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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릇푸릇한 향과 아삭한 식감… 낙지도 간재미도 부드럽게 감싸주네

산야초 2021. 4. 18. 11:50

[아무튼, 주말] 푸릇푸릇한 향과 아삭한 식감… 낙지도 간재미도 부드럽게 감싸주네

[정동현의 Pick] 미나리

정동현 음식칼럼니스트

입력 2021.04.17 03:00 | 수정 2021.04.17 03:00

 

 

 

서울 중곡동 ‘힘찬갯벌낙지’의 산낙지마른연포(앞)와 문어마늘숙회./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미나리는 지금도 예전에도 쌌다. 어릴 적 시장에서 미나리를 사면 기분이 이상했다. 빨간 대야에 미나리를 가득 쌓아놓은 노인은 미나리를 파는 것인지, 아니면 손에 잡히는 대로 주는 것인지 구별되지 않았다. “그만 주세요!” 어머니가 비명 아닌 비명을 질렀을 때는 이미 검은 비닐봉지가 터질 정도였다. 이유야 간단했다. 물만 충분하면 장소, 상황을 가리지 않고 잡초처럼 자라는지라 값이 쌌던 것이다.

 

고향이 서울인 부모님은 부산에서 살면서도 굳이 동태탕을 즐겨 먹었고 그 탕에는 쑥갓과 미나리가 번갈아 가며 들어갔다. 아버지는 흰밥을 분홍빛 국물에 말아 속을 풀었다. 어머니는 동태살을 발라내 동생과 내 밥 위에 올렸다. 숨이 죽은 미나리를 건지면 아직 남아있는 아삭한 질감과 초여름을 닮은 생기로운 풋내가 밀려왔다.

 

생강, 마늘, 파와 같이 공격적인 향이 많은 한국 채소류에서 미나리는 독특한 맛의 맥락을 지녔다. 미나리는 특유의 향 덕분에 부재료로 자주 쓰이지만 당당한 존재감을 숨기기는 쉽지 않다.

 

미나리로 시작해 미나리로 끝나는 음식 중 하나는 복 지리(맑은탕)다. 서울에서 복 지리를 먹는다면 부산 해운대에서 올라온 ‘금수복국’에 가는 것이 방법이다. 압구정동 큰 건물에 자리한 이곳은 부산의 맛을 그대로 옮겼다. 접시가 보일 듯 얇고 투명하게 뜬 복 사시미(회)에 미나리 줄기를 곁들이는 게 공식이다. 쫄깃한 회를 씹으면 혀에 작고 작은 단맛이 사뿐사뿐 올라탔다. 미나리는 혹시라도 있을 비린 맛을 잡고 아삭한 식감을 메아리처럼 남겼다.

 

맑게 끓인 복 지리는 상에 올라오기 전부터 향긋한 내음으로 신호를 보냈다. 일반 생선이 따라올 수 없는 복 지리의 시원함, 솔향을 닮은 듯도 하고 새벽 나절 공기를 담은 것 같기도 한 맑은 국물이 속을 훑었다. 미나리는 그 위에 옅은 물감을 풀어놓은 것처럼 산뜻한 숨결을 불어넣었다. 국물이 반쯤 남았을 때 으레 부산 사람들이 그러하듯 그릇에 식초를 한 바퀴 돌려 뿌렸다. 에누리 없는 신맛에 잡맛 없이 마지막 국물이 똑 떨어졌다.

 

종로 낙원동 ‘호반’에 가면 또 다른 미나리 음식을 만날 수 있다. 1961년 이북 음식 전문으로 시작한 집으로 큼지막한 대창순대와 하얀 비지찌개를 보면 그 역사가 가늠이 된다. 낙원상가를 지나 종로 세무서 인근에 있는 이 집은 저녁이 되면 머리가 희끗한 오랜 단골이 반, 술 마신 지 몇 년 되지 않은 것 같은 젊은 손님이 반이다.

시대를 넘어 모두를 사로잡는 건 기본기 탄탄한 음식이다. 어른 손바닥 두 개만 한 병어를 툭툭 잘라 넣고 매콤하게 익힌 병어찜, 불에 빨리 볶아 전혀 질긴 기색이 없는 낙지볶음, 부드러운 시래기에 무게감 있는 국물이 어우러진 시래깃국이 웬만한 테이블 위에는 하나씩 올라있다.

 

날이 조금 더워지면 미나리를 송송 썰어 넣은 간재미 무침이 인기 메뉴 상단을 차지한다. 주문이 들어오면 바로 무쳐내 바닥에 고인 물기가 전혀 없다. 공든 탑처럼 접시 위에 가득 쌓아 올린 간재미 무침을 입에 넣으니 새콤한 맛이 군침을 돌게 했다. 아삭하고 매콤한 양파, 여느 생선보다 단맛이 강한 간재미 살에 스며든 양념은 씹을수록 그 맛이 배어들었다. 신맛, 단맛, 매운맛이 혀의 이곳저곳을 때리고 어를 때 미나리 향은 코를 관통하며 음식에 정다운 표정을 입혔다.

 

5호선을 타고 가다 군자역에 내리면 ‘힘찬갯벌낙지’라는 집이 있다. 이름은 평범하지만 반찬으로 내는 총각무김치, 파김치만 봐도 그저 흔한 해산물 포차가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문어마늘숙회’는 문어를 살짝 데쳐낸 후 뜨거운 불에 굽듯 익힌 다진 마늘을 버무려 냈다. 불쇼를 한 중식 요리처럼 불에 그슬린 특유의 맛이 느껴졌다. 단조롭기 쉬운 문어숙회가 다른 장르의 음식이 되어버리는 순간이었다.

 

‘산낙지마른연포’는 메시의 드리블처럼 이 집이 아니면 맛볼 수 없는 메뉴 중 하나다. 낙지를 통째로 데쳐내 접시에 올리고 옆에는 역시 데친 미나리를 소금과 참기름에 간간히 무쳐 냈다. 한국인의 마음을 동하게 만드는 고소한 맛과 향, 자칫 느끼할 수 있는 그 고소함 뒤에 숨은 미나리의 창창하고 푸른 향이 어우러져 판소리 자락처럼 유장하고 흥겨운 맛의 리듬이 생겨났다.

 

주인장은 그 옛날 이탈리아 축구대표팀 수비수 말디니가 대인 마크를 하듯 손님 주문을 받았고 미드필드에게 공을 건네듯 빠르게 음식을 냈다. 저잣거리처럼 사람들이 어깨를 부딪히며 북적이고, 높은 천장도 화려한 조명도 없는 해산물 포차였지만 기개는 높았고 몸동작은 거침이 없었다. 흙탕물에서 자라도 맑은 향을 잃지 않는 미나리를 닮은 음식이었고 사람이었다.

 

#금수복국: 까치복·밀복 각 2만원(기본), 복 사시미 10만원(소). (02)542-5482

#호반: 순대 2만3000원(중), 병어찜 4만5000원(중), 낙지볶음 3만3000원, 간재미 무침 2만5000원. (02)745-6618

#힘찬갯벌낙지: 문어마늘숙회 2만5000원, 산낙지마른연포 4만원. (02)461-31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