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고서화

조선 최초 글로벌 여성 CEO 강빈

산야초 2015. 12. 20.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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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게 돈벌어 조선인 포로 해방시킨 강빈,

요부의 치맛폭에 쌓인 시아버지 음모에 살해 당해

  • 장대성
    전 강릉영동대 총장
    E-mail : dschang28@hanmail.net
    서울서 성장해 경기고와 한국외국어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예탁결..
    입력 : 2014.10.16 10:48

    조선 최초 글로벌 여성 CEO 강빈

    1. 조선인 포로 노예 해방 위해 장사와 농사일 직접 한 세자빈 강씨

    조선 16대 왕 인조의 적장남인 소현세자는 1627년(인조 5년) 참의 강석기(금천 강씨, 후에 우의정)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이해 결혼했다. 세자빈과 소현세자가 18년간의 결혼 생활에서 3남 3녀를 출산한 것을 보면 부부간의 애정이 좋았음은 물론 세자빈 강씨가 건강했음도 알 수 있다. 1636년 10월 만주족의 청국이 일으킨 전쟁(병자호란)에서 3개월도 못 버티고 인조가 청 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복을 하고 강화조약에 따라 소현세자 부부는 청국 선양(심양)에 인질로 잡혀갔다. 그런데 세자빈 강씨는 집안 일만 돌보고 남편 내조만 하는 보통 사대부의 딸이 아니었고 정치외교는 물론 사업 경영 수완도 탁월한 선각의 여인이어서 심양에서 활동이 대단하였다.

     
    청 태종에게 무릎 꿇고 절하며 항복하는 인조.
    청 태종에게 무릎 꿇고 절하며 항복하는 인조.
     
    2. 명문 출신 강빈의 총명이 시아버지 인조의 콤플렉스와 충돌

    소현세자빈 강씨(강빈)는 고려의 영웅 강감찬의 19세손이다(서울 지하철 2호선 낙성대역은 강감찬 출생지인 낙성대 근처이다). 1611년 태어난 강빈의 부친 강석기의 이종사촌은 당대 최고의 대학자로 송시열과 쌍벽이었던 송준길이었다. 강빈의 조모는 광산 김씨로 조선 예학의 태두이며 서인의 정신적 지주인 사계 김장생과 사촌간이다. 김장생의 아들 김집의 문하에서 송시열 등 거물 서인들이 대거 배출되어 조선 후기 사회를 완전 주름잡았다. 명문거족 출신의 강빈은 총명함은 물론 출중한 남자들도 갖지 못한 배짱과 미래를 통찰하는 혜안이 있었다. 패륜아 정원군의 아들이며 청 태종에게 치욕의 항복을 한 인조는 똑똑하고 잘난 명문가의 며느리가 싫었다. 이러한 며느리와 시아버지의 관계를 교묘하게 이용해 두 사람을 돌이킬 수 없는 원수관계로 만든 사람이 늙어가는 인조를 자기 품안에서만 놀게 한 며느리 나이의 농염한 젊은 요녀 조귀인이었다. 다음 그림은 강빈의 가계도이다.
    소현세자 부인 강빈의 가계도.
    소현세자 부인 강빈의 가계도.
     
    3. 인조의 애첩 조귀인은 역사상 최고 요부

    조귀인은 1630년 종4품 숙원으로 책봉되어 입궁하였다. 그녀는 경상우도 병마사를 지낸 조기(순창 조씨)와 그의 첩 한옥(漢玉)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 모친은 기록은 없지만 이름으로 보아 천인 기생 출신인 것으로 보인다. 출생년도는 정확한 기록이 없는데 1630년 숙원으로 책봉되어 입궐한 것으로 보아 강빈의 나이와 비슷할 것으로 추정된다. 조귀인은 천출이었으나 인조의 후궁이었으므로 사가로 따지면 강빈의 시서모(媤庶母)가 되었다. 출신 배경이 전혀 다른 나이 비슷한 두 젊은 여인들이 시서모와 며느리의 관계이니 원만하기가 어려웠다. 또한 조귀인은 시기와 질투심이 많고 권모술수와 이간질이 매우 능한 조선 최고의 악질 여자라 대궐에서 풍파가 일어날 것은 누구라도 예측이 가능했다. 그녀는 1639년 아들 승선군(이름 징)을 낳은 후에 자기 아들을 왕위에 올릴 계획을 간신 김자점과 비밀리에 추진하면서 침술의 이형익을 시켜 소현세자를 죽였다. 인조는 내심 장남의 죽음을 반겼고 김자점은 인조와 조귀인의 마음을 읽고 강빈을 죽이는데 적극 앞장섰다. 아래 그림은 간신 김자점의 모습이다.

     
    간신 김자점의 모습.
    간신 김자점의 모습.
     
    4. 소현세자 살해 후 인조와 조귀인의 다음 목표는 강빈과 그 아들들

    강빈은 청국에서 남편 소현세자를 돕기 위해 농사를 짓고 장사도 하여 거액의 돈을 벌었다. 그 돈으로 청국과의 외교 자금으로도 사용하고 개, 돼지만도 못한 생활을 하는 조선 포로 노예들을 많이 환속시켜 가족이 있는 고국 조선으로 보내주어 백성들의 인기가 대단했다. 강빈의 이런 활동이 권력에 대하여 항상 의심을 갖고 있는 시아버지 인조의 시기와 미움을 사는 것은 물론 제거대상이 되는 원인도 되었다. 1643년 강빈의 부친 강석기가 죽어 강빈이 잠시 귀국하였는데 인조는 강빈이 미워 강빈에게 친정 부친상에 문상조차 못하도록 왕명으로 명령하였다. 그 후 인조와 며느리 강빈과의 사이가 점점 더 악화되어 가고 있던 중 1645년 4월 소현세자가 갑자기 독살을 당했다. 그 배후에는 늙은 인조의 애첩인 요녀 조귀인이 있었다.

    소현세자가 죽은 후 최대의 정치 문제는 소현세자 장남인 원손 이석철(당시 10세)의 왕위 계승 문제였다. 강빈을 원수보다 더 증오하는 조귀인은 강빈의 아들이 왕이 된다면 그것은 죽는 것보다 더 싫었고 까딱하면 자기와 아들의 목숨도 날아 갈 수 있었다. 인조도 얄밉고 미운 그 잘난 며느리 강빈의 아들이 왕이 된다는 것은 독약을 마시는 것 같이 싫었다. 인조와 그의 여인 조귀인의 마음은 하나였다. 대신들이 소현세자의 장남인 원손 석철의 세손 책봉과 장자 상속의 원칙을 강력하게 주장했지만 인조는 원손의 나이가 어리다는 핑계로 소현세자의 동생 봉림대군(17대 효종)을 재빨리 세자로 책봉했다. 이제 강빈과 그녀의 어린 아들 삼형제의 목숨은 더 이상 이 세상의 것이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장조카 대신 왕이 되어 정통성 시비에 시달린 효종.
    장조카 대신 왕이 되어 정통성 시비에 시달린 효종.
     
    5. 인조는 며느리 강빈을 “간통한 개새끼”라고 사약 내려 죽여

    소현세자 사망 후 1년도 안된 1646년 1월 인조 수라상의 전복구이에 독약이 발견되었다. 조귀인이 꾸민 짓이었다. 그러나 주모자로 곧 강빈이 지목되었고 강빈의 나인 5명이 모진 고문 끝에 죽었는데 끝까지 혐의를 부인하였다. 어디에도 강빈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인조는 시아버지를 죽이려는 강빈의 악독한 범죄라고 억지 논리를 만들고 왕의 주장에 반대하는 신하들을 유배를 보내고 유배 간 강빈의 오라비들을 모두 죽였다. 누이가 세자빈이 되었던 것이 죄였다. 강빈이 맏며느리이고 며느리도 자식이니 선처해 달라는 대신들의 간청에 왕은 “개새끼를 어떻게 임금의 자식이라 할 수 있느냐” 하고 욕으로 일축했다.

    강빈이 억울하다는 쪽으로 민심이 흐르자 인조는 억지 간통 사건을 조작해 그 더러운 죄를 강빈에게 더 붙여 1646년 3월 사약을 내려 죽였다. 명문가의 딸로 시아버지 살해 미수와 간통죄라는 더러운 죄를 뒤집어쓰고 36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으니 강빈의 한은 바다를 메우고도 남았다. 강빈이 사형당한 날 시아버지의 애인 조귀인은 “제 년이 양반의 딸, 그렇게 잘 났어! 그러니 쌍년의 딸인 나에게 죽어야지. 그리고 그 잘난 네년 새끼들도 죽어야 마땅하지, 하하하!” 하면서 입이 찢어지도록 웃었다.

    강빈을 죽인 후에는 인조는 강빈의 어머니와 어린 친정 조카들도 죽였다. 이것도 부족해 인조는 1647년 강빈의 아들들, 즉 자신의 어린 친손자들 3명을 모두 제주도에 귀양 보냈고 거기서 1년 후인 1648년 13세의 장손 이석철과 9세의 차손 이석린이 풍토병으로 죽었으나 타살의 의심이 컸다. 조귀인의 완전 승리였다. 애첩에 놀아나 친손자들을 포함하여 장남 일가를 참혹하게 몰살한 이런 잔인한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는가? 인조는 과연 악질 패륜아 정원군의 아들이었고 왕이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될 사람이었다.

     
    시아버지 인조의 사약 먹고 죽은 강빈과 귀양지에서 죽은 어린 아들들 묘.
    시아버지 인조의 사약 먹고 죽은 강빈과 귀양지에서 죽은 어린 아들들 묘.
     
    6. 강빈은 청국에서 조선인 포로 해방 위해 닥치는 대는 돈 벌어

    조선의 사대부 여인들은 집안의 일만 하고 밖의 일은 일체 관여를 하지 않아 남편은 “바깥양반” 부인은 “안주인”이라 불렀다. 또 농업이 산업의 근본이고 상인들을 장사치라고 멸시하는 사농공상 패러다임의 국가인 조선에서 왕가와 양반가 여인이 집 밖에서 천한 장사를 한다는 것은 상상조차도 할 수 없었다. 더욱이 강빈 같이 장차 왕비가 될 최고의 귀한 위치에 있는 세자빈이 돈 벌기 위해 농사는 물론 천한 장사도 주저하지 않고 하였다는 것은 헌법파괴행위였다. 청국에서 남편 소현세자와 함께 볼모로 있던 강빈은 나라와 불쌍한 조선인 포로 노예들을 위해서는 귀천을 가리지 않고 무엇이든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실천에 옮겼다.

     
    심양 노예시장에 팔려 나온 조선 포로 노예들.
    심양 노예시장에 팔려 나온 조선 포로 노예들.
     
    7. 강빈은 조선 최초의 여성 글로벌 사업가이며 벤처 CEO

    강빈은 장사라는 것을 배운 적도 없는 귀족 출신의 세자빈이었으나 사업 감각이 뛰어난 21세기 패러다임의 여인이었다. 당시 심양에는 약 50 만명의 조선인들이 노예로 끌려 와 있었다. 강빈은 가진 돈을 다 털어 심양 노예시장에서 조선인 노예들 몇 명을 돈 주고 해방시켜 주었다. 그들에게는 강빈이 새로운 인생을 만들어 준 하늘이었다. 강빈은 그들과 함께 버려진 초원의 땅을 직접 삽과 곡괭이를 들고 개간해 농장을 만들어 농사를 하니 그들에게는 매일 매일이 감동이었다. 천한 노예 신분에서 자유를 얻어 하늘같은 세자빈과 함께 들에서 일을 하니 꿈속에서도 감동할 일이었다. 그들은 목숨을 바쳐 일을 했다. 생산성은 말로 표현할 수 없게 높았다. 농산물이 귀한 북만주에서 추수한 농산물을 비싼 값에 팔아 돈을 많이 벌어 조선 포로 노예들을 계속 사서 환속시켜 주었다. 그리고 농사를 모르는 유목민족인 만주인들에게 농법을 가르쳐 주어 그들을 놀라게도 하였고 조선인에게 감사한 마음도 갖게 하였다.

     
    소현세자와 강빈이 청국 심양에서 지냈던 심양관 모습.
    소현세자와 강빈이 청국 심양에서 지냈던 심양관 모습.
     
    강빈은 농사법과 수공예 기술이 없는 청국의 북만주로 인삼, 종이, 담배, 수공예품 등 조선의 진기한 물품들을 들여와 청국 상인들에게 많은 이익을 남겨 팔았다. 강빈이 거주하던 심양관 앞은 상인들의 인파로 매일 북적거렸다. 농사와 국제무역으로 많은 돈을 벌어 포로로 잡혀온 조선인 노예들을 사서 고향으로 보내주니 백성들의 인기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갔다. 장차 왕비가 될 귀하고도 귀한 부인이 조선인 포로 노예들의 해방을 위해 천한 사람들과 함께 농기구를 들고 냄새나는 똥과 오줌으로 거름을 주며 밭일을 할 때 조선인들은 감동의 눈물을 줄줄 흘렸다. 이국땅에서 노예 해방을 위해 스스로 몸을 던져 험한 농사일과 상스런 장사를 한 세자빈은 한국은 물론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었다. 강빈은 지배층보다 백성들의 편에 서서 그들을 위해 헌신하는 세자빈이었다. 그리고 진정 글로벌 사업가이며 벤처 경영인이었고, 서양의 발달된 과학과 천주교를 받아들여 새로운 조선을 건설하려는 남편 소현세자와 꿈을 같이 했던 선각자였다.

    8. 율곡 모친 신사임당보다 위대한 선각자이며 개척가인 강빈

    지금 한국의 고액권 50,000원권 화폐 인물은 율곡 이이의 모친 신사임당이다. 신사임당은 귀족집안의 현모양처로서 시화(詩畫)에 재능이 뛰어났고 아들 율곡 이이를 잘 양육해 국가의 동량으로 만들었다. 그 율곡 이이가 사계 김장생의 스승이 되었고 김장생이 조선예학의 거두가 되어 율곡과 사계는 서인 특히 노론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정조 이후 김장생의 직계 노론이 당파 싸움에서 최후 승리를 했으며 그들의 장기 집권은 부패가 극심해 조선을 붕괴하게 만들었다. 율곡 이이가 그 권력자들의 정신적 지주이니 율곡 모친 신사임당도 최고의 여성으로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아래 <표1>과 같이 당시 패러다임에만 충실하면서 귀하게 살았던 신사임당의 생애가 변화무쌍한 글로벌 경쟁시대에 사는 현대 한국인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무엇인가?

     
    신사임당과 강빈의 생애 비교.
    신사임당과 강빈의 생애 비교.
     
    앞의 ‘강빈의 가계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강빈의 친정 집안도 노론의 정신적 지주 김장생과 서인의 거물 영수 송준길과 매우 가까운 친척관계이다. 부친 강석기도 청국과의 타협을 불허하는 척화 보수파 서인의 중진이었다. 강빈은 보수 서인의 우두머리 집안에서 성장해 세자빈이 되어 당시 패러다임에만 충실하면 인생살이도 쉽고 국모자리인 왕비가 보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위의 <표1>과 같이 먼 이국땅 북만주에 인질로 끌려간 역경을 극복하면서 세자빈이라는 최고의 신분을 발로 걷어차고 천인들과 함께 농사짓고 쌍놈중의 쌍놈이 하는 장사를 하면서 남편과 함께 새로운 세상의 조선을 열려고 했던 위대한 행동가이며 신패러다임의 개척자였다. 강빈이 귀국할 때 심양관에 남아 있던 곡식이 4700석이었다 하니 그녀의 경영 능력은 대단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귀족적인 평온한 삶을 살다 간 신사임당보다는 인질로 잡혀있던 역경 속에서 새로운 기회를 탐색하며 신세계를 개척하였던 조선의 최초 여성 벤처 CEO인 강빈의 창조경영정신은 우리 한국인들이 창조경제시대에 꼭 배워야 할 필수 덕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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