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고서화

안중근의사 친필 진본

산야초 2015. 11. 15. 11:54

 

 

 

 

(해석) 백세청풍(百世淸風) - 영원한 맑은 세상

여순 감옥에서 대한국인 안중근 쓰다.)


 


 

안중근 의사(1879~1910)의 친필 유묵(遺墨) ‘백세청풍(百世淸風)’ 진본이 국내에서

처음으로 공개된다.

‘백세청풍’(34×68.5㎝) 진본은 일본 도쿄에 거주하는 사토 가즈오씨가

부친의 유품을 정리하다 발견한 것으로

안의사가 중국 뤼순 감옥에 투옥 중이던 1910년 2월에 쓴 작품이다.

< 출처 : 경향신문 2005.8.3>

 

 

안중근의사유묵

 



 

종    목 보물  제569-21호
명     칭 안중근의사유묵(安重根義士遺墨)
분     류 기록유산 / 서간류/ 서예/ 서예
수량/면적 1폭
지 정 일 2000.02.15
소 재 지 서울 용산구  한남동 산8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시     대 대한제국시대
소 유 자 단국대학교

 



 


 

일반설명 | 전문설명
이 유묵(遺墨)은 러일전쟁(露日戰爭) 당시 전의(典醫)로 종군했다가 종전이 되자 만주(滿洲) 여순감옥(旅順監獄)으로 전근되어 근무하던 절전독(折田督)이 1910년 3월 안중근 의사의 친필을 옥중(獄中)에서 받아 간직해오던 것을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그의 가족들이 일본으로 귀국할 때 조카인 절전간이(折田幹二)에게 넘겨 주었으며 이것이 1989년 2월 20일 단국대학교(檀國大學校)에 기증된 것이다. 중국(中國) 안휘성(安徽省) 선성현(宣城縣)에서 만들어진 품질이 우수한 선지(宣紙)에 2행(行) 16자(字)를 썼는데 그 왼쪽에 "경술삼월(庚戌三月) 여순옥중(旅順獄中) 대한국인(大韓國人) 안중근서(安重根書)"라는 묵서(墨書)와 장인(掌印)이 찍혀 있어 안의사(安義士)가 쓴 친필(親筆)임을 알 수 있다. 웅위(雄偉) 박후(朴厚)한 필체(筆體)에 자신의 뜻을 꾸밈없이 표현한 이 유묵에는 "동양을 보존 하기를 바란다면 우선 침략 정책을 버려야 한다. 때가 지나고 기회를 잃으면 후회한들 무엇하랴!"라는 내용을 담고 있어, 일본인(日本人)의 정책(政策)에 개과(改過)를 촉구하는 계고(戒告)이며, 일본인 집정자(執政者)들에게 경각심을 고취시키는 뜻이 담겨 있다.

 



안중근의사유묵


 


 

종    목 보물  제569-22호
명     칭 안중근의사유묵(安重根義士遺墨)
분     류 기록유산 / 서간류/ 서예/ 서예
수량/면적 1점
지 정 일 2000.02.15
소 재 지 서울 중구  남대문로5가 471 안중근의사기념관 (서울역사
시     대 대한제국시대
소 유 자 안중근의사숭모회

 


 


 

일반설명 | 전문설명

이것은 안중근(1879∼1910) 의사가 남긴 유묵(遺墨:살아있을 때 남긴 글이나

그림)중의 하나로 그의 서예이다.


안중근은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16세가 되던 1894년 아버지가 감사의 요청으로

산포군을 조직하여 동학군을 진압하려고 나서자 이에 참가하였다.

1906년 삼흥학교를 설립하고, 돈의학교를 인수하여 학교경영에 전념하기도 했다.

항일무장투쟁을 시작한 후 일본군 정찰대를 공격, 격파했으며,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를 태운 열차가 하얼빈에 도착하여 그가 러시아 장교단을 사열하고

군중 쪽으로 발길을 옮기는 순간 권총을 쏴 3발을 명중시켰다.

여순감옥에 수감된 후 1910년 3월 26일 형장에서 순국하였다.


여기에는 “국가안위노심초사(國家安危勞心焦思)”(국가의 안위를 마음으로

애쓰고 속을 태움) 8자를 중앙에 행서체로 쓰고, 왼쪽 위편에 “증안강검찰관

(贈安岡檢察官)”, 오른쪽 아래편에 “경술삼월(庚戌三月) 여순옥중(旅順獄中)

대한국인(大韓國人) 안중근근배(安重根謹拜)”라 쓰여 있으며, 그 밑에 안중근

의사의 장인(掌印:손바닥으로 찍은 도장)이 먹물로 찍혀 있다.


이것의 크기는 가로 38.2㎝, 세로 149㎝이다.

이 유묵은 안중근 의사가 1910년 3월 여순 옥중에서 자신을 취조한 당시

여순 검찰청 야스오카 세이시로<안강정사랑 (安岡靜四郞)> 검찰관에게 써준

것으로 야스오카는 죽기 직전 그의 장녀에게 물려주었으며, 그 후 1976년

2월 11일에 ‘안중근의사숭모회’에 기증한 것이다.


이것은 안중근 개인사 및 독립운동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안중근의사유묵-장부수사시여철의사임위기사운


 

지정번호
:

보물 제569-12호

지정연월일
:

1972년 8월 16일

시 대
:

1910년(순종 융희 4) 3월

 

규모·양식

:

1점, 135.4㎝×31.7㎝

재 료
:

종이에 먹

소 유 자
:

숭실대학교

소 재 지
: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 1-1 숭실대학교 박물관

 

1910년 3월 항일투사 안중근(1879∼1910) 의사가 만주의 여순(旅順) 감옥에서

남긴 글씨이다. "장부는 비록 죽더라도 마음은 쇠와 같으며, 의사는 위태로움에

닥치더라도 기운은 구름과 같다"라는 뜻이다.

즉, 조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염원하는 자신은 죽는다 하더라도 쇠처럼 단단한

마음을 가질 것이며, 어떤 곤란과 위험에 처한다 하더라도 구름처럼 초연할 것이라는

스스로의 다짐이었을 것이다.

큰 장부이요 의로운 선비의 꿋꿋한 모습이 옷깃을 여미게 하는 유묵이다.

앞쪽에 "증맹경시(贈猛警視)"라 쓰여있는데 타케시라는 일본 경관(警官)에게 써준 듯하다.

말미에 "庚戌三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 安重根 謹拜"라는 낙관이 있고 그 아래

장인(掌印)이 찍혀있다

 

 

 

 

人無遠慮 難成大業(인무원려 난성대업) - 안중근 - 사람이 멀리 생각하지 않으면 큰 일을 이루기 어렵다.

 

 

안중근의사유묵-인무원여난성대업(人無遠慮難成大業)
 
 
 
     
      
 
보물 제569-8호
지정연월일
:
1972년 8월 16일
시 대
:
1910년(순종 융희 4) 2월
규모*양식
:
1점, 135.8㎝×33.5㎝
재 료
:
종이에 먹
소 유 자
:
숭실대학교
소 재 지
: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 1-1 숭실대학교 박물관
 

 

1910년 2월 항일투사 안중근(1879∼1910) 의사가 만주의 여순(旅順)

감옥에서 남긴 글씨이다.

"사람이 멀리 생각하지 않으면 큰 일을 이루기 어렵다"는 것이다.

마치 ≪논어(論語)≫ 위령공(衛靈公) 편에서 "사람이 멀리 생각하지 않으면

필히 가까운 근심이 있게 된다(人無遠慮 必有近憂)"는 구절을 응용한 듯하다.

즉, 먼 장래를 내다보는 원대한 계획이 없이 그저 눈앞의 것만을 생각하면

필히 아침저녁으로 급박한 걱정이 생길 것이며, 그러면 결코 대업을 이루기

어렵다는 뜻이다.

또 ≪좌씨전(左氏傳)≫ 양공(襄公) 편에 "군자는 멀리 생각하고 소인은 가까운

것을 좇는다(君子有遠慮, 小人從邇)"라는 구절도 있듯이 먼 장래를 생각하는

군자의 도리를 언급한 것이다.

말미에 "庚戌二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 安重根 書"라는 낙관이 있고 그 아래

장인(掌印)이 찍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