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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 화재가 남긴것

산야초 2015. 11. 14. 10:24

숭례문 화재가 남긴 것 숭례문, 그 600년의 변화 (3): 2008년 화재와 피해 수습

지난 2008년 2월 10일 숭례문이 불타고 있다. 토지보상에 불만을 품은 한 노인이 저지른 어처구니없는 방화사건이었다. <사진: 문화재청>

 

한 노인의 방화로 상층부 90% 훼손

숭례문 화재는 2008년 설날의 마지막 연휴의 저녁에 발생했다. 토지보상에 불만을 품은 한 노인의 어처구니없는 방화에서 비롯되었다. 방화의 상황을 살펴보면, 2008년 2월 10일 일요일 오후 8시50분경 숭례문 주변도로를 지나던 택시기사가 숭례문 2층 누각 좌측에서 연기가 발생하는 것을 목격하여 119에 최초 신고한 화재로, 방화자인 채모씨가 8시 47분경 사다리로 서쪽의 문루 담장에 사다리를 대고 넘어가 문루의 계단을 통해 2층 누각에 침입하였다.

 

누각 2층 중앙에서 미리 준비한 시너 1.5리터 3병 중 2병을 세워놓고 1병을 흘려 1회용 가스라이터를 이용해 방화하였다. 불은 기둥을 타고 올라 상부 부재에 옮겨 붙었다. 소방관이 화재 직후 8시 53분경 현장에 도착하였고, 누각으로 진입하여 진화하였다. 그러나 상부 지붕 속까지 옮겨 붙은 불은 진화가 완전하게 되지 않았으며, 연기가 계속 발생하였다. 연기가 지속 발생하는 동안 고가차와 굴절차를 동원 지붕과 처마에 대량방수를 집중하였으나, 쉽게 진화되지 않았고, 다음날 오전 1시56분에 2층 문루가 붕괴되었다.

 

이날의 화재 이후 숭례문의 부실한 관리체계, 쉽게 진화하지 못한 이유 등에 대한 언론 기사가 봇물 쏟아지듯 이슈화 되었다. 주요 쟁점에 대해서 필자의 생각을 정리한다면, 먼저 숭례문의 관리는 2006년 숭례문 개방 이후 개방에 따른 관리체계가 방화와 같은 범죄에 노출된 것만은 확실하다. 인력과 예산이 부족한 근본적인 탓도 있지만, 사회가 복잡해짐에 따라 다양한 사회범죄에 대한 대비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화재 진화가 제대로 되지 못한 것은 목조문화재에 대한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국보건물이라는 중요도로 인해 소방관의 임의적인 부분 파괴 등의 대처가 어려웠던 점, 문화재청과의 원활한 의사소통 부재 등이 원인인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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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숭례문 개방 모습 <사진: 문화재청>

화재 전 숭례문의 모습 <사진: 문화재청>

 

숭례문 화재직후 거의 모든 언론에서는 숭례문이 '전소' 또는 '소실'되었다는 보도를 하였다. 특히, 화재직후 각종 단체에서 분향과 49제까지 지내는 등 마치 죽은 자를 대하는 듯한 행위가 계속 이루어 졌다. 그러나 실제 숭례문은 문루 2층에서 방화되어 2층 상부의 적심에서 불씨가 남아 연소하면서 2층 지붕이 무너져 내렸으며, 문루 1층은 화재에 직접적인 피해는 없었지만, 2층 지붕이 무너져 내리면서 1층 지붕에 영향을 주면서 부분 파손되었다. 문루 2층은 기둥과 기둥을 연결한 창방과 평방 공포 부재 일부가 남아 있었다. 전체로 본다면 하층은 90% 가량이 온전히 남았으며, 상층은 90% 가량이 훼손되었다.

 

또한 고주 등 큰 규격의 부재는 상부 일부가 탔으나, 상당부분 재활용이 가능한 상태로 남았던 것이다. 사람으로 치자면, 큰 부상을 당한 것이지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화재현장을 그대로 두어 우리 문화재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잘못을 대대로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고도 하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크게 부상을 입은 숭례문을 하루라도 빨리 치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2차 붕괴와 내부 구조가 노출되어 눈, 비로 인한 추가적인 손상이 되지 않도록 조속한 조치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숭례문 화재 진압 당시 모습 <사진: 문화재청>

숭례문 화재 직후의 모습 <사진: 문화재청>

숭례문은 여전히 국보 1호다!

또 하나의 이슈는 똑같이 복원하더라도 국보로써의 가치를 상실하였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화재직후 건축분과와 사적분과로 이루어진 통합분과위원회를 열어 국보 1호 숭례문의 지위 문제에 대하여 회의를 한 결과 “국보 지정 당시 목조건축 자체만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고 역사적 의미 등 여러 사항을 감안해서 결정한 것인 만큼 국보 1호의 지위를 유지한다.”고 결정했다. 이러한 결정은 앞서 큰 부상을 당했을 뿐 그 수명을 다하지 않았다는 것과 상통한다고 하겠다.

 

숭례문은 태조 7년(1398) 2월 건립 이후, 세종 30년(1448), 성종 10년(1479), 고종 연간에 큰 수리를 하였다. 또한 1963년에 완전 해체보수하였다. 건축 문화재는 처음 세워진 그대로 유지하기는 어렵다. 사용하면서 변화를 갖게 되고, 퇴락 및 노후에 따라 지속적인 보수도 이루어진다. 화재 직전에도 태조 초창의 부재는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초창의 양식과 기본적인 형태를 유지함으로써 조선초기의 건축양식을 유지하고 있는가이다. 이러한 형태적인 현상과 함께 숭례문이 도성의 남문으로서의 역할과 역사적 사건 등도 고려해야 한다.

 

앞서 큰 훼손이 있다고(1984년 보물 제476호 화순 쌍봉사 대웅전의 전소와 같이 완전히 불타 없어져 문화재 지위를 상실한 경우가 아니라면) 국보의 지위를 상실했다는 의견은 대단히 성급한 판단이다. 그 문화재가 갖는 건축적 특성과 역사성 등을 종합적으로 보아야 하며, 그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는 보다 확실한 증거가 있다는 것이다.

 

숭례문 화재는 그동안 문화재 관리체계의 허점을 지적해주었다. 사회, 자연적 변화에 선제적 대응이 되지 못하였고, 국가지정문화재의 관리체계가 이원화, 방재업무 전담인력의 절대부족 등이 여실히 들어난 사건이었다.

숭례문 화재수습

화재 직후 수습을 위한 긴급조치로 궁능문화재과 소속의 직영보수단이 투입되어 2차 피해를 최소화 하기 위한 부재 수습작업을 펼쳤다. 상부에 앙상하게 남은 피해부재를 해체하여 끌어내리는 것도 중요한 부분이지만, 낙하된 수많은 부재의 처리도 시급한 상황이었다. 낙하된 것은 목부재뿐 아니라 기와편, 강회와 흙 등이 뒤엉켜 있어 부재의 분류와 처리가 필요한 상태였다.

 

숭례문 화재 수습의 모습 <사진: 문화재청>

 

완전히 노출된 문루의 목부재를 보호하기 위한 덧집 구조물이 설치가 시급하였고, 이를 위해 낙하된 화재 잔해를 제거하여야 가설구조물을 세울 수 있었다. 그나마 가치가 있는 목재 및 전돌, 기와 등을 골라내고 나머지 잔해는 문화재위원회 보고를 통해 폐기처리토록 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부 기와편과 함께 폐기처리가 됨으로써 성급한 조치로 언론 등을 통해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화재수습은 피해현황에 대한 조사, 철편, 장식기와 등 피해부재에 대한 보존처리도 이루어졌으며, 피해를 입은 목구조 결구체를 그대로 해체하여 경복궁에 마련한 부재보관고로 이전하였다. 피해현황 수습보고서를 발간함으로써 응급조치를 일단락하였고, 2008년 5월 20일 복구의 기본방향, 이후의 발굴 및 고증조사, 복구공사 등의 일정계획을 담은 숭례문 복구 기본계획을 발표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