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와 싸워 이기고 싶다면 결사항전하라
<그리운 나라, 박정희> 국민 존경받는 독재는 없으니 국민에 맞서야
5.16은 권력 아닌 절망을 빼앗았다…국민들에게 멍석말이 각오하길
5.16은 권력 아닌 절망을 빼앗았다…국민들에게 멍석말이 각오하길
김인만 작가 (2011.05.29 08:37:32)
‘다시 뽑고 싶은 대통령’이라는데...
5월도 다 갔다. 봄이 가고 있다.
볼 것이 많아 봄이라 했건만, 옛 누이가 나물 캐던 산자락을 타고 올라 무명치마 폭에 꽃물을 들이면서 무르녹아 저 앞에서 기다리는 여름과 더운 입맞춤을 하던 그 시절 봄은 꿈인 양 까무룩 사라지고 없는 지금, 볼 것도 없이 사시사철 쏟아내는 신문ㆍ방송ㆍ인터넷의 온갖 잡소식을 질질 끌고 가는 삭막한 5월의 끝자락이 스산하기만 하다.
봄날을 보내는 이 땅, 이 시대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의 감상이 같을 수는 없지만 5.16혁명 50주년이라 하니 5월의 주제는 5.16이요, 그러하니 깜냥없이 소란 떨고 질퍽거리는 정치판에 대중의 눈길이 가게 되고, 학계와 이런저런 전문가들이 왈가왈부하는 소리도 무성한지라, 허구한날 접하는 온오프라인 매체들이 5월을 ‘5.16과 박정희’로 도배한 것이 이상할 까닭은 없다.
그런데 묘한 게 있다.
5.16을 둘러싼 왈가왈부 중에 왈가(曰可)를 강변하는 목소리는 작게 들리고 그나마도 불가피했다는 식으로 소극적 방어자세인 반면, 왈부(曰否) 쪽은 때를 만났다는 듯이 점잖은 비판의 도를 넘어 5.16에 비수(匕首)를 날리며 퍼부어대는 온갖 악담이 마치 TV 볼륨이 최강 상태로 고장나 버린 소리처럼 무지막지하게 귀청을 들쑤셔댔다.
그런데 묘하다는 것은 박정희가 그토록 반대자들에게 무방비로 얻어맞는 판국에 한 민간연구소에서 전현직 대통령들을 놓고 다시 대통령을 뽑는다면 누구를 선택하겠느냐 하는 여론조사를 해보니 박정희라고 하지 않던가. 대통령 박정희에게 악감정을 갖고 있는 반박정희주의자들이 그토록 설쳐대는데도 일반대중은 거기에 휘둘리지 않고 있다.
지금 대한민국 국민이 어떤 사람들인가. 박정희 시대와 비교가 안될 만큼 지적 수준이 높고, 이해타산에 까탈스러우며 삶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 승부욕이 강하고 불평등을 참지 못하며, 욕구불만이 크고 정치불신도 높아 선거 때 후보자들이 길거리 유세를 해도 모이지를 않는다.
이런 국민이 대통령 박정희가 가고 없는 세월 내내 수십번 여론조사를 해도 가장 존경하고, 가장 공적이 훌륭하고, 다시 복제(複製)하고 싶은 대통령이라 하니, 이번에 다시 뽑고 싶은 대통령이라는 여론조사도 새로울 것은 없다.
5.16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민주주의를 억압한 독재자라고, 혈서 쓰고 만주군에 들어간 친일파라고 반박정희주의자들이 온갖 악다구니를 퍼붓는데도 도대체 우리 국민은 왜 박정희에게만 일편단심의 그리움으로 최고 점수를 주는 것일까.
5.16은 절망을 빼앗은 것
날마다 언론매체가 뿌려대는 소식들을 보면 일년 삼백예순닷새 싫든 좋든 박정희 이름이 한번도 안나오는 날이 없다. 대통령 박정희는 그 시대를 살아온 세대로부터 지금의 젊은 세대에 이르기까지 끊임없는 관심과 논란의 중심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지니며 장강(長江)으로 흘러오고 있다.
5월 내내 언론매체가 쏟아낸 것들이 아주 잡스러웠지만, 그렇다, ‘5.16과 박정희’는 그냥 넘어갈 수 없어 또 짚어보고 따져봐야 할 현대사의 큰 테마이다.
반대자들은 박정희 시대의 시발점인 5.16에 원죄(原罪)를 씌우고 있다. 정권을 빼앗았다는 것이요, 합법을 비합법으로 무너뜨렸다는 것이다. 선악의 잣대를 들이대 악(惡)으로 심판하고 있다.
필자는 박정희를 5.16이 아니었으면 벌써 죽었을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는 가슴에 폭풍을 안고 살았다. 전쟁의 폐허 위에 뒹구는 비참한 가난, 굶주림과 부패, 다 망가져 자빠지고 엎어진 허무와 절망을 견딜 수 없었던 박정희는 5.16이 아니면 내연의 폭발로 산산히 부서졌을 이름이다.
5.16은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박정희는 5.16 새벽에 한강을 넘으면서부터 한 시대의 영욕(榮辱)을 통음(痛飮)했다.
5.16을 비판하는 반대자들의 시각은 정치판에 고정되어 있다. 권력을 빼앗았다는 것에 집중돼 있다. 정치 권력보다 중요한 것은 국가와 국민이다. 반대자들의 시야엔 국가와 국민이 없다. 국가와 국민을 사각(死角)에 감추고 있다.
미국이 먹을 것을 보내주지 않으면 수백만이 굶주려야 하는 나라, 손바닥만한 한반도의 남쪽 절반조차 제 힘으로 지키지 못해 6.25때 보았듯이 북쪽이 쳐내려오면 단 며칠만에 낙동강까지 밀려버리는 군사력에다, 나라살림을 외국원조에 5할 이상 의존하니 외국의 간섭도 5할 이상인지라 미국이 감 놔라 대추 놔라 하는 대로 끌려갈 수밖에 없어 국권(國權)이 서글프게도 흐느적거리던 그 시절 대한민국의 처지를 5.16 반대자들은 외면하고 있다.
당시 세계은행 보고서는 필리핀과 버마의 앞날을 장밋빛으로 보았고, 월남과 아르헨티나에서도 보내주는 구호물자를 얻어먹고 얻어 쓴 우리 대한민국은 한마디로 가망없는 나라였다.
지독한 빈곤에는 국권도 인권도 없다. 요는 나라의 주인이라는 국민이다. 찌든 가난에 자신감을 잃고 패배의식에 허덕이던 당시 한국인의 평균수명은 55세. 암흑과 절망 속에 매몰되어 있었다.
반대자들의 주장처럼, 그렇다, 5.16은 정권을 빼앗았다. 권력에만 안주해 온 부패하고 무능한 소수 특권층의 전유물인 정치를 빼앗았다. 그러나 5.16의 핵심은 그게 아니다. 5.16은 절망을 빼앗은 것이다.
또한 그렇다, 5.16은 비합법이다. 합법 하의 절망을 빼앗은 비합법이다. 절망의 합법은 결코 선(善)이 아니다. 합법의 절망을 빼앗아 희망으로 바꾸는 비합법이 역사의 정의다.
역사란 무엇인가. 세월의 궤적이다. 선악이 충돌하고 무수한 삶과 죽음, 땀과 눈물, 성공과 실패를 아우르는 인간사(人間事)의 냉엄한 합집합(合集合)이다.
5.16이 비합법이라 해서 박정희 시대를 부정하는 반박정희주의자들의 주장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이 고려를 무너뜨렸다고 해서 조선시대 6백년을 부정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세종과 이순신 등을 부정하겠는가. 세종 치하에 만든 한글을 부정할 수 있는가. 역사 평가는 그런 게 아니다.
박정희가 국민과 소통하는 맥락
5.16은 역사에 획을 그은 대전환의 분기점이었다. 온갖 불행, 악운, 설움, 가난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기 위한 ‘빅뱅’이었다.
지도자 박정희는 우리도 한번 사람답게 살아보자는 국민의 한맺힌 염원에 불을 질러 절대적인 지지와 통합을 이끌어냈다. 농민과 근로자들, 서독에 갔던 광부와 간호사들, 남태평양의 파도를 누빈 원양어부와, 그 시대를 펄펄 날았던 기업인들, 조국을 일으키자고 사명감으로 똘똘 뭉친 공직자들이 ‘월화수목금금’ 영일 없는 국가 지도자와 함께 억척스런 몸부림으로 땀과 눈물을 쏟았다. 그렇게 5.16군사혁명은 국민혁명으로 업그레이드되어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어냈다.
그래도 3선개헌과 유신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들을 한다. 반박정희주의자들의 악랄한 정치 공세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박정희 시대의 일부 인사들조차 그것만 없었으면 더 추앙받을 것이라고 아쉬워하며 슬그머니 자기 발을 빼고 있다.
필자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박정희는 화투치기 같은 일상의 속성(俗性) 취미가 없는 사람이지만 이를테면 고스톱 판에서 ‘쓰리고’(3선개헌)를 부르고 ‘흔들어서’(유신) ‘대박’을 냈다고. 박정희에게 덤벼들었던 김일성과 그 아들은 어떤가. ‘피박’을 쓰고 결국 쪽박을 차서 저렇게 거지발싸개로 널브러져 있지 않은가.
박정희가 그렇게 대박을 내서 잘살게 해주었다는 즉물적(卽物的)인 부피만으로 국민의 존경을 받는 것일까.
지금의 한국인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제 앞가림에 바빠 엊그제 일도 금방 까먹는 망각증을 알아줘야 하는 한국인들이 좀 먹고 살게 해준 망자(亡者)를 그리워할 겨를이 어디 있는가. 선전해서 되는 일도 아니고 누가 시켜서 되는 일도 아닌데, 박정희 반대자들이 그렇게 욕사발을 퍼부어대는데도 여론조사를 하면 번번히 박정희가 1등으로 나오니까 묘하다는 것이다.
박정희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틀어쥔 절대적 통치자였고 그 시대는 거칠고 사나웠다. 반대자들은 민주주의를 부르짖고 인권탄압을 외치며 끈질기게 저항했다. 그것을 국민이 모르지 않는다.
김대중 시절에 5.16혁명의 발상지인 6관사령부가 있던 지금의 문래공원 자리 박정희 흉상 앞에 소주잔을 올리고 담배도 올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일대를 헤매는 노숙자들이었다. 노무현 시절에 골수 반박정희주의자들이 심야에 종로 탑골공원 삼일문의 박정희 휘호 편액을 떼어냈을 때도 즉각 경찰에 신고한 사람들이 노숙자들이었다.
박정희 시대에 쥐뿔도 덕을 본 게 없고 시나브로 낙오된 인생살이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그들이 왜 그럴까.
‘과거사 정리’라고 박정희 매도에 올인했던 노무현 시절에는 청와대 비서관과 출입 기자들이 택시 타고 청와대 가자고 하면 내릴 때 택시기사들이 “잘 좀 하라고 그러쇼”라고 쏘아붙이는 바람에 “택시 타기가 겁난다”는 이야기가 여기저기 신문 칼럼으로 나왔었다.
당시 부산에서 열린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의를 취재했던 한 외국 기자는 택시기사가 “당신이 지금 달리고 있는 이 고속도로를 40여년 전에 건설한 대통령이 박정희”라며 다른 전직 대통령들을 싸잡아 비판하더라고 했고, 또 작년에 어느 택시기사는 술 취한 승객이 뜬금없이 박정희 일가를 마구 욕하자 “듣기 거북하다”고 말했다가 승객에게 폭행당해 언론에 보도된 적도 있었다.
택시는 달리는 민심(民心)이다. 택시기사의 말은 민심을 가감없이 대변하고 있다. 택시에는 믿어 의심할 것 없는 알짜 민심이 실려 있다.
이렇게 살기 어려운 서민들이 정치와 아무런 상관없이 동떨어져 있으면서 왜 애오라지 박정희에게 마음을 붙이고 있는 것일까.
갈 길이 바쁜 박정희는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지는 반대자들을 걷어차 내동댕이치면서 목적지를 향해 숨가쁘게 달려갔다. 국민을 고속열차에 태우고.
박정희 시대는 단지 경제성장이라는 외형적인 평가로만 치부할 일이 아니다. 수천년 잠들어 있던 민족, 국민의 역량을 화산처럼 폭발시켜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고 실패를 성공으로 바꾸고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었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 당당한 한국인이라는 자부심으로 국민성을 바꾸었다. 그렇게 대한민국을 송두리채 바꾼 역사의 DNA가 국민성의 저변에 오지게 자리잡고 있다.
그가 가고 없는 세월에 그때 그시절을 세세히 알지는 못해도 그가 사심없는 정열로 국민과 함께 땀 흘리고 역사의 제단(祭壇)에 혼신을 바치면서 더 좋은 나라 대한민국의 희망을 명징하게 남겨주었다는 것을 국민은 알고 있는 것이다.
세상이 바뀌고 세월이 흘러도 산줄기, 강줄기가 바뀌지 않는 것처럼 바로 그것이 그가 국민과 소통하고 있는 맥락일 것이다.
박정희 비판자들이 비겁한 이유
그러나 한편, 박정희 시대에 민주주의와 인권의 점수는 줄 수 없다고 말들을 한다. 민주주의 한복한 가치가 인권이다. 국민의 권리다. 소수 특정집단의 권리가 아닌 국민의 삶을 지켜주는 권리다.
박정희에게 저항한 반대자들 중에 김대중의 경우를 보자. 박정희가 인권을 탄압했다고 김대중은 어지간히도 입심 사납게 떠들었는데 그의 자서전을 샅샅이 뒤져봐도 그가 국민의 인권탄압에 눈물짓고 분노했다는 대목은 한줄도 없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때 그시절 온국민은 잘살아 보자고 밤낮없이 땀을 쏟았고, 사람답게 살 수 있다는 희망으로 부풀어 있었다.
그러면 김대중이 말하는 인권의 정체는 무엇인가. 정치적 반대자의 권리, 좁혀 말하면 자신의 권력욕에 대한 탄압을 인권탄압으로 포장하고 있는 것이다. 인권의 주체는 국민이지 특정 세력이 도용(盜用)해 남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건 인권 모독이다.
박정희가 정치적 반대자들을 탄압한 것은 사실이다. 유신체제를 출범시키고 정치적 충돌이 심하자 미국이 음으로 양으로 끼어들어 박정희 정권을 괴롭혔다. 박정희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이 민주주의 아버지라고 존경하는 링컨은 어땠는가. 링컨은 남북전쟁 당시에 국론분열을 일으키는 불순분자 1300명을 영장도 없이 체포하고 재판도 없이 투옥시켰다. 나는 냉전하의 이 나라 안보를 책임진 사람이다. 나를 비판하려거든 당신들의 링컨을 먼저 비판하라.”
그러면서 “내 나라 우리 국민의 인권은 내가 더 존중한다”고 일갈했다.
박정희는 정치적 저항에 대한 탄압을 필요악으로 간주해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고 했다. 김영삼 이후 오늘까지 반대세력은 그를 독재자라고 매도하는데 국민은 일편단심 그를 옹호하고 있다.
민주주의의 주인은 소수의 정치 집단이 아니라 국민이다. 국민의 존경과 지지 그 이상의 가치는 없다. 국민의 존경을 받는 독재는 역사에 없다.
박정희를 반대하는 반박정희주의자들을 보면 대부분이 개발연대에 전혀 기여한 바가 없는 아웃사이더로서 경제성장의 고속열차에 무임승차해 덕을 봤거나, 또는 뒤늦게 이념 서적을 뒤적여 학습으로 이론을 무장한 부류들이다. 더러는 김영삼 이후 지금까지 긴 세월 ‘반박정희 세일즈’로 나름의 입신양명(立身揚名)을 하기도 했고, 또 더러는 음습한 골방에 처박혀 박정희 공격을 계속하고 있다.
박정희 시대의 성과에 대한 이들의 한결같은 주장은 한마디로 박정희가 아니라도 얼마든지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국민이 이룬 것이지 모두 박정희가 했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은 정주영이 아니라도 현대가 생기고 이병철이 아니라도 삼성이 생겼을 것이라는 말이 된다. 또 가령 산림녹화, 헐벗은 산을 푸른 숲으로 덮은 것도 국민이 한 것이지 박정희가 했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라는 주장인데, 그렇다면 북한 사람들은 게을러 터져서 나무를 심지 않고 저렇게 민둥산을 헤매며 땔감을 찾는 것일까.
이들은 이처럼 궁색한 주장을 하면서 국민 여론을 외면하고 있다. 국민은 오로지 박정희만이 최고라고 하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 말을 못하고 있다.
박정희 독재를 공격하면서 민주주의의 주인인 국민을 외면하는 것은 비겁하기 짝이 없다. 박정희와 싸우려면 정면으로 국민과 맞서 싸워야 할 일이다.
박정희와 싸우려면 시뮬레이션 말고 결사항전을 하라
박정희가 가고 없는 허공에다 구두탄(口頭彈)을 쏘는 시뮬레이션을 하지 말고 실전(實戰)을 벌이는 것이 정정당당하지 않겠는가. 정면승부할 대상은 박정희가 아니라, 박정희에게 절대적 지지와 존경을 보내는 국민이니 국민과 싸울 일이다. 어중간한 반대자들은 나서지 말고, 박정희 소리만 들어도 거친 숨을 몰아쉬고 도끼눈을 부릅뜨는 골수 반박정희주의자들이 홍보팀을 만들어 국민과 대결하는 것이다.
“여보쇼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아직도 박정희란 말입니까. 대한민국이 박정희를 단죄하지 않고는 선진복지국가로 갈 수 없습니다. 박정희 망령 속을 헤매지 말고 제발 정신 차리시오. 박정희 광신도들에게 놀아나지 맙시다.”
입심 좋고 화끈한 반박정희주의자들은 얼마든지 싸울 수가 있다.
그래도 여론조사를 해보면 무조건 박정희가 1등이니 환장할 노릇이긴 할 터이다. 아무리 ‘반박정희 홍보’를 해봐도 미망(迷妄)에 빠져 있는 국민을 깨우칠 가망이 없다면 다른 방법을 쓸 수도 있다. 유리한 외국 여론을 끌여들여 국내 여론을 바꾸는 것이다.
밖으로 나가라.
반박정희를 향한 대장정(大長征)이니 이론 무장이 잘 된 반박정희 홍보팀이 가까운 중국부터 가서 이렇게 말하라.
“얼마 전에 후진타오와 원자바오가 중국에 온 김정일을 만났다는데 아마 6자회담 얘기가 나왔을 것이다. 6자회담과 관련해서는 김대중의 사상을 참고하기 바란다. 그는 박정희 독재정권이 자기를 잡아넣었을 때 감옥에서 김일성과의 정상회담을 상상했다고 말했다(김대중자서전 2권 304쪽). 그리고 후진타오는 신농촌운동을 하면서 한국에 관리들을 보내 새마을운동을 배워오게 하는데 쓸데없는 짓이다. 새마을운동은 초가지붕 바꾼 것 외에는 변한 것이 없다. 잘살게 되었다는 것은 속임수다(김대중자서전 1권 384쪽). 원자바오도 박정희의 경제개발 정책은 중국 경제개발의 훌륭한 모델이라고 하는데, 박정희 모델은 독재를 경제로 위장한 술책이니 착각하지 말라. 박정희 모델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반면교사(反面敎師)의 모델일 뿐이다.”
박정희 모델과 관련해서는 베트남과 동남아 각국, 몽골,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아프리카 구석까지 가봐야 할 곳이 널려 있으니 가까운 베트남이나 들러야 할 것이다.
가서 이렇게 말하라.
“김대중은 월남파병을 반대했다. 여기 와서 호치민 묘에 참배도 하고 한국군 참전을 사과했다. 박정희는 독재, 김대중은 민주주의 상징이다.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것이 곧 국민을 위한 경제발전의 길이니 박정희를 버리고 김대중을 배워라.”
그리고 거기서 잠깐 싱가포르 쪽을 향해서 한마디를 날려보낼 필요가 있다.
“리콴유가 박정희 같은 지도자가 없었으면 오늘의 한국은 없다고 말하는데, 유신독재를 그런 식으로 얼버무려 감싸는 리콴유를 우리는 박정희 부류의 인물로 규정하고 있는 줄 알라.”
반박정희 홍보팀이 박정희 망령이 떠도는 곳을 일일이 찾아다니려면 혼절할 지경인지라 중국, 베트남뿐 아니라 여러 나라에서 박정희 책자를 읽어 왔으므로 대신 다른 책자를 뿌리는 것이 현명한 대안이 될 것이다.
다른 책자를 꼭 전해주어야 할 대상이 러시아의 푸틴이다. 러시아는 안가볼 수 없으니, 가서 이렇게 말하라.
“푸틴은 오래 전부터 박정희 책을 모조리 구해서 읽은 1등 애독자(愛讀者)라고 들었다. 그것들은 모두 박정희를 미화한 거짓 선전물들이다. 여기 좋은 책들을 가져왔다. 최상천의 〈알몸 박정희〉, 한상범의 〈박정희와 친일파의 유령들〉, 박정희의 치부를 미주알고주알 들추고 있는 한홍구의〈현대사 특강 시리즈〉, 그리고 재미있는 만화도 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만화 박정희〉 등등 진짜 볼 만한 책들이다.”
러시아는 그 정도로 해두고 다음은 미국행. 가서 이렇게 말하라.
“오바마가 걸핏하면 한국의 교육과 초고속통신망 등이 부럽다며 미국 시골에 LG공장 하나 세우는데 거기까지 가더라. 외국에서 한국의 현대, 삼성, LG, SK라면 박정희를 오버랩시키고 있다. 한국 찬양은 좋지만 그것을 박정희 광신도들이 독재 찬양으로 왜곡하는 게 문제다. 한국의 초고속통신망 인프라도 정보산업의 커뮤니케이션인 문자의 입력과 전달 속도에 따라 초고속으로 구축됐는데, 그것이 한글과 한자를 섞어 세로쓰기하던 것을 한글전용에 가로쓰기로 바꾼 박정희의 한글전용 결단 덕분이라고 광신도들이 자랑하고 있다. 만일 오바마가 한국의 건강보험이 부럽다고 말하면, 그것 봐라, 돈 때문에 병원에 못가고 죽어가야 한다는 미국의 건강보험이라는데 세계가 부러워하는 한국의 의료보장제도를 만드신 박정희 각하가 얼마나 훌륭하신 분이냐 하면서 광신도들이 어깨춤을 추고 난리법석을 떨 것이다. 한국의 발전이 죄다 박정희 덕분도 아니거니와, 몇가지 치적을 뻥튀기한 한 것으로 박정희가 인권을 탄압하고 민주주의를 압살한 죄악을 덮을 수는 없다. 거듭 말하거니와 한국 찬양이 박정희 찬양으로 왜곡되는 게 문제다.”
다음, 박정희를 “신화를 만든 한국경제의 건축가”라고 추켜세웠던 뉴욕타임스 기사는 옛날 것이니 접어두고라도, 김대중이 오랜 친구라고 말하는 키신저(김대중자서전 2권 451쪽)를 향해서는 한마디를 남길 필요가 있을 것이다.
“키신저는 선(先)산업화, 후민주화를 선택한 박정희가 옳았다고 말했다. 박정희 시대를 잘 아는 키신저가 노벨평화상을 탄 김대중의 동지로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우리는 키신저에게 배신감을 갖고 있음을 밝혀둔다.”
미국을 떠나기 전에 유엔본부 쪽을 향해서도 말을 던져 봄직하다.
“아프리카에 가서 한국의 새마을운동을 권고한 반기문 유엔사무총장도 따져봐야 할 인물이다. 그는 70년대 초 외무부에 들어와 유신독재가 길러낸 관료다. 박정희 DNA를 갖고 있다. 그래서 자조ㆍ자립ㆍ협동 새마을 정신을 배우라고 선전하는 것이다. 유엔사무총장은 한국에서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김대중 DNA를 갖고 있는 인물로 뽑아야 했다.”
마지막으로 유럽행.
유럽에서는 “60년대 빈국서 한강의 기적 이뤘다”는 독일과, “한국은 아시아의 성공모델”이라는 프랑스의 교과서들이 박정희 시대를 찬양하고 있음을 따져야 할 것이다.
“당신네 나라의 교과서는 오류(誤謬)로 도배되어 있다. 한강의 기적은 만들어진 신화에 불과하다. 군사독재, 개발독재를 합리화한 거짓 선전에 놀아나 청소년들에게 거짓 역사를 가르쳐서야 되겠는가.”
이렇게 주장하면 그쪽에서는 당연히 한강의 기적을 매도하는 반박정희 홍보팀을 의아스럽게 바라볼 것이다.
아래와 같은 문답(問答)을 가상해 봄직하다.
“한강의 기적을 그렇게 비판하는 이유가 뭔가?”
“한국의 발전이 박정희 독재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말이다. 따라서 박정희를 연상시키는 한강의 기
적은 한강의 사기극이다.”
“당신들 분명히 한국인인가?”
“그렇다.”
“한국인들은 박정희를 절대적으로 지지하던데?”
이쯤해서 대답이 난감해지면,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이렇게 소리쳐 보라.
“한국인은 죄다 병들었다. 다들 미쳤다.”
이것이 알려지면 사태는 다급해진다. 사방에서 한국 교민들이 몽둥이 들고 쫓아올 테니 얼른 보따리 싸서 귀국 배행기를 타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의 언행이 외신보도로 국내에 전해졌을 때 인천공항에서 무사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 감당은 그네들 몫이다.
천하를 향해 포효(咆哮)하는 기백으로 박정희와 싸우려면 무엇이 두렵겠는가. 정말로 박정희와 싸우려거든 지하의 박정희에게 돌을 던질 게 아니라 국민에게 돌을 던져라. 박정희를 찬양하는 바다 건너 백인종ㆍ황인종ㆍ흑인종들에게도 열심히 돌팔매를 날려라.
그네들 소신이 정의롭고 거기에 목숨처럼 소중한 명예와 인격을 걸고 있다면 맞아죽을 각오로 싸우지 못할 이유가 없다.
허구한날 음습한 구석에 죽치고 앉아 볼멘소리, 잡소리를 군시렁거려 봐야 국민은 쇠귀에 경 읽기이니 도리가 없지 않은가. 국민에게 돌을 던졌다가 멍석말이 몰매를 맞아죽은 열사(烈士)로 이름을 남길 용기와 배짱을 가져야 그게 진짜 박정희와 싸우는 것이다.
글/김인만 작가
5월도 다 갔다. 봄이 가고 있다.
볼 것이 많아 봄이라 했건만, 옛 누이가 나물 캐던 산자락을 타고 올라 무명치마 폭에 꽃물을 들이면서 무르녹아 저 앞에서 기다리는 여름과 더운 입맞춤을 하던 그 시절 봄은 꿈인 양 까무룩 사라지고 없는 지금, 볼 것도 없이 사시사철 쏟아내는 신문ㆍ방송ㆍ인터넷의 온갖 잡소식을 질질 끌고 가는 삭막한 5월의 끝자락이 스산하기만 하다.
봄날을 보내는 이 땅, 이 시대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의 감상이 같을 수는 없지만 5.16혁명 50주년이라 하니 5월의 주제는 5.16이요, 그러하니 깜냥없이 소란 떨고 질퍽거리는 정치판에 대중의 눈길이 가게 되고, 학계와 이런저런 전문가들이 왈가왈부하는 소리도 무성한지라, 허구한날 접하는 온오프라인 매체들이 5월을 ‘5.16과 박정희’로 도배한 것이 이상할 까닭은 없다.
◇ 5.16거사 후 서울시청 앞에 모습을 드러낸 박정희 소장(1961). ⓒ 자료사진 |
그런데 묘한 게 있다.
5.16을 둘러싼 왈가왈부 중에 왈가(曰可)를 강변하는 목소리는 작게 들리고 그나마도 불가피했다는 식으로 소극적 방어자세인 반면, 왈부(曰否) 쪽은 때를 만났다는 듯이 점잖은 비판의 도를 넘어 5.16에 비수(匕首)를 날리며 퍼부어대는 온갖 악담이 마치 TV 볼륨이 최강 상태로 고장나 버린 소리처럼 무지막지하게 귀청을 들쑤셔댔다.
그런데 묘하다는 것은 박정희가 그토록 반대자들에게 무방비로 얻어맞는 판국에 한 민간연구소에서 전현직 대통령들을 놓고 다시 대통령을 뽑는다면 누구를 선택하겠느냐 하는 여론조사를 해보니 박정희라고 하지 않던가. 대통령 박정희에게 악감정을 갖고 있는 반박정희주의자들이 그토록 설쳐대는데도 일반대중은 거기에 휘둘리지 않고 있다.
지금 대한민국 국민이 어떤 사람들인가. 박정희 시대와 비교가 안될 만큼 지적 수준이 높고, 이해타산에 까탈스러우며 삶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 승부욕이 강하고 불평등을 참지 못하며, 욕구불만이 크고 정치불신도 높아 선거 때 후보자들이 길거리 유세를 해도 모이지를 않는다.
이런 국민이 대통령 박정희가 가고 없는 세월 내내 수십번 여론조사를 해도 가장 존경하고, 가장 공적이 훌륭하고, 다시 복제(複製)하고 싶은 대통령이라 하니, 이번에 다시 뽑고 싶은 대통령이라는 여론조사도 새로울 것은 없다.
5.16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민주주의를 억압한 독재자라고, 혈서 쓰고 만주군에 들어간 친일파라고 반박정희주의자들이 온갖 악다구니를 퍼붓는데도 도대체 우리 국민은 왜 박정희에게만 일편단심의 그리움으로 최고 점수를 주는 것일까.
5.16은 절망을 빼앗은 것
날마다 언론매체가 뿌려대는 소식들을 보면 일년 삼백예순닷새 싫든 좋든 박정희 이름이 한번도 안나오는 날이 없다. 대통령 박정희는 그 시대를 살아온 세대로부터 지금의 젊은 세대에 이르기까지 끊임없는 관심과 논란의 중심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지니며 장강(長江)으로 흘러오고 있다.
5월 내내 언론매체가 쏟아낸 것들이 아주 잡스러웠지만, 그렇다, ‘5.16과 박정희’는 그냥 넘어갈 수 없어 또 짚어보고 따져봐야 할 현대사의 큰 테마이다.
반대자들은 박정희 시대의 시발점인 5.16에 원죄(原罪)를 씌우고 있다. 정권을 빼앗았다는 것이요, 합법을 비합법으로 무너뜨렸다는 것이다. 선악의 잣대를 들이대 악(惡)으로 심판하고 있다.
필자는 박정희를 5.16이 아니었으면 벌써 죽었을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는 가슴에 폭풍을 안고 살았다. 전쟁의 폐허 위에 뒹구는 비참한 가난, 굶주림과 부패, 다 망가져 자빠지고 엎어진 허무와 절망을 견딜 수 없었던 박정희는 5.16이 아니면 내연의 폭발로 산산히 부서졌을 이름이다.
5.16은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박정희는 5.16 새벽에 한강을 넘으면서부터 한 시대의 영욕(榮辱)을 통음(痛飮)했다.
5.16을 비판하는 반대자들의 시각은 정치판에 고정되어 있다. 권력을 빼앗았다는 것에 집중돼 있다. 정치 권력보다 중요한 것은 국가와 국민이다. 반대자들의 시야엔 국가와 국민이 없다. 국가와 국민을 사각(死角)에 감추고 있다.
미국이 먹을 것을 보내주지 않으면 수백만이 굶주려야 하는 나라, 손바닥만한 한반도의 남쪽 절반조차 제 힘으로 지키지 못해 6.25때 보았듯이 북쪽이 쳐내려오면 단 며칠만에 낙동강까지 밀려버리는 군사력에다, 나라살림을 외국원조에 5할 이상 의존하니 외국의 간섭도 5할 이상인지라 미국이 감 놔라 대추 놔라 하는 대로 끌려갈 수밖에 없어 국권(國權)이 서글프게도 흐느적거리던 그 시절 대한민국의 처지를 5.16 반대자들은 외면하고 있다.
당시 세계은행 보고서는 필리핀과 버마의 앞날을 장밋빛으로 보았고, 월남과 아르헨티나에서도 보내주는 구호물자를 얻어먹고 얻어 쓴 우리 대한민국은 한마디로 가망없는 나라였다.
지독한 빈곤에는 국권도 인권도 없다. 요는 나라의 주인이라는 국민이다. 찌든 가난에 자신감을 잃고 패배의식에 허덕이던 당시 한국인의 평균수명은 55세. 암흑과 절망 속에 매몰되어 있었다.
◇ 5.16 직후 영세민에게 구호양곡을 배급하는 모습(1961). ⓒ 정부기록사진집 |
반대자들의 주장처럼, 그렇다, 5.16은 정권을 빼앗았다. 권력에만 안주해 온 부패하고 무능한 소수 특권층의 전유물인 정치를 빼앗았다. 그러나 5.16의 핵심은 그게 아니다. 5.16은 절망을 빼앗은 것이다.
또한 그렇다, 5.16은 비합법이다. 합법 하의 절망을 빼앗은 비합법이다. 절망의 합법은 결코 선(善)이 아니다. 합법의 절망을 빼앗아 희망으로 바꾸는 비합법이 역사의 정의다.
역사란 무엇인가. 세월의 궤적이다. 선악이 충돌하고 무수한 삶과 죽음, 땀과 눈물, 성공과 실패를 아우르는 인간사(人間事)의 냉엄한 합집합(合集合)이다.
5.16이 비합법이라 해서 박정희 시대를 부정하는 반박정희주의자들의 주장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이 고려를 무너뜨렸다고 해서 조선시대 6백년을 부정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세종과 이순신 등을 부정하겠는가. 세종 치하에 만든 한글을 부정할 수 있는가. 역사 평가는 그런 게 아니다.
박정희가 국민과 소통하는 맥락
5.16은 역사에 획을 그은 대전환의 분기점이었다. 온갖 불행, 악운, 설움, 가난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기 위한 ‘빅뱅’이었다.
지도자 박정희는 우리도 한번 사람답게 살아보자는 국민의 한맺힌 염원에 불을 질러 절대적인 지지와 통합을 이끌어냈다. 농민과 근로자들, 서독에 갔던 광부와 간호사들, 남태평양의 파도를 누빈 원양어부와, 그 시대를 펄펄 날았던 기업인들, 조국을 일으키자고 사명감으로 똘똘 뭉친 공직자들이 ‘월화수목금금’ 영일 없는 국가 지도자와 함께 억척스런 몸부림으로 땀과 눈물을 쏟았다. 그렇게 5.16군사혁명은 국민혁명으로 업그레이드되어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어냈다.
그래도 3선개헌과 유신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들을 한다. 반박정희주의자들의 악랄한 정치 공세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박정희 시대의 일부 인사들조차 그것만 없었으면 더 추앙받을 것이라고 아쉬워하며 슬그머니 자기 발을 빼고 있다.
필자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박정희는 화투치기 같은 일상의 속성(俗性) 취미가 없는 사람이지만 이를테면 고스톱 판에서 ‘쓰리고’(3선개헌)를 부르고 ‘흔들어서’(유신) ‘대박’을 냈다고. 박정희에게 덤벼들었던 김일성과 그 아들은 어떤가. ‘피박’을 쓰고 결국 쪽박을 차서 저렇게 거지발싸개로 널브러져 있지 않은가.
박정희가 그렇게 대박을 내서 잘살게 해주었다는 즉물적(卽物的)인 부피만으로 국민의 존경을 받는 것일까.
지금의 한국인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제 앞가림에 바빠 엊그제 일도 금방 까먹는 망각증을 알아줘야 하는 한국인들이 좀 먹고 살게 해준 망자(亡者)를 그리워할 겨를이 어디 있는가. 선전해서 되는 일도 아니고 누가 시켜서 되는 일도 아닌데, 박정희 반대자들이 그렇게 욕사발을 퍼부어대는데도 여론조사를 하면 번번히 박정희가 1등으로 나오니까 묘하다는 것이다.
박정희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틀어쥔 절대적 통치자였고 그 시대는 거칠고 사나웠다. 반대자들은 민주주의를 부르짖고 인권탄압을 외치며 끈질기게 저항했다. 그것을 국민이 모르지 않는다.
◇ ▲국민과 소통하는 대통령. 농촌 마을을 찾은 박 대통령이나 주민들의 표정이 순박하기 이를데없다. ⓒ 자료사진 |
김대중 시절에 5.16혁명의 발상지인 6관사령부가 있던 지금의 문래공원 자리 박정희 흉상 앞에 소주잔을 올리고 담배도 올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일대를 헤매는 노숙자들이었다. 노무현 시절에 골수 반박정희주의자들이 심야에 종로 탑골공원 삼일문의 박정희 휘호 편액을 떼어냈을 때도 즉각 경찰에 신고한 사람들이 노숙자들이었다.
박정희 시대에 쥐뿔도 덕을 본 게 없고 시나브로 낙오된 인생살이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그들이 왜 그럴까.
‘과거사 정리’라고 박정희 매도에 올인했던 노무현 시절에는 청와대 비서관과 출입 기자들이 택시 타고 청와대 가자고 하면 내릴 때 택시기사들이 “잘 좀 하라고 그러쇼”라고 쏘아붙이는 바람에 “택시 타기가 겁난다”는 이야기가 여기저기 신문 칼럼으로 나왔었다.
당시 부산에서 열린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의를 취재했던 한 외국 기자는 택시기사가 “당신이 지금 달리고 있는 이 고속도로를 40여년 전에 건설한 대통령이 박정희”라며 다른 전직 대통령들을 싸잡아 비판하더라고 했고, 또 작년에 어느 택시기사는 술 취한 승객이 뜬금없이 박정희 일가를 마구 욕하자 “듣기 거북하다”고 말했다가 승객에게 폭행당해 언론에 보도된 적도 있었다.
택시는 달리는 민심(民心)이다. 택시기사의 말은 민심을 가감없이 대변하고 있다. 택시에는 믿어 의심할 것 없는 알짜 민심이 실려 있다.
이렇게 살기 어려운 서민들이 정치와 아무런 상관없이 동떨어져 있으면서 왜 애오라지 박정희에게 마음을 붙이고 있는 것일까.
갈 길이 바쁜 박정희는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지는 반대자들을 걷어차 내동댕이치면서 목적지를 향해 숨가쁘게 달려갔다. 국민을 고속열차에 태우고.
박정희 시대는 단지 경제성장이라는 외형적인 평가로만 치부할 일이 아니다. 수천년 잠들어 있던 민족, 국민의 역량을 화산처럼 폭발시켜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고 실패를 성공으로 바꾸고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었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 당당한 한국인이라는 자부심으로 국민성을 바꾸었다. 그렇게 대한민국을 송두리채 바꾼 역사의 DNA가 국민성의 저변에 오지게 자리잡고 있다.
그가 가고 없는 세월에 그때 그시절을 세세히 알지는 못해도 그가 사심없는 정열로 국민과 함께 땀 흘리고 역사의 제단(祭壇)에 혼신을 바치면서 더 좋은 나라 대한민국의 희망을 명징하게 남겨주었다는 것을 국민은 알고 있는 것이다.
세상이 바뀌고 세월이 흘러도 산줄기, 강줄기가 바뀌지 않는 것처럼 바로 그것이 그가 국민과 소통하고 있는 맥락일 것이다.
박정희 비판자들이 비겁한 이유
그러나 한편, 박정희 시대에 민주주의와 인권의 점수는 줄 수 없다고 말들을 한다. 민주주의 한복한 가치가 인권이다. 국민의 권리다. 소수 특정집단의 권리가 아닌 국민의 삶을 지켜주는 권리다.
박정희에게 저항한 반대자들 중에 김대중의 경우를 보자. 박정희가 인권을 탄압했다고 김대중은 어지간히도 입심 사납게 떠들었는데 그의 자서전을 샅샅이 뒤져봐도 그가 국민의 인권탄압에 눈물짓고 분노했다는 대목은 한줄도 없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때 그시절 온국민은 잘살아 보자고 밤낮없이 땀을 쏟았고, 사람답게 살 수 있다는 희망으로 부풀어 있었다.
그러면 김대중이 말하는 인권의 정체는 무엇인가. 정치적 반대자의 권리, 좁혀 말하면 자신의 권력욕에 대한 탄압을 인권탄압으로 포장하고 있는 것이다. 인권의 주체는 국민이지 특정 세력이 도용(盜用)해 남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건 인권 모독이다.
박정희가 정치적 반대자들을 탄압한 것은 사실이다. 유신체제를 출범시키고 정치적 충돌이 심하자 미국이 음으로 양으로 끼어들어 박정희 정권을 괴롭혔다. 박정희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이 민주주의 아버지라고 존경하는 링컨은 어땠는가. 링컨은 남북전쟁 당시에 국론분열을 일으키는 불순분자 1300명을 영장도 없이 체포하고 재판도 없이 투옥시켰다. 나는 냉전하의 이 나라 안보를 책임진 사람이다. 나를 비판하려거든 당신들의 링컨을 먼저 비판하라.”
그러면서 “내 나라 우리 국민의 인권은 내가 더 존중한다”고 일갈했다.
박정희는 정치적 저항에 대한 탄압을 필요악으로 간주해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고 했다. 김영삼 이후 오늘까지 반대세력은 그를 독재자라고 매도하는데 국민은 일편단심 그를 옹호하고 있다.
민주주의의 주인은 소수의 정치 집단이 아니라 국민이다. 국민의 존경과 지지 그 이상의 가치는 없다. 국민의 존경을 받는 독재는 역사에 없다.
박정희를 반대하는 반박정희주의자들을 보면 대부분이 개발연대에 전혀 기여한 바가 없는 아웃사이더로서 경제성장의 고속열차에 무임승차해 덕을 봤거나, 또는 뒤늦게 이념 서적을 뒤적여 학습으로 이론을 무장한 부류들이다. 더러는 김영삼 이후 지금까지 긴 세월 ‘반박정희 세일즈’로 나름의 입신양명(立身揚名)을 하기도 했고, 또 더러는 음습한 골방에 처박혀 박정희 공격을 계속하고 있다.
박정희 시대의 성과에 대한 이들의 한결같은 주장은 한마디로 박정희가 아니라도 얼마든지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국민이 이룬 것이지 모두 박정희가 했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은 정주영이 아니라도 현대가 생기고 이병철이 아니라도 삼성이 생겼을 것이라는 말이 된다. 또 가령 산림녹화, 헐벗은 산을 푸른 숲으로 덮은 것도 국민이 한 것이지 박정희가 했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라는 주장인데, 그렇다면 북한 사람들은 게을러 터져서 나무를 심지 않고 저렇게 민둥산을 헤매며 땔감을 찾는 것일까.
이들은 이처럼 궁색한 주장을 하면서 국민 여론을 외면하고 있다. 국민은 오로지 박정희만이 최고라고 하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 말을 못하고 있다.
박정희 독재를 공격하면서 민주주의의 주인인 국민을 외면하는 것은 비겁하기 짝이 없다. 박정희와 싸우려면 정면으로 국민과 맞서 싸워야 할 일이다.
박정희와 싸우려면 시뮬레이션 말고 결사항전을 하라
박정희가 가고 없는 허공에다 구두탄(口頭彈)을 쏘는 시뮬레이션을 하지 말고 실전(實戰)을 벌이는 것이 정정당당하지 않겠는가. 정면승부할 대상은 박정희가 아니라, 박정희에게 절대적 지지와 존경을 보내는 국민이니 국민과 싸울 일이다. 어중간한 반대자들은 나서지 말고, 박정희 소리만 들어도 거친 숨을 몰아쉬고 도끼눈을 부릅뜨는 골수 반박정희주의자들이 홍보팀을 만들어 국민과 대결하는 것이다.
“여보쇼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아직도 박정희란 말입니까. 대한민국이 박정희를 단죄하지 않고는 선진복지국가로 갈 수 없습니다. 박정희 망령 속을 헤매지 말고 제발 정신 차리시오. 박정희 광신도들에게 놀아나지 맙시다.”
입심 좋고 화끈한 반박정희주의자들은 얼마든지 싸울 수가 있다.
그래도 여론조사를 해보면 무조건 박정희가 1등이니 환장할 노릇이긴 할 터이다. 아무리 ‘반박정희 홍보’를 해봐도 미망(迷妄)에 빠져 있는 국민을 깨우칠 가망이 없다면 다른 방법을 쓸 수도 있다. 유리한 외국 여론을 끌여들여 국내 여론을 바꾸는 것이다.
밖으로 나가라.
반박정희를 향한 대장정(大長征)이니 이론 무장이 잘 된 반박정희 홍보팀이 가까운 중국부터 가서 이렇게 말하라.
“얼마 전에 후진타오와 원자바오가 중국에 온 김정일을 만났다는데 아마 6자회담 얘기가 나왔을 것이다. 6자회담과 관련해서는 김대중의 사상을 참고하기 바란다. 그는 박정희 독재정권이 자기를 잡아넣었을 때 감옥에서 김일성과의 정상회담을 상상했다고 말했다(김대중자서전 2권 304쪽). 그리고 후진타오는 신농촌운동을 하면서 한국에 관리들을 보내 새마을운동을 배워오게 하는데 쓸데없는 짓이다. 새마을운동은 초가지붕 바꾼 것 외에는 변한 것이 없다. 잘살게 되었다는 것은 속임수다(김대중자서전 1권 384쪽). 원자바오도 박정희의 경제개발 정책은 중국 경제개발의 훌륭한 모델이라고 하는데, 박정희 모델은 독재를 경제로 위장한 술책이니 착각하지 말라. 박정희 모델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반면교사(反面敎師)의 모델일 뿐이다.”
◇ 새마을운동 배우러 온 탄자니아 느야드지아 팀장(2010). ⓒ 위클리공감 |
박정희 모델과 관련해서는 베트남과 동남아 각국, 몽골,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아프리카 구석까지 가봐야 할 곳이 널려 있으니 가까운 베트남이나 들러야 할 것이다.
가서 이렇게 말하라.
“김대중은 월남파병을 반대했다. 여기 와서 호치민 묘에 참배도 하고 한국군 참전을 사과했다. 박정희는 독재, 김대중은 민주주의 상징이다.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것이 곧 국민을 위한 경제발전의 길이니 박정희를 버리고 김대중을 배워라.”
그리고 거기서 잠깐 싱가포르 쪽을 향해서 한마디를 날려보낼 필요가 있다.
“리콴유가 박정희 같은 지도자가 없었으면 오늘의 한국은 없다고 말하는데, 유신독재를 그런 식으로 얼버무려 감싸는 리콴유를 우리는 박정희 부류의 인물로 규정하고 있는 줄 알라.”
반박정희 홍보팀이 박정희 망령이 떠도는 곳을 일일이 찾아다니려면 혼절할 지경인지라 중국, 베트남뿐 아니라 여러 나라에서 박정희 책자를 읽어 왔으므로 대신 다른 책자를 뿌리는 것이 현명한 대안이 될 것이다.
다른 책자를 꼭 전해주어야 할 대상이 러시아의 푸틴이다. 러시아는 안가볼 수 없으니, 가서 이렇게 말하라.
“푸틴은 오래 전부터 박정희 책을 모조리 구해서 읽은 1등 애독자(愛讀者)라고 들었다. 그것들은 모두 박정희를 미화한 거짓 선전물들이다. 여기 좋은 책들을 가져왔다. 최상천의 〈알몸 박정희〉, 한상범의 〈박정희와 친일파의 유령들〉, 박정희의 치부를 미주알고주알 들추고 있는 한홍구의〈현대사 특강 시리즈〉, 그리고 재미있는 만화도 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만화 박정희〉 등등 진짜 볼 만한 책들이다.”
◇ 박정희 대통령 저서 〈국가와 혁명과 나〉의 영문판(1970). ⓒ 자료사진 |
러시아는 그 정도로 해두고 다음은 미국행. 가서 이렇게 말하라.
“오바마가 걸핏하면 한국의 교육과 초고속통신망 등이 부럽다며 미국 시골에 LG공장 하나 세우는데 거기까지 가더라. 외국에서 한국의 현대, 삼성, LG, SK라면 박정희를 오버랩시키고 있다. 한국 찬양은 좋지만 그것을 박정희 광신도들이 독재 찬양으로 왜곡하는 게 문제다. 한국의 초고속통신망 인프라도 정보산업의 커뮤니케이션인 문자의 입력과 전달 속도에 따라 초고속으로 구축됐는데, 그것이 한글과 한자를 섞어 세로쓰기하던 것을 한글전용에 가로쓰기로 바꾼 박정희의 한글전용 결단 덕분이라고 광신도들이 자랑하고 있다. 만일 오바마가 한국의 건강보험이 부럽다고 말하면, 그것 봐라, 돈 때문에 병원에 못가고 죽어가야 한다는 미국의 건강보험이라는데 세계가 부러워하는 한국의 의료보장제도를 만드신 박정희 각하가 얼마나 훌륭하신 분이냐 하면서 광신도들이 어깨춤을 추고 난리법석을 떨 것이다. 한국의 발전이 죄다 박정희 덕분도 아니거니와, 몇가지 치적을 뻥튀기한 한 것으로 박정희가 인권을 탄압하고 민주주의를 압살한 죄악을 덮을 수는 없다. 거듭 말하거니와 한국 찬양이 박정희 찬양으로 왜곡되는 게 문제다.”
다음, 박정희를 “신화를 만든 한국경제의 건축가”라고 추켜세웠던 뉴욕타임스 기사는 옛날 것이니 접어두고라도, 김대중이 오랜 친구라고 말하는 키신저(김대중자서전 2권 451쪽)를 향해서는 한마디를 남길 필요가 있을 것이다.
“키신저는 선(先)산업화, 후민주화를 선택한 박정희가 옳았다고 말했다. 박정희 시대를 잘 아는 키신저가 노벨평화상을 탄 김대중의 동지로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우리는 키신저에게 배신감을 갖고 있음을 밝혀둔다.”
미국을 떠나기 전에 유엔본부 쪽을 향해서도 말을 던져 봄직하다.
“아프리카에 가서 한국의 새마을운동을 권고한 반기문 유엔사무총장도 따져봐야 할 인물이다. 그는 70년대 초 외무부에 들어와 유신독재가 길러낸 관료다. 박정희 DNA를 갖고 있다. 그래서 자조ㆍ자립ㆍ협동 새마을 정신을 배우라고 선전하는 것이다. 유엔사무총장은 한국에서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김대중 DNA를 갖고 있는 인물로 뽑아야 했다.”
마지막으로 유럽행.
유럽에서는 “60년대 빈국서 한강의 기적 이뤘다”는 독일과, “한국은 아시아의 성공모델”이라는 프랑스의 교과서들이 박정희 시대를 찬양하고 있음을 따져야 할 것이다.
“당신네 나라의 교과서는 오류(誤謬)로 도배되어 있다. 한강의 기적은 만들어진 신화에 불과하다. 군사독재, 개발독재를 합리화한 거짓 선전에 놀아나 청소년들에게 거짓 역사를 가르쳐서야 되겠는가.”
이렇게 주장하면 그쪽에서는 당연히 한강의 기적을 매도하는 반박정희 홍보팀을 의아스럽게 바라볼 것이다.
아래와 같은 문답(問答)을 가상해 봄직하다.
“한강의 기적을 그렇게 비판하는 이유가 뭔가?”
“한국의 발전이 박정희 독재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말이다. 따라서 박정희를 연상시키는 한강의 기
적은 한강의 사기극이다.”
“당신들 분명히 한국인인가?”
“그렇다.”
“한국인들은 박정희를 절대적으로 지지하던데?”
이쯤해서 대답이 난감해지면,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이렇게 소리쳐 보라.
“한국인은 죄다 병들었다. 다들 미쳤다.”
◇ ▲박정희 대통령 국장(國葬) 때 중앙청 분향소에서 버스안내양들이 울고 있다(1979). ⓒ 국장 동영상 캡처 |
이것이 알려지면 사태는 다급해진다. 사방에서 한국 교민들이 몽둥이 들고 쫓아올 테니 얼른 보따리 싸서 귀국 배행기를 타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의 언행이 외신보도로 국내에 전해졌을 때 인천공항에서 무사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 감당은 그네들 몫이다.
천하를 향해 포효(咆哮)하는 기백으로 박정희와 싸우려면 무엇이 두렵겠는가. 정말로 박정희와 싸우려거든 지하의 박정희에게 돌을 던질 게 아니라 국민에게 돌을 던져라. 박정희를 찬양하는 바다 건너 백인종ㆍ황인종ㆍ흑인종들에게도 열심히 돌팔매를 날려라.
그네들 소신이 정의롭고 거기에 목숨처럼 소중한 명예와 인격을 걸고 있다면 맞아죽을 각오로 싸우지 못할 이유가 없다.
허구한날 음습한 구석에 죽치고 앉아 볼멘소리, 잡소리를 군시렁거려 봐야 국민은 쇠귀에 경 읽기이니 도리가 없지 않은가. 국민에게 돌을 던졌다가 멍석말이 몰매를 맞아죽은 열사(烈士)로 이름을 남길 용기와 배짱을 가져야 그게 진짜 박정희와 싸우는 것이다.
글/김인만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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