 민족은 우리밖에 없다 이거야.” 선생님의 말에 따르면 돼지를 다양한 방식으로 남김 없이 먹는 것은 우리 민족이 지적으로나, 심미적으로 뛰어나다는 증거 중 하나였다. 하지만 외국에 나가 보니 눈이 파란 서양인들도 돼지머리, 창자, 족발을 오래 전부터 먹고 있었다. 스페인에서는 돼지고기 뒷다리로 생햄을 만들고 사육 방법과 양육 기간에 따라 등급까지 나눴다.

 

그에 비해 한국은 돼지고기를 먹는 방식이 단순하다. 무엇보다 얼마 전까지 돼지는 그저 돼지일 뿐이었다. 돼지도 여러 종이 있고 종에 따라 맛이 다르다. 최근 돼지고기도 종을 구분하여 파는 식당들이 여럿 생겼다.

 

경기도 광명시 광명전통시장에 가면 ‘광명돈까스’라는 입간판 하나 건 집이 있다. 영업 시간이 가까워지니 어디선가 젊은이들이 몰려와 줄을 섰다. 이 집 주인장은 매번 돼지 품종을 바꿔가며 돈가스를 튀긴다. 제주 흑돼지부터 듀록, 버크셔 등 거의 모든 돼지가 이 집을 거쳐갔다. 최근에는 ‘우리흑돈’과 ‘난축맛돈’ 두 가지 종을 주로 쓴다고 했다. 우리흑돈은 재래 흑돼지에 축진듀록을, 난축난돈은 재래 흑돼지에 랜드레이스를 교배한 개량종이다.

 

이날 맛본 돼지는 난축난돈이었다. 고온에서 튀겨 짙은 갈색으로 변한 튀김옷은 오븐에서 갓 나온 빵처럼 구수한 맛을 냈다. 핑크빛이 살짝 돌도록 익혀진 속살은 과하게 익혀진 구석이 없었다. 살짝 값이 비싼 ‘로스까스 상로스’는 고기 단면에 지방이 골고루 퍼져 있었고 등쪽 지방도 두툼하게 붙어 있었다. 육질은 연하면서도 탱글탱글한 맛이 있었다. 지방에서 나는 고소한 단맛은 노랗게 익은 옥수수처럼 씹을수록 그 맛이 진해졌다.

 

서울 보라매역 근처로 가면 ‘월화고기’라는 곳이 있다. 이 집 역시 돼지고기 품종이 남다르다. ‘동물복지 무항생제 삼겹살’ ‘대통령상 대상 항정살’ ‘국내산 100% 듀록 목살’ 등 짧은 이름이 없었다. 그중 사람들이 제일 많이 찾는 것은 듀록 목살이었다. 듀록은 한국 흑돈의 어미 종에 해당되는 품종이다. 미국이 원산으로, 1800년대에 개량되었다고 알려진다. 오래된 종이라 현대에 개량된 돼지만큼 덩치가 크거나 생산성이 좋지는 않다. 대신 맛이 다르다.

 

불판을 바싹 달군 뒤 짙은 선분홍색의 듀록 목살을 올렸다. 하얀 연기가 날리고 원시적 본능을 자극하는 냄새가 퍼졌다. 익은 고기를 입에 넣고 씹자 근육 속에 녹아 있던 지방이 입안에 쭉 하고 퍼졌다. 빨간 살 사이사이 얇고 하얗게 껴 있던 지방이 맛의 원천이었다. 찹쌀떡처럼 탄력 있는 육질이 촘촘히 이에 박히지만 질겅이는 느낌이 없었다. 불판 옆에 놓고 구운 대파김치, 총각무김치도 곁들였다. 김치의 신맛과 고기 지방에서 올라오는 감칠맛이 재즈 스윙의 리듬처럼 빠르게 몸에 스며들었다.

 

지리를 서대문 홍은동으로 옮기면 주택가 사이에 둥지처럼 자리한 ‘어라우즈’가 있다. 좌석은 14개가 전부. 주방도 여느 가정집 것보다 크지 않다. 메뉴를 보면 영월, 홍성, 아산, 안성, 포항 등 전국이 망라돼 있다. ‘홍성 바다담아 홍선장 자숙멸치 타르타르’ ‘안성 조아라 농장 토종닭 테바사키’처럼 각 지역 생산자들을 발굴해 그 식재료를 접시에 담았다. 그중 하이라이트는 ‘포항 송학 농장 재래돼지 뼈등심 스테이크’였다.

 

뼈가 붙은 큼지막한 돼지고기를 뜨거운 팬에 골고루 굽고 은박지로 감싸 잠시 시간을 둔 뒤 썰어 올렸다. 지방의 크기가 작지 않았지만 “꼭 살코기와 함께 먹어보라”는 주인장의 당부가 있었다. 가을 추수를 앞둔 논밭의 향내가 펼쳐지는 것 같았다. 동네 어귀에서 풍겨오는 밥 짓는 냄새 같기도 했다. 크림이나 버터처럼 유지방에 가까운 농도 짙은 향이 지방에 스며들어 있었다. 미각과 후각의 역치 끝까지 자극하는 맛의 밀도가 위장을 가득 채웠다. 보통 6개월 후에 출하되는 일반 돼지에 비해 재래 돼지는 10개월 이상 길러야 성체가 된다. 경제성은 떨어지지만 금액으로 환산하기 힘든 맛이 그 속에 숨겨 있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인다’는 말이 있다. 그 반대도 통하지 않을까 싶다. 알게 되면 사랑하게 된다. 돼지고기도 마찬가지다. 알면 알수록, 알고 먹을수록 그 사랑은 깊어졌다. 그리고 사랑한다면 더 알아야 한다. 종마다 다른 돼지의 맛을.

 

#광명돈까스: 로스까스 상로스 1만3000원, 히레까스 9000원.

#월화고기: 동물농장 무항생제 삼겹살 1만5000원(160g), 국내산 100% 듀록 목살 1만7000원(160g).

#어라우즈: 포항 송학 농장 재래돼지 뼈등심 스테이크 1만8000원(100g), 홍성 바다담아 홍선장 자숙멸치 타르타르 1만8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