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가까이에서 본 인간 박정희
김두영(전 청와대 비서관)
과잉충성 그만 해요』
그해 8월15일 기념식 직전에 박경호실장은 부하들에게 『해외동포들도 많이 오니까 친절하게 경호에 임하라. 될 수 있는 대로 반노출로 활동하라』고 당부했다. 지만군 피서소동으로 직위해제 되었다가 살아난 경호관도 그날 국립극장의 경호를 맡았다. 문세광은 바로 그 정문을 통과했던 것이다. 문이 국립극장에 들어 올 수 있었던 것이 그 경호관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만약 그가 직위해제된 상태로 그날 근무를 안했더라면 어떻게 됐었을까 하는 상상을 나는 가끔 해본다.
어느 날 경복궁에서 육여사가 명예회장으로 있는 양지회 주최로 경로잔치가 열렸다. 경호실에서 연락이 오기를 「각하 집무실에 노래소리가 들리니 노래를 삼가달라」는 것이었다. 육여사는 이를 묵살해버렸다. 행사를 마치고 청와대 본관으로 육여사가 돌아오니 경호과장이 마중나와 인사를 했다. 육여사가 『거기서 지시했어요?』라고 했다. 경호과장이 어물어물하고 있으니까 육여사는『그렇게 과잉충성하지 말아요. 집무실에서 들리긴 뭐가 들려요?』라고 쏘아붙이는 것이었다.
박종규와 차지철의 차이
나는 자연히 박종규, 차지철 두 경호실장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다. 차갑고 무섭게 보이는 점에서는 같았으나 박대통령을 생각하는 마음자세가 근본적으로 달랐다고 나는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그런 차이는 위기 때의 조건반사적 행동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났다. 육여사 피격순간 박실장은 용수철에서 튕겨나오듯 의자에서 앞으로, 즉 총을 든 문세광이 달려오는 방향으로 뛰어나오면서 권총을 뽑았다. 10.26밤 궁정동에서 차실장은 김재규의 권총이 불을 뿜는 순간 화장실에 숨었다.
어느 여름날 박실장이 대통령 제2부속실에 들렀다. 부속실 여직원이 『실장님, 각하께서는 냉방을 하지 않고 있는데 경호실 식당에 가보니까 냉방이 잘 됐던데요』라고 했다. 박실장은 그 자리에서 전화를 들더니 『어느 놈이 냉방을 틀고 있나? 당장 꺼!』라고 소리쳤다.
한양 컨트리 클럽에서 박대통령이 골프를 치고나서 곰탕을 두 그릇 비우자 박실장은 『각하께서 두 그릇이나 잡수셨다』하면서 자기 일처럼 좋아하면서 자랑하고 다녔다.
차실장은 박대통령 말년에 장관 등 고위인사를 초청, 배석시킨 가운데 분열식을 가졌다. 나는 지금도 왜 대통령이 그런 행동에 제동을 걸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경호실에 배속된 경찰과 수경사 경비단 병력은 임무교대를 할 때 경호원가를 불렀다. 1974년 겨울에 근혜씨가 나에게 『아버님께서 그 노래가사가 듣기에 거북하다고 하시며 부르지 말도록 하라고 하시니 좀 연락해 달라』고 했다.
내가 차실장 보좌관에게 전화를 했다. 박실장 같았으면 두말없이 대통령의 생각에 따랐을 것이다. 차실장은 달랐다. 다음날 그는 노래를 녹음한 테이프와 가사를 들고 대통령께 달려와 재고를 요청했다.
박대통령은 「경호원가」란 노래의 가사 중에서 「이 나라 이 겨레 구원자 되신 님의 뜻 받들고자 여기 모였네」가 듣기 거북하다면서 꼭 경호원가를 부르고 싶다면 향토예비군의 노래와 섞어서 부르도록 하라고 타협안을 제시했다. 그 다음부터는 두 노래가 번갈아 들려오기 시작하였다.
박대통령은 누가 면전에서 자신을 창찬하면 매우 계면쩍어하였다. 그는 체질적으로 아부를 하지 못하고 받지도 못하는 사람이었다. 김일성의 생일은 북한에서 국경일이 돼 있지만 박대통령은 한번도 생일파티를 가져 본 적이 없었다. 박대통령은 1917년 11월14일에 태어났는데 호적에는 음력인 9월30일로 되어 있다. 이날이 되면 총리가 각료들을 대표하여 아침에 집무실로 대통령을 방문, 축하의 뜻을 전하곤 하였다. 어느 장관은 대통령 내외가 있는 자리에서 양력 9월 30일이 대길한 날이라고 사주풀이를 하고 돌아갔다. 육여사는 웃으면서 『남자들은 왜 저렇게 아부를 좋아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박 대통령은 양력 11월 14일을 생일로 지켰다. 가족과 함께 외식을 하거나 케이크를 자를 뿐이었다. 어느 해인가 육여사의 생일에 내가 『축하합니다』고 했더니 육여사는 의외로 『그런 것은 몰라도 돼요』라고 하는 것이었다.
장관들도 모른 대통령 생일
박대통령은 여름 휴가를 진해에서 보냈다. 진해 앞바다에는 저도라는 섬이 있었다. 대통령은 낮에는 이 저도에 가서 쉬다가 진해로 돌아오곤 하였다. 그런 이동 중에 해군의 엄호가 따르는 등 여러 사람들이 수고하는 것을 본 박대통령은 1972년 여름에 박종규실장에게 지시를 내렸다.
저도에 있는 일제시대의 목조건물을 수리해서 잘 수 있도록 해놓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1973년 여름 박대통령은 고속도로를 따라 진해에 도착하였다. 나도 수행하였다. 박대통령은 지방에 갈 때는 지만군을 옆에 앉히고 지나치는 마을에 대해서 자랑스럽게 설명하곤 했다. 저 마을의 소득원은 무엇이고, 이 터널의 길이는 몇 미터라는 식으로 손바닥 들여다 보듯 환하게 짚어주곤 하였다.
그날 진해에 밤에 도착한 박대통령일행은 밤늦게 저도에 상륙하였다. 거기에는 목조건물은 없어지고 새 돌집이 한 채 서 있었다. 일반주택만한 2층건물이었다. 호화주택으로 분류할 정도는 아니었다. 박대통령은 새집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실장을 불러』라고 했다.
박종규 경호실장이 나타나자 벼락치듯 꾸중을 했다.
『집수리하라고 했지 누가 새로 지으라고 했어? 너는 뭘 시키면 꼭 이렇게 하더라. 짐 내리지마! 도로 나가자』
김정렴 비서실장이 나서서 만류했다.
『오늘밤은 주무시고 가시지요. 진해 공관은 준비가 돼 있지 않습니다』
박대통령이 하룻밤을 머무는 사이에 측근들은 구수회의를 가졌다. 이 집을 지은 현대건설의 정주영 회장은 저도에 미리 와 대기하고 있었다. 측근에서는 박대통령이 가장 좋아하는 정회장이 직접 나서면 대통령이 화를 풀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음날 아침에 측근에서 대통령에게 『정주영 회장이 와 계십니다』고 보고했고, 박대통령은 정회장을 올라오라고 했다. 정회장은 『각하, 제가 새로 짓도록 했습니다. 각하께서 쓰시는데 저의 사재인들 아깝겠습니까. 돈이 많이 들지도 않았습니다』고 해명을 해 대통령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후 알려진 바로는 현대건설에서 실비 변상을 받았다고 했다.
박대통령은 경제성장의 수단으로 재벌의 필요성을 인정했지만 가진 자들의 호화판 생활이나 재벌의 횡포에 대해서는 체질적인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공화당 중진의 김모 의원은 신축한 자택에 박대통령을 모셨다가 혼이 난 경우였다. 김의원은 『사실은 저의 형님이 도와주어 지은 것입니다』고 변명했다. 박대통령은 『그 형님은 차관받아 집만 지었나?』고 쏘아주더란 것이다.
변기물통에 벽돌 한 장
청와대에서 박대통령이 실천한 근검절약은 너무 심할 정도였다. 여름에 냉방기를 켜지 못하게 하고는 당신은 집무실 문을 열어놓고 선풍기와 부채로써 더위를 견디었다. 겨울에도 난방기 트는 데 인색하여 직원들은 속옷을 두껍게 입고 더운물이나 커피를 자주 마시면서 한기와 싸워야 했다. 박대통령은 집무실 화장실 변기 속에 벽돌 한 장을 넣어 두게 했다. 그만큼 물을 절약하기 위해서였다.
10.26사건 뒤 청와대를 정리하던 직원들이 박대통령의 침실의 변기 물통에서도 벽돌을 발견하고는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침실이면 다른 사람이 들어갈 리가 없는 곳이고 그런 절약을 억지로 할 필요도 없을 터인데 빅대통령은 절약을 쇼로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정직한 방법으로 했던 것이다.
박대통령은 전력을 아낀다고 집무실에서 책상 위 전등만 켜 놓고 일을 보았다. 어둑어둑한 저녁 때 누가 들어서면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누구야?』라고 기웃거리기도 했다.
박대통령은 입던 양복과 신던 구두를 그리고 넥타이 따위를 측근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내가 박대통령으로부터 받은 양복을 약간 고쳐 입고 출근했더니 그렇게 흐뭇해할 수가 없었다. 육여사도 입던 한복을 줄여 근혜씨에게 넘겨주었다. 박대통령은 구두의 뒷창뿐만 아니라 앞창에도 고무판을 덧붙여 신었다.
박대통령은 사범학교 학생.교사.군인생활을 오래 했기 때문인지 정리․정돈의 습관이 체질화돼 있었다. 허리띠의 바클은 늘 중심에 와 있었고 허리띠의 여분이 길게 나오지 않도록 했다.
회의 때 박대통령이 앉은 탁자 위에는 메모지, 재떨이, 필기도구가 놓인다. 박대통령은 그것들을 직선으로 다시 맞춘다음에 두 손을 무릎위에 놓곤 하였다. 이것이 회의를 시작하라는 신호로 받아들여졌다.
박대통령은 가끔 지만군의 방을 불시점검하고는 『이게 뭐야? 정돈 좀 할 수 없나』고 꾸중을 내렸다. 어느날 박대통령은 육여사와 함께 식사를 하고 있다가 『임자, 그 방에 있는 책정리좀 하지?』라고 했더니 육여사가 『지금 바쁜데 그런 것은 천천히 하지요』라고 했다. 박대통령은 옆에 있던 나에게 『김군, 자네는 군대에서 내무사열도 안 배웠나?』라고 나무라는 것이었다.
식사가 끝나자 박대통령은 『나하고 가자』면서 일어서더니 부속실 전석영씨까지 데리고 창고로 갔다. 직접 문을 열더니 『이것 정리좀 해. 이래가지고 재고를 어떻게 파악하나』라고하면서 정리하는 방법을 일일이 지시했다.
대통령 집무실에는 책상 뒤에 문갑이 붙박이처럼 붙어 있었다. 박대통령은 메모용지, 가위, 자, 스카치 테이프 등 문구류를 직접 정리해 두고 꺼내 썼다.
나는 박대통령이 당황하거나 서둘고 허둥대는 것을 한번도 본 적이 없다. 박대통령은 늘 정리하고 계획하며 대비하는 사람이었다.
박영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청와대 민정비서관으로 일할 때였다. 박대통령이 동남아 순방에 나서기 하루 전인데 갑자기 박비서관을 부르더라는 것이다.
박대통령은 『내가 깜박 잊고 갈 뻔했다.』면서 민정반 활동비를 건네주더란 것이다. 『출국을 하루 앞둔 시기에 그렇게 사소한 데까지 신경을 쓰는 데 질려버렸다』고 나중에 회고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박대통령이 대용식량의 하나로서 밤나무 등 유실수 심기를 독려하고 있을 때였다. 박대통령은 청와대 뜰에 밤나무를 심도록 했다. 물과 비료를 어떻게 주라는 식으로 자세한 지침서를 써 총무비서실에 내려보냈다. 밤이 1년쯤 일찍 열리자 다섯 개의 밤알을 김현옥 내무장관에게 내려 보내면서 메로지에다가 그동안 가꾼 요령을 적어 보냈다. 김장관은 이 밤알을 알콜병에 넣어놓고 그 옆에 대통령의 메모를 표구해 걸어두고는 관계공무원들이 오면 베껴가라고 했다고 한다.
대담함과 세심함
언젠가 한번은 내가 퇴근을 하려는데 육여사께서 저녁먹고 영화보고 가라고 하셔서 가족들과 함께 저녁을 먹은 뒤 박대통령 내외분과 함께 영화를 보게 되었다. 나는 꽤 재미있는 영화려니 했는데 그날 상영된 영화는 문화영화 4편이 전부였다.「고구마 온상 재배법」「밤나무 재배법」 「독도를 지키는 경찰관」이었다.
더욱 놀란 것은 박대통령이 탁자위에 메모지를 놓고 영화 내용을 열심히 메모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공부를 하는 것이었다.
5.16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박대통령의 대담함과 세심함 때문이었다. 5.16거사에 참여한 이들로부터 들은 이야기인데, 박장군은 한강다리를 넘을 때 사격을 받아 해병대․공수단병력이 움직이지 못하는 위기를 맞았다. 측근에서 『일단 물러납시다』고 하니까 박소장은 『야, 우리가 모두 여기서 죽으면 될 것 아닌가』라고 말하더란 것이다.
KBS를 통해 5.16거사를 처음으로 알렸던 박종세 아나운서는 그날 새벽 당직이었다고 한다. 총성을 듣고는 인민군이 쳐들어온 줄 알고 숨었다는 것이다. 문을 두드리면서 누군가가 『박종세씨 계십니까』라고 하기에 『북한 인민군은 아니구나』라는 안도가 생기더란다.
5.16주체 군인들에게 이끌려 아래층으로 내려갔더니 박정희 소장이 기다리고 있다가 『나, 박정희요』라면서 손을 내밀었다. 그 자리에서 박소장은 박 아나운서에게 혁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박종세씨는「혁명을 일으킨 이 긴박한 순간에 나한테는 그런 설명을 안해도 되는데…」하고 다소 의아하게 생각했었다고 한다. 박소장이 워낙 열의를 가지고 진지하게 혁명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것을 듣고 있으니 『아, 이분이 적어도 혁명공약을 낭독할 사람은 그 뜻을 납득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구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박소장의 부하들은 군 방송요원으로 하여금 5.16거사 방송을 하도록 하자고 건의하기도 했으나 박소장은 『국민들의 귀에 익은 목소리를 통해 알려야지 믿을 것이다』면서 거절했다고 한다.
육여사 피격 현장, 5.16의 현장등에서 나타난 대담함 속의 세심함이야말로 박대통령의 진면목이었다.
늘 곤두 서 있는 분
1975년 2월12일에 유신헌법 존치여부에 관한 국민투표가 있었다. 나는 근혜씨를 통해서 대통령에게 「헌법에 관한 찬반토론을 허용하는 것이 좋겠다. 그렇게 해도 압도적으로 찬성이 많을 것이다」는 요지의 건의를 했다. 이 건의를 들은 박대통령은 나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유신헌법 제정시 국민투표에서 90%이상의 찬성을 얻었으나 지금 야당에서는 트집을 잡고 있지 않은가. 그 때 나는 계엄령을 해제한 가운데서 국민투표를 실시하자고 했더니 수석들이 유신의 정당성은 역사가 증명할 것이라면서 반대하여 그냥 두었었다. 자네의 이야기도 일리는 있는데 찬반토론을 허용하면 이 겨울에 내가 고무신․밀가루를 들고 전국을 돌아다녀야 하지 않겠나』
박대통령은 나를 납득시키려고 일부러 자상한 설명을 하는 것이었다. 그냥 묵살하면 될 것도 대통령은 상대를 납득시키려고 애썼다. 유신헌법 찬반투표에서 약 73%의 찬성률을 보이자 박대통령은 『잘 됐어. 90% 지지에서 내려갔지만 더 나왔으면 조작되었다고 할테니까…』라고 했다.
박대통령은 늘 긴장된 자세를 유지한 분이다. 집무실에서는 소파에 거의 앉지 않고 회의용 의자에 꼿꼿이 앉아 일을 보았다. 이 의자는 L자로 딱딱하게 생긴 것이었다. 박대통령은 집무실에서는 물론 차중에서도 낮잠을 자거나 졸지 않았다. 항상 정신을 칼날처럼 고추세우고 있었거나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진해에서 여름휴가를 보낼 때도 박대통령은 옥포 조선소나 마산 공단을 둘러보곤 하였다. 한번은 낚시 배를 타고 거제도 쪽으로 갔다. 육여사와 수행원들은 멀미가 나서 구토를 했다. 박대통령은 끄떡 않고 쌍안경으로 여기저기 둘러 보는데 내 눈에는 너무 「지독한 분」으로 비쳐졌다. 1975년 11월 7일에 해군 기동연습도중 함대함 미사일 발사시험이 있었다. 그 구축함에는 군 수뇌부 인사들이 배석하였다. 파도가 쳐 배가 일렁대자 배석자들은 하나, 둘씩 자리를 떠 아래로 내려가 멀미를 하기 시작 했다고 한다. 나중에는 박대통령과 몇사람만 남게 되었다 박대통령은 갑판 위 의자에 얼어붙은 듯 앉아 시험장면을 시종일관 지켜보았다.
멀미에는 장사가 없다고 한다. 선장도 남의 배종에 타면 멀미를 한다고 한다. 자기 배에 있을 때는 운항에 신경을 집중시키느라고 멀미할 여유가 생기지 않는 것이리라. 박대통령이 멀미를 하지 않은 것은 그분의 정신집중력 때문이 아닌가 한다.
박대통령은 또 사람을 긴장시키기도 하고 감동시키기도 하며 그 사람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요령을 터득하고 있었다. 무역진흥확대회의에 참석한 기업 대표들과 인사를 하는데 효성그룹의 사장과 악수를 하면서 『조홍제 회장께서 입원해 계시다면서요. 꼭 안부를 전해주십시오』라고 했다. 병상에서 대통령의 말을 들은 조회장은 기분이 좋아서 『적자를 봐도 좋으니 수출량을 늘리라』고 지시하더라는 것이다.
한때 대통령 특별보좌관으로 일하기도 했었던 철학자 고 박종홍 교수는 박대통령을 이렇게 평했다고 한다.
『내가 박대통령을 천재라고 하면 아부가 될 것이고, 그분은 적어도 수재는 넘는 사람이야』
핵심을 포착하는 능력
72년 가을 국립교향악단 정기 연주회에 박대통령께서 나가게 되어 있었다. 그것은 내가 육여사께 『대통령께서는 축구시합 구경만 가시고 예술활동에는 관심이 없으신 것 같다』는 음악인들의 불평을 전해 드렸더니 내린 결정이었다.
그러나 당일 연주회는 오케스트라 연주회가 아니라 국립합창단과 소년 합창단 등을 동원한 교성곡(交聲曲)이란 이름이 붙은 대합창제였다. 막이 오르자 음악연주 대신에 사회자가 대통령 업적을 칭송하는 시를 읊고 있었다. 청와대 정무비서실과 문공부 당국자들의 과잉충성이 발동한 것이다. 옆에서 보니 박대통령의 눈꼬리가 올라가면서 불쾌한 모습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관람을 마치고 청와대로 돌아온 박대통령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그런 연주회는 당장 그만 두라는 것이었다. 계획에 따르면 그 연주회는 지방순회까지 계획하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박대통령의 모처럼의 교향악단 참관은 그후로도 다시 이루어지지 못했다.
나는 박대통령의 지능지수가 특출 했는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그분의 놀라운 기억력과 판단력 및 통찰력은 천재성에서 나온 것이라기 보다는 늘 국정에 대하여 생각하고 고민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지식이 관심에 비례한다는 말 그대로이다.
박대통령에게 지만군이 이렇게 물은 적이 있었다.
『아버지, 저는 학교공부도 복잡해서 제대로 머리에 정리가 안 되는데 아버지는 그 복잡한 나라일을 어떻게 다 보십니까?』
『내 책상의 서랍들이 정치, 경제, 문화, 사회로 분류돼 있다고 하자. 나는 정치 서랍을 빼내어 일을 볼때는 거기에 정신을 집중하고 그것을 닫은 다음, 경제 서랍을 빼내 일을 볼 때는 정치는 싹 잊어버리고 경제에 온 정신을 쏟는다. 그런데 너는 정치, 경제, 문화, 사회의 서랍들을 한꺼번에 열어놓고 있으니 어느 하나도 제대로 공부하고 있지 못한 거야』 박대통령은 서랍을 빼고 닫는 식으로 자신의 감정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분이었다. 아침에 어느 장관에게 화를 냈다가도 다음 면담자를 맞을 때는 언제 그랬던가 할 정도로 냉정하게 돼 있었다. 변화하는 그 순간순간의 상황에 진지할 수 있는 분이 박대통령이었다. 박대통령은 기억력이 비상했지만 쓸데없는 것은 아예 외우려 하지 않았다. 라디오 주파수를 몰라 라디오에다가 KBS, MBC란 표지를 붙여 놓았다. 사소한 것에는 무관심하고 중요한 것에는 신경을 쓸 줄 아는 분이었다. 그러니 중요한 가닥이나 흐름, 그리고 사물의 핵심을 결코 놓치지 않는 것이었다.
포항제철 확장공사 계획을 박대통령께 보고하게 된 외지 담당 비서관이 계획안과 포철의 현황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나서 공장사진과 브리핑차트를 들고 집무실에 들어가 열심히 설명을 했다. 설명을 다 듣고 난 박대통령이 공장 사진을 보면서 「이 공장 옆에 있던 배수로를 어떻게 처리했느냐」고 물었다. 모든 것을 암기했던 그 비서관이었지만 대통령이 관심있게 보아 온 배수로를 알 턱이 없었다.
조카 구속토록 지시
그러나 이렇던 박대통령도 육여사 서거 후에는 자세가 좀 이완되는 듯한 기미를 보이게 된다. 박대통령을 내면적으로 조용히, 그러나 강력하게 뒷받침하였던 육여사가 사라짐으로써 그의 정신세계가 허전해진데다가 국민들에 대한 생각도 변하였다.
『내가 혁명을 한 것은 목표가 있어서인데 그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국민들이 기다려 줄 수 없나…』하는 말을 가끔 하기도 하였다. 「국민들이 몰라준다」는 섭섭함과 「나도 나라를 위해 할 만큼 하지 않았는가」하는 자기만족과 자신감이 박대통령을 변화 시켜간 중요한 심리적 동기였다는 생각이 든다.
박대통령이 현충사를 자주 찾아가 충무공과 「역사의 대화」를 자주 가진것도 당대에 인정을 받지 못하고 핍박까지 받은 충무공에게 자신의 처지를 투영시켜 보려는 뜻이 아니었을까.
박근혜씨에 의하면 육여사의 서거이후 썰렁한 청와대 2층 내실에서 박대통령은 가끔 단소를 불었다. 텅빈 청와대를 울리는 애조띤 단소 소리는 듣기에 민망할 정도었다. 박대통령은 어느날 부속실 직원에게 『요사이 밤에 배가 고파. 내 방에 쿠키 좀 갖다 놓아』라고 했다.
바깥에서 보면 철권의 통치자였지만 밤에는 쓸쓸한 홀아비였던 것이 박대통령이었다. 「악처가 효자보다 낫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박대통령이 속현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분에게는 불행의 씨앗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하기야 그분 성격에 재임중의 재혼은 불가능 했을 것이다.
근혜씨가 대외적 활동을 줄이고 박대통령을 집안에서 도와드리는 일에 더 시간을 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박대통령은 근영씨와 둘이서만 저녁을 들게 되는 경우 근혜씨가 지방 행사를 끝내고 들어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식사를 함께 한 적도 많았다고 한다.
1973년 가을 어느날 지만군이 다니던 중앙고에서 하교하여 청와대로 돌아왔는데 얼굴이 퉁퉁 부어 있었다. 자초지종을 물었더니 상급생에게 얻어맞았다는 것이었다. 밴드부 연습실에 가서 연습이 끝나고 아무도 없을 때 북을 치다가 들켰던 것이다. 저녁무렵 육여사로부터 인터폰이 걸려 왔다.
『아까 지만이에게 왜 맞았느냐고 물었다면서요?』
『예』
『그런 건 왜 물어요. 모르면 어때? 내가 가슴이 얼마나 아픈데…』
학교에서는 뒤늦게 대통령 아들이 맞았다는 사실이 알려져 발칵 뒤집혔다. 때린 학생을 정학시킨다는 이야기가 들려와 육여사는 『제발 모른 척 해달라』고 부탁했었다.
근영씨가 서울음대 재학중일 때 친구들과 함께 강화도 전등사로 놀러가고 싶다고 해서 박대통령이 마이크로 버스를 내게 하여 같이 타고 일종의 관광안내원 노릇을 한 적이 있었다. 돌아와서 하는 말이, 『요즈음 아이들은 어째서 예절을 그렇게 모를까. 대통령이라고 부르기 어려우면 근영이 아버지 라고 할 수도 있을 텐데…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가버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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